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92화 (192/213)

< 누가 관군인가 (2) >

북경에 항복한 자는 하남총병 허정국 뿐만이 아니었다.

「호광총독 좌량옥이 아룁니다.

새로 즉위하신 천자께서는 숭정 황제의 맏이로 계사할 명분이 뚜렷합니다. 저 남경의 무리들은 사람을 보내어 신을 꾀려 들었으나, 어찌 나라의 신하된 몸으로 삿된 무리에 가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성문을 열어 태사를 맞아들이고자 하니 항복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호광의 군대는 상당수 고걸이 이끌고 갔다가 날려먹은지 오래.

양번을 지키던 좌량옥이 항복함으로써 수크사하가 이끌던 철기(鐵騎)들은 손쉽게 남하할 수 있었다.

좌량옥이 다시금 표문을 올려 아예 이들에 가담하여 남명을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이자원은 그보다는 호광에 머무르며 장헌충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게 했다.

"적이 이릉을 통해 나오면 우리군의 허리가 갈라진다. 이릉과 자귀를 틀어막고 적의 준동만 견제하라."

어차피 큰 도움은 되지 않을 명군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남아 장헌충이 형주를 병합하러 나오는 것을 막는게 옳았다.

"호광에 좌량옥이 버티고 있다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옹량이나 노려야겠지."

장헌충은 사천을 장악한 뒤 아래로는 운남과 귀주, 광서의 삼성(三省), 위로는 섬서를 노리고 있었다.

세력을 굳히더라도 그정도 생산력으로는 끝내 당해내지 못할 터였다.

"당연히 장헌충도 토벌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선은 정통성 경쟁의 대상인 남명을 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자원이 이끄는 조선군은 어느덧 회안까지 다다랐다.

"강북 사진을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진마다 장수가 있지만 유량좌라는 자가 가장 선임일 것입니다."

이자원은 그에게 우선 서찰을 보냈다.

「우리군은 경사를 이미 점령하였고 백성의 마음을 얻어 회안까지 도달하는데 채 한달도 걸리지 않았다. 아직 관부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너희가 어떻게 장강의 천험만 믿고 버티겠는가?

호광을 지키던 좌량옥 역시 항복하여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제라도 역적의 오명을 벗고 관군에 가담하도록 하라.」

그 옛날 조조가 보여주었듯, 협천자(挾天子)의 이점이란 구구절절히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허정국과 좌량옥이 그랬듯, 유량좌 역시 옥새가 찍힌 칙서를 받들자-물론 이자원이 북경에서 찍어 가지고 온 것이었다-스스로 몸을 묶고 나와 항복했다.

애써 강북에 방어 체계를 구축한 보람도 없이,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싸울 의지가 없으니 회안은 몽땅 이자원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제부턴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양주를 지키고 있는 사가법이란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남경 위조(僞朝)에서 병부상서를 맡고 있는 자인데, 결사항전을 외치며 스스로 양주를 지키러 온 주전파이니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제법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군."

양주는 장강 삼각주의 북쪽으로, 대운하와 장강이 만나는 요지이다.

전선을 비롯해 배란 배는 모조리 끌어다가 양주성 뒤쪽을 호위하며 남경과 연계하고 있었는데, 이곳만큼은 지켜야한다는 절박함이 잘 드러나보였다.

"적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르게 남하했거늘, 이래서야 적들이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숭정제는 남천을 고려했지만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미리 조선군이 산해관을 넘을 것을 예상하고 강남에 방어를 집중시킨 것 같지 않ㅇ느가.

낙양성을 움직일만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자원은 입술을 비틀었다.

"통령 대감, 어찌해야 하오리까."

황익이 물었다.

강북에서야 막아서는 지형지물이 없는데다 주둔한 병력들도 줄줄이 항복하였으니 손쉬웠다 하나,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양주는 들이치기가 까다로워 보였다.

어느새 조선의 장기로 자리잡은 기병마저 제대로 쓸 수 없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적이 강을 통해 후방과 연계하고 있으니 이것부터 끊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헌데 하남에서 끌어모은 배들은 대개 조운선이라 싸움에는 부적합합니다."

조선군의 보급은 대운하에 의존하고 있었다.

군량과 물자를 실은 조운선을 이용해 싸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양번에서 여진군이 남하하고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되었든 남경은 무너질 것입니다."

황익이 슬며시 물었다.

그러자 오삼계가 대노하여 외쳤다.

"장군은 어찌하여 싸움을 피하려는 것이오? 통령 대인, 소관을 보내주시면 한바탕 수전을 벌여 적을 꺾겠나이다!"

이자원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조운선 따위로 어떻게 수전을 벌이겠는가."

그들에겐 전함이 필요했다.

그것도 장강에 가득한 적선을 모조리 깨뜨릴 전함이.

이자원은 이미 그것을 끌고 오라 명령을 내려둔 터였다.

"대감, 우리 수군이 도착했사오이다!"

양주성을 우회하여 보내놓았던 척후가 외쳤다.

저 멀리서 장강의 물길을 거스르며 한 무리의 선박이 올라오고 있었다.

- 대조선 수군통제사 강진흔

이자원은 천진에 머무르고 있던 남로군을 해로를 통해 이동시켰다.

해안가를 따라 죽 남진한 강진흔은 이제 장강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군의 배다!"

"무슨 배가 저리 크단 말이냐······."

남명군은 벽란도에서 심혈을 기울여 건조한 갈레온(Galeon)을 보며 중얼거렸다.

옛날 정화가 밭까지 실었다던 보선(寶船)이 저만했을까.

복건 등에서 서양식 선박을 볼 일도 없었던 양주의 군사들은 그 크기만으로도 압도되었다.

기함에 선 강진흔이 우렁차게 외쳤다.

"방포하라!"

강진흔의 명에 선수포가 굉음을 내며 포탄을 쏘아냈다.

뒤따르던 조선 함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적습이 들어온데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갈레온이 대대적인 포격을 감행하자 남명 수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적에게 달려들어 공격하라! 적함이 크다하나 장강 역시 바다보다 좁으니 충분히 거리를 좁힐 수 있다!"

성루에 서있던 사가법이 쳐다보며 애타게 외쳤지만 그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기 전에 남명 수군은 서로 선수를 돌리고 부딪히며 깨지기 시작했다.

"군령을 어기는 자는 즉참한다! 어서 적에 맞서싸워라!"

총병 유조기(劉肇基)가 외쳤지만 되는대로 끌어모았던 각 전선이 말을 들을리가 없었다.

숫자는 그런대로 제법 맞추었지만 한번도 손발을 맞추어보지 못했던 수군이 아닌가.

더러는 달아나고, 더러는 서로 부딪혀 깨지며, 더러는 조선 수군의 손에 침몰하여 남명 함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가법은 그 광경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이정도로 적과 차이가 난단 말인가?"

조선을 동아시아 제일의 교역 파트너로 인정한 네덜란드는 조선공과 VOC의 선원들을 파견하여 수군 육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머릿수만 채운 남명 수군이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포격과 충파로 박살난 남명의 사선(沙船)들을 유유히 헤치고 접근한 조선 수군이 양주성으로 포를 쏘아냈다.

"우리도 응사하라!"

잠시 수군이 소멸한 광경을 보고 멍하니 있던 사가법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는 남명의 명장답게 화포에 밝았으니, 양주 성곽을 따라 절묘하게 배치된 화포가 조선 함대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피해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잠깐 포격전을 주고 받았는데도 성곽이 무너지고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이자원은 양주의 퇴로마저 끊어지자 사가법에게 투항을 권했다.

"금릉(남경)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자가 있다 한다. 이미 일월이 밝게 섰는데 위조에 충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가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함부로 죽을 마음을 먹지 말고 나와 새 황제의 관직을 받들라."

사가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이것은 이자원이 상정하고 있던 바였다.

진정으로 노리고 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조선이 태자 전하를 세웠다 들었소. 황제가 아무리 선제의 사촌 아우라 한들 태자 전하께 비기겠소?"

"적 수군이 장강에 들어서 후방마저 위태롭게 되었으니 성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오. 그리되면 성중 백성들이 모조리 죽음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외다."

양주의 신사들 사이에선 이런 말들이 떠돌았다.

표면적으로는 명나라는 태자가 즉위했을 뿐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들이 목숨바쳐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자원의 노림수가 그대로 맞아들어간 것이다.

"조선군이 양주 백성을 모조리 죽인다지 않는가?"

"이 나라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어가 있다고 항전을 하라하는가?"

이런 판국에 이자원이 보낸 권고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성에는 불온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성문을 열어라!"

"우리는 죽고 싶지가 않다!"

포위가 길어지고, 공세가 이어지자 동요한 백성들은 성문으로 달려가 그리 외쳐댔다.

그 중에는 서성의 선비 왕수초(王秀楚)도 있었다.

"이익, 너희는 주자랑이 오랑캐가 세운 거짓 황제임을 모르느냐? 우리가 항복하면 전부 조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양씨라 하는 장수가 호통을 치자 왕수초가 답했다.

"사방에서 기근이 일어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질 적에, 이 명나라가 무엇을 하였소? 수탈만 거듭하지 않았소? 심지어 등주에서는 조선군이 식량과 재물을 나눠주었는데, 그마저도 빼앗았다 들었소!"

"조선은 인의의 나라인지라 제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도 베풀거늘 오랑캐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죽은 숭정제가 들었으면 기가 차서 무덤에서 일어났을 발언이었지만, 백성들은 해준 것도 없는 명나라를 위해 같이 죽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난 몇년간 조선이 행해온 의적 행세가 빛을 발한 것이다.

백성들은 병사들을 마구 밀치며 성문을 열기 위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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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중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뭐라?"

사가법이 황망히 물었다.

그의 손에서 칼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어려운 상황이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싸워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려 했거늘, 그마저도 불가능하단 말인가.

"창검을 써서라도 폭도들을 막으오리까?"

피를 보아서라도 소요를 진압하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가법은 씁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백성이 먼저고, 사직은 그 다음인 법. 이미 민심이 적에게 기울었거늘 어찌 내 손으로 저들을 죽일 수 있으리요."

하지만 나라의 신하로서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하들이 모두 물러간 후 사가법은 한탄하며 칼을 뽑아들었다.

- 푹

사가법이 자결하고, 양주성은 항복했다.

이자원은 양주의 배와 조선 함대를 이용해 장강을 건넜다.

남명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

'강남만 장악하면 일이 다 될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낙양성은 입술을 짓씹으며 되뇌였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대단한 오판이었다.

확실히 남명은 원래 역사보다는 정돈되어있었고, 병력 동원도 수월했지만 그 이상으로 적의 진격이 빨랐으며, 협천자라는 명분도 강력했다.

"짐이 친정을 해야겠소."

주유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야 사기를 끌어올리고 마지막 결전이라도 벌여볼 수 있지 않겠소?"

한번이라도 적을 깨뜨릴 수 있다면 민심이 이리로 쏠리며 다시금 재기를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낙양성은 그것이 헛된 희망이란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청군마저 야전으로 조선군에 패했다.

회수와 장강을 의지해 버티는 것 외에는 승산이 없었다.

그리고 적은 이미 장강을 넘었다.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일단은 항주로 파천하시지요."

낙양성은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로 도망간다고 딱히 답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할 것 아닌가.

그러나 하늘은 그런 그의 소원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정지룡이 임안을 점령했습니다!"

"뭣이?"

임안은 곧 항주(杭州)로, 남송의 도읍 역할을 하던 곳이다.

자연 피난지로 여기고 있던 곳이었으나, 그간 잠잠하던 정지룡이 별안간 내륙으로 군사를 몰아 그곳을 점령한 것이 아닌가.

"허면 서쪽으로 가는 것이······."

낙양성은 이번엔 형주로 옮기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호광의 좌량옥이 조선에 붙었습니다. 적이 양양을 지나쳐 무창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군."

주유랑이 냉담하게 말했다.

낙양성이 세운 허수아비였지만, 원래 역사에서 그는 십수년간 청에 항거하다 끝내 오삼계에 살해당한 인물이다.

젊은 혈기마저 겹치니 그는 망설임없이 선언했다.

"짐은 이곳 남경에서 결사항전하겠소!"

내심 황제를 꼭두각시로 여기고 있던 신하들도 그 당당한 태도에 놀랐다.

그들은 감명받은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런.'

낙양성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권력의 추는 황제를 옹립한 자신에게서 죽음을 각오하고 항전을 선언한 황제에게로 쏠렸다.

'이래서야 적을 물리쳐도 문제가 아닌가.'

낙양성은 들리지 않게 이를 빠드득 갈았다.

< 누가 관군인가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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