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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93화 (193/213)

< 누가 관군인가 (3) >

남경에서는 수성 준비가 한창이었다.

부족한 병력을 채우고자 민가의 백성들을 동원하였으며, 황제 주유랑마저 몸소 갑옷을 입고 나섰다.

그러나 주유랑과 남경 전체가 항전을 결의한 것과 정반대로, 수보 낙양성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벌써 적이 장강을 넘어 들어오고 있는데 무너지는 나라를 어찌 막아내겠는가? 임안과 무창마저 무너진 판이 아닌가?'

수크사하가 이끄는 만주군이 무창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고, 임안을 점령한 정지룡군 역시 내륙으로 진격해왔다.

이자원이 이끄는 본군에 이르러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낙양성은 직접 수보로 내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내세운 자였기에 남경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남경이 요지라 하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빌어먹을."

애초에 그가 남명에 가담한 것은 숭정제 이후 강남에서 독립국가를 만들어 권신으로 군림할 수 있으리란 희망에서였지, 어떤 대단한 충정에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주도권마저 황제에게 빼앗겨버렸으니.'

황제가 저리 나올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낙양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결국 개는 개라는 말인가.

낙양성이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의 부름에 의해 불려온 금의위 출신의 부하들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 중 하나가 눈치를 살피더니 슬며시 운을 띄웠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대인."

부하가 말을 이었다.

"황제가 저리 결사항전을 원하니 싸움의 책임은 모두 그에게 뒤집어씌우고 대인께서는 나라를 들어바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일가를 보존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습니다."

"어허, 그 무슨 소리!"

잠자코 있던 낙양성이 짐짓 꾸짖었다.

그 호통에 부하가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는 가짜 황제를 떠나 정통성 있는 명나라 천자께 항복하는 것이다! 대의가 이리 분명한데 어찌 일신과 일가의 안위 운운하여 진심을 오해받게 하느냐!"

"소, 소인이 그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모인 그 누구도 낙양성의 말이 진심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영명왕을 옹립한 자부터가 낙양성 아니던가.

물론 이곳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낙양성은 말했다.

"이자원에게 밀서를 보내보자."

===

"남경의 수보인 낙양성이 사람을 보내어 신변의 보장을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항복하겠다 합니다."

"마땅히 그리 하여주겠다. 식읍을 넉넉히 내려 평생 의식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리라."

이자원의 말에 낙양성이 보낸 사자는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이제 남경은 바람 앞의 등불인데 낙양성 같은 자의 항복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삼계가 물었다.

그는 여기에서 공신이 더 늘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힘으로도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닌가.

"나는 주유랑을 순교자로 만들어줄 생각이 없다."

애산에 관한 이야기가 수백년 넘게 전해져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

주유랑과 남경 사람들이 모두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면 후세는 널리 이를 기억하리라.

이자원은 등채를 들어 외쳤다.

"모두 들이쳐라."

그 명령에 조선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부유한 강남의 중심으로 불야성(不夜城)이란 말을 방불케하던 남경이었지만, 거듭된 난세의 혼란과 코 앞까지 다가온 전운으로 인해 그런 활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의는 제법 높아보였다.

한때 국도였던 남경의 백성들은 명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까닭이었다.

"포를 쏘아라!"

화포에 맞아 무너져내린 성곽을 타고 조선군이 앞다퉈 넘어갔다.

남명은 아녀자까지 동원하여 방어에 진력을 다했다. 고사리손으로 돌을 옮기는 어린아이와 치마폭에 그것을 담아 성벽에 올라가는 여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어서 맞서 싸워라!"

장수들이 외쳤다.

남경의 성벽에 걸려있던 화포가 불을 뿜었다.

"적이 과연 기세가 대단합니다. 백성 한 사람까지 나와 싸우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 미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도, '황제부터 민초까지 모두 싸우다 죽었다'는 미담 따위가 만들어져서는 안되었다.

"취보문(聚?門) 쪽의 동향은 어떠한가?"

취보문은 남경의 남문이었으니, 곧 낙양성이 호응하기로 한 곳이었다.

이자원의 물음과 거의 동시에 병사가 달려왔다.

"취보문이 열렸사오이다!"

===

조선군은 북쪽에서 진군해온만큼 남경의 방어는 대부분 그리로 집중되어있었다.

자연 취보문의 경비는 약했는데, 낙양성은 그 틈을 타 성문을 활짝 열었다.

수크사하는 우렁차게 외쳤다.

"전부 돌격하라!"

"조, 조선군이 쳐들어온다!"

그가 이끄는 병력들은 만주와 몽골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명나라 백성들은 망설임없이 그들을 조선군이라 불렀다.

수크사하와 휘하 병력 역시 어느새 그 호칭이 익숙해진 터였다.

"궁성으로 간다!"

넓은 성벽과 각지의 성문을 지키는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던 남명군은 시가전까지 벌일 여력이 없었다.

탁 트인 대로를 따라 내달린 수크사하의 조선군은 곧 궁성에 이르렀다.

"문을 깨라!"

금군 일부가 지키고 있었지만 그마저 대부분 수성에 차출된 탓에 조선군의 기세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궁성의 홍무문(洪武門)은 기어이 깨지고 말았다.

부하들이 궁에 진입하는 광경을 보던 수크사하는 그 현판을 떼어다 내팽개쳤다.

현판은 땅바닥에 세게 부딪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홍무(洪武)의 시대는 끝났다.'

수크사하가 중얼거렸다.

한편 궁성은 아비규환이었다.

"이놈들아!"

조선군이 얼마 남지 않은 금군을 마구 치며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주유랑이 칼을 뽑아들었다.

어차피 성이 함락되는 것은 각오하고 있던 터였고, 마지막까지 장렬히 싸워 후세에 기개나마 남기려는 뜻이었다.

- 휘리릭!

하지만 이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조선군은 그를 보자마자 올가미를 던졌다.

기껏 칼을 뽑아든 보람도 없이 올가미에 걸려들어 와당탕 넘어진 주유랑이었다. 그 위로 조선군이 덮쳐들었다.

"역적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외친 조선군은 주유랑을 개처럼 끌고 궁성 밖으로 나섰다.

별안간 성 안에서 들려오는 개선가에 남명군은 성첩 위로 빼꼼 목을 내밀었다.

"폐, 폐하!"

"다 끝났구나!"

사로잡은 주유랑의 갑옷 위에 대충 용포를 걸치게 한 후 조선군이 보란듯이 성벽으로 끌고오자 남명군의 충격은 더했다.

치열하게 싸우던 자들도 쥐고 있던 창칼을 툭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 남명군을 헤치고 조선군이 남경으로 진입했다.

"통령 대감 천세!"

"태사 대인 구천세!"

여러 병사들이 외치는 축수(祝壽)조차 통일되지 않고 중구난방이었지만,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명확했다.

이자원은 백마를 타고 성에 당당히 진입했다.

그는 잔뜩 얼어붙은 남경 군민(軍民)들을 보며 말했다.

"잔치는 끝났다."

천하의 새로운 지배자는 이어 명령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

남명은 채 반년도 가지 못하고 멸망했다.

조선군의 전격전과 협천자가 유효했던 탓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남경의 홍광제가 무너진 뒤에도 주씨 종친들을 내세워 여러 정권이 난립하였으나, 이곳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종실들은 그간의 대우를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하네."

"당연한 일이지. 그냥 황제께서 새로 즉위하신 것 뿐이지 않은가."

왕작(王爵)이나 봉토 지닌 종친들은 서로 모여 그리 숙덕댔다.

남경에서 일어난 것은 부흥운동이 아니라, 단지 옛날 한왕 주고후나 영왕 주신호의 난처럼 단순한 종친의 반란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들은 이제껏 누리던 특권만 계속 누릴 수 있다면 굳이 목숨을 걸고 '역적질'에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

오랑캐 이자원이 태사가 되어 나라의 권병을 틀어쥔 것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더라도 구심점도 없고 기반도 없으니 저항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암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종친들은 그간 명나라에서 어마어마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여전히 그것을 누린다면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나라의 좋은 전답은 모두 종실이 가지고 있는가 하면, 수만 명에 달하는 종친들에게 내리는 식록(食祿) 역시 만만치 않았다.

"누가 그것을 보장주겠다고 했는가?"

이자원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천붕지열(天崩地裂)의 시대, 대대적인 혁신과 개혁 없이는 중원을 삼키더라도 이를 지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후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조만간 경신대기근이 닥쳐올 조선이 중원에 빨대를 꽂기 위해선, 우선 중원의 사정부터 정상화시켜야만 했다.

"이제까지는 기근이 발생하면 제대로 된 구휼이 시행되지 않아 백성은 유랑하고, 농사를 짓지 않으니 땅에는 잡초가 솟고 소출은 급감하여 다시 구휼을 시행할 여력이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소."

이자원이 말했다.

이런 상황이 관의 힘은 약화시키고 반란군의 힘은 더욱 불려놓았다.

장헌충은 조명 전쟁의 틈을 타 세력을 크게 키웠으니, 이제는 사천이 아니라 어느덧 옛 북주(北周)의 영역에 버금갈 정도였다.

물론 명목상일 뿐이요, 내실은 그보다 못하겠지만 그마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안정되리라.

"그간 명나라의 황정(荒政)이란 어디까지나 요식행위일 뿐이었으니, 이런 폐단부터 고쳐야할 것이다. 각 지방의 수령은 재해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하라."

"기근 든 지방에는 견면(?免, 조세를 면하여줌)을 행하고 각종 부세의 징수를 가볍게 할 것이다."

"강우량과 물가를 상세히 조사하라. 물자를 적재적소에 운반하여야 한다."

"창저의 제도를 정비하여야겠다. 상평(常平), 의창(義倉), 사창(社倉)의 3창을 설립하라. 있어야할 식량이 없으면 곡창을 관리하는 관원과 그 고을의 총독, 순무 등을 모두 엄벌할 것이다."

그간 명나라는 말단부터 썩어들어간데다, 또 숭정제가 황정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있던 사항들이었다. 이를 조선군이 무력을 앞세워 이를 실행하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이러한 조치들만으로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가던 유랑민의 수는 급감했고, 전답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민심이 어느정도 안정되고 나자 이자원은 주씨 종친들이 지니고 있던 봉토를 회수하고 지급하는 식록을 크게 줄였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종친은 이 나라의 근본이거늘 오랑캐 따위가 감히 황족의 것을 빼앗아?"

뒤에서 이런 불평불만이 터져나왔지만 누구도 대놓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이제 와 주씨들이 반조선 봉기를 터뜨려보았자 호응할 자는 나오지 않을게 뻔했다.

당장 황제인 왕지명(王之明)부터가 이자원이 멋대로 수장고를 털어 내탕금을 조선에 가져가는데도 아무말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물론 폐진입가(廢眞立假)로 들어선 왕지명이었으니 원래부터 그의 것이 아니긴 했지만.

민심이 가라앉은데다 홍승주와 조대수, 오삼계 등이 각지에서 들끓던 도적까지 토벌하고 나서니 서쪽 구석에 자리잡은 장헌충의 세력을 제외하고는 천하는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슬슬 때가 되었는가."

새로이 천하의 질서를 개편한다면 지금이었다.

1648년.

이자원은 그간 공수표를 뿌렸던 장수들을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오양과 오삼계 부자, 홍승주, 조대수, 남명 토벌에 협조한 좌량옥과 정지룡 등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군벌을 칭할만한 자들이었다.

언제 이자원이 약속을 지킬지 노심초사하던 그들은 그 부름에 허겁지겁 달려왔다.

"명나라의 국운은 다하였소."

이자원이 말했다.

숭정제 시절에 비하면 가히 태평성대라 할만했지만, 국운 자체가 다한 것은 맞는 말이었다.

결정권을 쥔 이자원이 명나라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니.

"나는 이제 명나라를 닫고 새로운 천하를 열고자 하오. 또한 주나라의 옛 법을 되살리려는데, 혹 반대하는 분이 계시오?"

있을리가 없었다.

다들 번왕의 자리를 위해 이자원과 조선에 적극 협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따져봐야할 것은 이것이었다.

'누가, 얼마만큼의 땅을 가져갈 것인가?'

< 누가 관군인가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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