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붕지열 >
북경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춘추시대, 연나라의 수도 계(?)까지 올라간다.
그야말로 천년의 왕성(王城)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영광은 퇴락해가고 있었다.
이자원의 본군이 산해관에서 이곳 북경까지 이르는 동안 걸식하는 유랑민 무리를 얼마나 마주쳤던가.
막아서는 수비군보다는 이들이 더 큰 위협이 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성벽만큼은 제법 견고해보이는군."
이자원이 말했다.
이 시대 최대의 국가인 명나라의 도읍이었으니 과연 포위에도 많은 병력이 필요해보였다. 명나라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공성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에센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끝내 북경을 함락시키진 못하였지요."
수크사하의 말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킬 병력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북경을 함락했던 이자성이 산해관에서 군사적 역량을 소진하자 허무하리만치 밀려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작금의 명은 도성에서 수비전조차 벌일 여력이 없었다.
"쉽게 끝날 것입니다."
수크사하가 장담했다.
한편 성 안에 있는 명의 조신들 역시 이런 사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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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선봉으로 나선 오삼계는 잔뜩 흥분해 북경의 외성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을 타넘을 기세였다.
항장(降將) 출신으로 제 나라의 도읍을 함락시키는데 느껴야할 거리낌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대공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갔을 뿐.
번왕(藩王)의 자리가 저 성벽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듯 했다.
"북경이 너희 눈 앞에 있다! 성문을 깨고 혼군을 잡아 난세를 끝내자! 모든 부귀영화가 저 안에 있느니라!"
오삼계가 일장연설을 마친 뒤 칼을 뽑아들었다.
곧장 공세를 개시하려 할 때였다.
"전부 공격······!"
- 끼이익
별안간 성문이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 안에서 사람 하나가 나와 외쳤다.
"태감 조화순(曹化淳), 북경의 외성을 열고 투항하겠습니다!"
"······."
오삼계는 머쓱하게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조화순은 긴장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말했다.
"폐주 주유검(朱由檢)은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마지막까지 치열히 싸우라 하였으나, 이미 천명이 바뀌었거늘 어찌 대세에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인이 외성을 열었으니 어서 안쪽으로 군사를 몰아가십시오."
오삼계는 이것이 함정이 아닌지 고민했지만 한간은 한간을 알아보는 법.
조화순의 태도를 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투항했으니 목숨은 붙여 주겠다. 정중히 뫼셔가라."
오삼계는 영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틀면서 내성으로 진입했다.
"와아아!"
조화순이 연 외성문을 통해 조선군이 쏟아져들어가자, 북경의 성민들만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잔뜩 달아나 피할 뿐, 막아서는 병사가 없었다.
그러니 오삼계가 이끄는 군대는 삽시간에 내성의 동문, 조양문(朝陽門)에 다다랐다.
"이번에야말로 크게 이겨 공을 세워야겠구나!"
오삼계가 외쳤다.
북경의 구조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 내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어렵사리 대포까지 가져온 그였다.
그러나 그가 애써 끌고 온 화포를 채 써먹기도 전에, 성문이 다시금 끼이익 열렸다.
오삼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이어 조양문 안에서 장수 하나가 부장과 병졸들을 이끌고 나와 수문장의 인수를 바쳤다.
"소관은 성국공 주순신(朱純臣)입니다. 천병(天兵)이 이곳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성문을 열었습니다. 부디 장졸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주순신은 개국공신 주능의 자손으로, 성국공의 작위를 대대로 세습하며 황실의 총애를 받아온 이였다.
그런 자가 한번 싸움도 하지 않고 항복했다는 말에 오삼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인상유인(人上有人) 천외유천(天外有天).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성국공 같은 분이 항복하셨으니 어찌 반기지 않겠소."
인수를 받든 오삼계가 마지못해 말했다.
주순신은 오삼계의 환대에 안심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도성을 지키는 장수들이 싸우지도 않고 적에게 항복한단 말인가?'
오삼계는 한심함에 혀를 끌끌 찼다.
한편 대세를 따른 자는 조양문을 지키던 주순신 뿐만이 아니었다.
남문인 정양문(正陽門)을 지키던 병부상서 장진언(張縉?)과 서문인 선무문(宣武門)을 수비하던 태감 왕상요(王相堯)도 성문을 열어 젖히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의 뜻을 전하니 조선군은 화살 한발 쏘지 않고 북경의 내외성을 모조리 장악했다.
"북경 가까이 갈수록 장수들의 자질이 영 못해지는 듯 합니다."
"황제가 그런 자들을 곁에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이자원은 그렇게 대답했다.
여태까지 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나라였다.
외성과 내성이 싸움없이 한번에 떨어지고 나자 남은 것은 숭정제가 머무르는 황성 뿐이었다.
자금성을 향해 조선군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코 앞에서 멈춰선 병력들은 모조리 끝장이 났다.
"황제나 그 일가족을 사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나라를 완전히 닫는다해도 숭정제의 신병은 확보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태자라 할지라도.
"화북은 오랜 전란과 기근으로 피폐해진지 오래지."
강남의 사정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화북만 쥐고 있다면 조선이 그 덕을 보기는커녕 복구에만 전력을 소모해야할 판이다.
숭정제라는 토템을 내세워 별 반발 없이 강남까지 흡수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생각을 끝마친 이자원이 말했다.
"어영대장."
"예, 대감."
이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제는 매산(煤山)으로 갔을 확률이 높소. 그리로 가서 신병을 확보하시오."
매산은 오늘날의 탑산이니, 자금성 북쪽에 있는 산이다.
숭정제는 이자성이 쳐들어오자 이곳의 수황정(壽皇亭) 아래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
원래 역사는 이젠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지만, 숭정제가 자결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곳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완은 이자원의 명이 떨어지자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오늘 안에 북경을 완전히 함락한다. 다들 서둘러 황성을 점령하라!"
이자원이 단호히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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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검은 멍하니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죽인 딸들이었다.
"폐하, 살려주십시오!"
"귀한 공주의 몸으로 적도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이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아비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직접 칼을 들고 공주들을 쳐죽인 주유검은 미친 사람처럼 꺽꺽대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른 연기가 마치 명나라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왕승은이 이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사세가 매우 급한 탓에 머뭇거림은 길지가 않았다.
"폐하, 명하신대로 태자와 두 황자를 변장시켜 전씨 집안에 보냈나이다. 이제 폐하께서 몸을 피하시지요."
왕승은의 채근에 숭정제는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생기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짐의 손으로 공주를 죽이고, 황후는 자결하였다. 조상 누대로 이어온 기업을 오늘에 무너뜨렸는데 어찌 짐이 살기를 바라겠는고!"
주군의 말에 왕승은은 차마 탈출을 재촉하지 못했다.
이미 그는 삶을 포기한 것이다.
상당부분 자업자득이었지만, 그가 즉위하던 시점에 명나라가 이미 무너지고 있던 것도 맞았던 터.
이 순간 왕승은은 주군에게 진심으로 연민의 정을 보냈다.
"······매산으로 가시지요. 그곳에서 결단을 내리시면 신이 수습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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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이 매산 수황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이 늦어있었다.
목맨 황제 곁에서 환관 하나가 통곡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늦었구나!"
이완은 목을 매고 울부짖는 왕승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숭정제를 되살릴 수는 없으니 우선 시신만 확보하여 본영으로 되돌아온 그였다.
황성이라 한들 마지막까지 숭정제에게 충성하던 일부 금군을 빼놓고는 저항하는 이도 없었다.
이완이 돌아왔을 때 북경은 완전히 조선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삼백년 가까이 이어온 나라인지라, 한심하게 항복하는 이가 있던 반면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자들 역시 많았다.
대학사 범경문(范景文)은 우물에 몸을 던졌고, 호부상서 예원로(倪元?)는 액사(縊死, 목매어 죽음)하였으며, 좌도어사 이방화(李邦華)는 문천상의 사당에 가 절명시를 남긴 후 역시 목을 맸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이런 순절(殉節) 소식에 장수들은 나름대로 찬탄을 보냈다.
그들 역시 유학을 배운 조선의 신하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별다른 감흥없이 말했다.
"아직까지 죽지 않은 자들은 우리에게 협력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겠군."
충신들은 알아서 다 죽어주었으니 남은 자들로 하여금 잠정적으로 조정을 꾸려나가면 될 뿐이다.
행정을 장악하는데는 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니.
하지만 곤란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황제가 죽었으니 어찌해야겠소이까?"
원래 계획은 숭정제의 신병을 확보하여 꼭두각시로 삼는 것. 큰 반발 없이 중원을 집어삼키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미리 이완을 보냈음에도 숭정제의 재빠른 자살로 실패했으니, 이자원은 입맛이 썼다.
"황제의 아들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확보한다면 옹립하기 쉬울 것인데."
오삼계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궁인(宮人)들을 잡아 문초해보니 외가인 전씨 집안으로 대피시켰다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병사를 풀어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체는 세 구를 찾았는데, 아마 난리 틈에 끼어 죽은 것이 아닐지요."
조선군이 성내에 진입하며 북경은 대혼란에 빠졌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적당한 종친 하나를 내세우시지요. 이 경사를 뒤지면 황위를 이을만한 종친 몇 쯤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도성에 계신 전하를 모셔와 태산(泰山)에서 봉선 의식을 치름이 어떻겠사오이까?"
의견이 분분했지만 어느 하나 이자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강남에서 남명(南明) 따위가 일어날 것이 뻔하다.
내분과 역량 부족으로 불과 수십년만에 지리멸렬해버리는 남명이지만, 그정도까지 시간을 허비할 틈은 없었다.
이쪽에서 좀 더 정통성 있는 자를 내세워야 조기에 진압될 것이 아닌가.
조선왕 이백을 황제로 옹립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그에게 별 이득이 없었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이자원이 말했다.
"태자가 없다면 태자를 만들면 되겠지."
"예······?"
다들 황당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이자원은 여전히 태연히 말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부른들 이 북경에 남아있는 자들 중에 누가 감히 항의하겠는가?"
이자원의 말처럼 대놓고 맞설 인간들은 모조리 죽어버린지 오래고, 남아있는 것은 주순신이나 조화순처럼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자들이었다.
"적당한 자를 수배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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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명(王之明)은 부마도위 왕병의 조카였다.
어릴 때부터 그 연줄로 궁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북경이 함락될 때 도망치다가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젠 꼼짝없이 저 오랑캐들에게 붙들려 죽는가 싶었지만, 사람 일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자원 앞에 끌려온 왕지명은 머리를 쾅쾅 박으며 빌었다.
저 마귀같은 오랑캐는 어린아이도 산채로 씹어먹는다고 들었다.
두려움에 떠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라."
이자원은 왕지명의 뒤통수를 꾸욱 밟으며 말했다.
왕지명은 납작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시키는대로만 한다면 평생 부족함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자원이 물었다.
"황제 한번 해보겠느냐?"
< 천붕지열 > 끝
ⓒ 핏콩
작가의말
왕지명은 실제로 명이 멸망한 직후, 남경에 가서 태자라고 주장해 큰 파장을 일으킨 인물입니다(남도태자안).
그는 궁궐 생활에 대해서는 막힘없이 대답하고 환관을 알아보았으나, 학문이 부족하고 눈썹 모양이 다르며, 태자에게 있었던 다리의 반점이 없다는 연유로 정체가 들통나고 맙니다.
가짜 태자가 일으킨 논란 때문에 정통성에 타격을 받은 홍광제는 그를 하옥하였으나, 백성들은 그를 진짜 태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진 못하고 감옥 안에서도 융숭히 대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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