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 전쟁 (3) >
밤늦게 이상을 감지한 황득공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바깥에서 부장이 뛰쳐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황득공이 불길한 느낌에 묻자 부장이 답했다.
"조선, 조선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뭐라고?"
황득공은 황망히 외쳤다.
분명 조선군은 항복을 제안하지 않았는가.
놈들이 그리 나온 덕분에 군민을 쉬게 하고 경계도 전체적으로 누그러뜨린 상황이었거늘, 당장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니.
"이 간악한 놈들이!"
황득공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선군은 애초에 항복을 권할 셈이 아니라 무력으로 관을 빼앗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황득공은 이를 빠드득 갈며 쇠채찍을 집어들었다.
그는 활도 잘쏘았지만 진정 애장으로 삼는 것은 이 채찍이었다.
그는 서둘러 관아 바깥으로 나왔다.
황득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야할 주위가 환했다.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꽃이 산해관의 마지막을 알리는 듯 했다.
"어서 적을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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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입하라!"
오삼계는 신이 나서 외쳤다.
산해관 같은 요지를 공략하는 선봉을 맡게 되었으니 흥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
오삼계는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부하들과 함께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간 황득공이 무리해가며 배치시켜놓았던 병력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내려가있었던데다, 남아있는 자들도 마음을 상당히 놓고 있었으니 노도처럼 밀려드는 조선군을 막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포격을 등에 업고 성첩에 기어오른 항병들은 명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서로 안면이 있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한때 같은 나라의 깃발 아래 싸우던 동지였을 것이나 지금에는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비 병력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목이 썰려나갔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어서 성문으로 내려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제법 많이 지체한 까닭에 오삼계는 발을 동동 굴렀다.
대대적으로 쏟아지는 포격에 다른 명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침투한 병력들은 모두 계단을 타고 성문 아래로 쏟아져 내려갔다.
"이 조선의 개들아! 자라새끼처럼 배신이나 하고 다니는 것이냐?"
성문을 지키던 장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피칠갑을 한 채로 정말 분하다는 듯 호통을 치는 그의 태도에 항병들조차 움찔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라는 것은 와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던 항병들이다.
이제야 돌아갈 방법도 없지만, 흉흉한 기세로 저리 외치자 잠시 얼어붙은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 스릉
뚜벅뚜벅 그리로 걸어간 오삼계가 칼을 뽑아 장수의 목을 내리그었다.
오삼계는 죽어나자빠진 그를 내려다보며 흥, 하고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
충성과 의리 따위, 따져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에겐 오로지 일신의 영달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주씨 천자를 섬기든 이씨 천자를 섬기든, 나라 이름이 명이든 조선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충신도 간신도 한번 사는 인생, 넘치도록 영화와 복록을 누리다 가면 되는 것을.
"뭣들 하느냐? 어서 성문을 열어라."
오삼계는 칼에 묻은 피를 슥 문질러 닦으며 명령했다.
그의 눈치를 살핀 부하들이 황급히 성문에 붙었다.
- 끼이익
육중한 진동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자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들이 물밀듯이 쏟아져들어왔다.
- 히히힝!
거센 준마들을 앞세우고 성문 안으로 쏟아져들어가는 조선군이었다. 산해관은 제법 넓은 성인지라, 기병이 날뛰기에도 편했다.
그대로 조선군은 중앙의 종고루(鍾鼓樓)를 향해 내달렸다.
- 타타탕!
"죽어라!"
대로 앞을 가로막는 명군들을 향해 일제히 피스톨이 쏘아냈다.
이젠 사격에도 제법 숙련된 삼군문의 마병들은 안장에 앉아 마구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준수한 명중률을 보여주었다.
일제히 쏘아낸 피스톨로 인해 화망이 형성된 덕택도 컸겠지만.
- 퍽
창을 들이대던 명군들은 말발굽에 채여 짜부라지거나 멀리 날아갔다. 뒤따르는 보병들에 의해 산해관의 각 거점들은 점차 함락되기 시작했다.
야습을 눈치채고 급히 모여들던 명군들은 이미 성내로 진입한 조선군에 의해 각개격파되기 일쑤였다.
"저기 또 한 무리의 적이 보입니다!"
"좋아! 저들 모두가 우리 수급이다! 한놈도 남겨두지 마라!"
오삼계는 쾌재를 부르며 그리로 달려갔다.
산해관 전투야말로 이 전쟁의 분수령. 여기에서 전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자신의 입지도 커질 것이었다.
한편 뒤쪽에 서있던 홍승주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대세는 결정났다. 적에게 항복을 권해보라. 항복하면 우리가 대접받은 것처럼 목숨을 살려주고 후히 대해주리라고."
홍승주는 수급 좀 얻자고 악명을 퍼뜨리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제법 인덕을 펼치려는 듯 말하는 그였다.
"혹 적이 거부한다면 어찌합니까?"
"모조리 참살하라."
하지만 그렇다 해서 공연히 의심받을 위험까지 감수하지는 않는 홍승주였다.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선 못할 것이 없는 자.
항복을 거부하는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필요를 느끼진 않았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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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의 중앙에 위치한 종고루는 종루와 고루를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때마다 종과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한편, 지금 같은 난세에는 적의 침입을 알리는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의 중심에 있는만큼 황득공을 비롯한 명군은 이곳에서 최후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성문을 막기 위해 달려가던 병력들은 북과 종치는 소리에 이리로 합류해왔다.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멀리서 종고루를 포위해들어간 이자원은 그 위에 걸린 편액을 읽었다.
"길성고조(吉星高照)라."
이자원이 되뇌였다.
길한 별이 하늘 높이서 반짝인다는 뜻.
그 말에 휘하 장수들이 앞다퉈 말했다.
"그러고보니 하늘에 별이 많이 떴습니다. 정말 오늘 일을 일러 쓴 글씨 같지 않습니까."
"필경 우리군이 산해관을 얻을 일을 예지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아전인수식 해석이었지만, 이자원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는 단지 황득공과 명군을 쳐다보며 명령했다.
"항복을 권해보라."
그러자 옆에 서있던 오양이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황 총병, 오랜만이올시다. 내 말이 들리시오?"
"너는 오양이 아니냐?"
명나라 아래 있을 때는 오양의 직급이 황득공보다 위였거늘, 대뜸 하대하자 오양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자원이 직접 항복을 권해보라 명령한 터에 자신의 기분 때문에 그르칠 수는 없으니, 오양은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황 총병의 충의와 용맹은 우리 모두 알고 있소! 통령 대인은 인재를 아끼는 분이니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후히 대접하겠소이다!"
그러나 황득공은 단칼에 거절했다.
"내 나라의 녹을 먹은 몸으로 어찌하여 오랑캐에게 항복하겠는가? 게다가 조선은 어버이의 은혜를 모르는 금수 같은 놈들이 아닌가? 나는 명나라의 신하로 죽겠다!"
황득공이 마구 저주를 퍼붓자 오양은 면목없다는 듯 이자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자원은 예의상 한번 권하였을 뿐, 처음부터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공격하라."
이자원의 말에 키리시탄들이 왜도를 들고 마구 달려들었다.
황득공은 다가오는 조선군을 보며 쇠채찍을 휘둘렀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에 맞은 병사의 살점이 한웅큼 떨어져나갔다.
얼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키리시탄에게 명군들이 달려들어 난도질을 해댔다.
"주, 주님!"
혈전이 벌어졌다.
명군은 종고루에서 버티고 서서 올라오는 병사들을 막아냈다.
- 쿵
누각에서 밀려 떨어진 조선군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황득공이 이끄는 명군은 제법 잘 버텨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어느새 황득공의 곁에는 부하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익!"
황득공은 지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방에 쇠채찍을 휘둘렀다.
그가 만들어낸 공간에 군사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올테면 와봐라, 이놈들!"
황득공이 호령했다.
과연 대단한 용맹이었지만,
- 탕!
다음 순간 황득공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에서 날아온 총탄이 박힌 것이다.
- 타타탕
이어서 연거푸 조총이 쏘아지며 황득공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그제서야 조선군은 그 시체에 달려들었다.
"적장이 죽었다!"
"총병 황득공의 목이 여기 있다!"
종고루의 병사들이 황득공의 목을 높이 들어올려 그리 외쳤다.
명군들은 그 광경을 보고 남아있던 사기마저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하, 항복하겠소."
"목숨은 살려주시오."
병장기를 회수한 조선군은 이들을 모두 한데 모아 감시했다.
영은문(迎恩門), 망양문(望洋門), 위원문(威遠門) 등에도 병력을 보내 황득공이 죽었음을 알리고 항복을 권하니, 끝내 산해관은 조선군의 손에 완전히 떨어졌다.
성벽 아래 숱한 목숨을 묻었지만, 결국 승리한 것이다.
"명나라 같은 곳에도 충신이 하나쯤은 남아있군."
이자원은 황득공의 목을 받아들고 말했다.
그 지리멸렬하던 남명에서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순절(殉節)한 이였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곁에 있던 홍승주와 조대수 등이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못들은 척하고 있을 때, 이자원이 말했다.
"이제 남은 관문은 하나 뿐이다."
그가 외쳤다.
"북경으로 진격한다!"
본군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향하고 있을 때, 대동을 함락한 수크사하의 북로군과 고걸을 패퇴시킨 강진흔의 남로군 역시 북경을 향했다.
명나라의 운명은 경각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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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이 산해관을 넘었고, 대동이 함락당한데 이어, 조선 수군이 고걸을 꺾고 천진에 들어섰다.
조선군이 북경을 삼면으로 포위해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에 숭정제는 정신줄을 놓을 뻔하였다.
'고걸에게 산해관을 지원하라 했어야 했나?'
그러나 그리되었어도 어차피 북경은 위험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따지면 삼면을 동시에 치고 들어올만큼 위협적이 된 조선 자체가 문제였다.
처음부터 조선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됐다는 결론에 다다른 그는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신하들을 찾았다.
"제신들은 이런 날이 올 때까지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계속해서 신하들 앞에서 쳐야할 호통을 중얼거리며 그들을 기다리던 숭정제였으나, 한 시진이 지나도록 아무도 모여들지 않았다.
황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환관 왕승은(王承恩)을 채근하던 숭정제는 끝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마저도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도대체 충신의사들은 어디로 가고 이런 소인배들만 조정에 남았단 말인가."
숭정제는 크게 탄식했다.
조선에 대한 증오, 그리고 부패하고 무능한 신하들에 대한 원망이 사무쳤다.
그러나 그것을 쏟아낼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전을 가득 메우던 문무백관(文武百官)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환관 왕승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으니.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이라도 경사를 벗어나셔야 하옵니다."
"이제 와 남천을 하란 말인가?"
신하들이 파천을 반대한 탓에 도망칠 시기는 한참 전에 놓치지 않았는가.
자신도 여론이 불리하자 모른척 물러났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숭정제였다.
"어리석은 자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어찌 짐이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갈 수 있겠는가. 다만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황실의 한줄기 핏줄만은 보전해야한다. 가서 태자와 황자들을 불러오라."
숭정제는 그리 명령하고는, 간신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북경성 바깥에 벌써 조선군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정명 전쟁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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