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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8화 (188/213)

< 정명 전쟁 (2) >

"함락하라!"

대동에서 미친듯이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대수가 간신히 탈환한 대동은 일부 병력이 배치되어있기는 했으나, 내우(內憂)와 외환(外患)이 모두 덮치는 가운데 그 숫자가 충분히 남아있을리는 없었다.

"칭상께서 거느리고 오신 군사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통령께서는 이번에 보여주신 우의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수크사하의 말에 지르갈랑이 손을 내저었다.

"조정의 몽골 놈들은 하나같이 반대하는 것을 내가 억지로 밀어붙여 끌고 왔소. 부디 이점도 통령께 확실히 말씀드려 주시오."

수크사하와 지르갈랑은 각각 도르곤과 호거의 파벌이었으므로, 청나라가 유지되고 있을 때는 정적이나 다름없었지만 청이 망한 지금 그런 것을 따져봐야 무의미했다.

지르갈랑의 은근한 부탁에 수크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르한 조리그투는 장성을 우회하는 조선군의 군량을 자신들이 대겠노라 했었지.'

지르갈랑의 말과는 달리 조리그투를 위시한 몽골 세력은 재조지은까지 운운하며 조선의 편의를 봐주려 애썼던 것이다.

결국은 이자원이 의도한대로 열심히 조선이 쥔 목줄을 의식하며 충성경쟁을 펼치고 있는 몽골이었다.

전적으로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이 달린데다, 한풀 꺾이기는 하였으나 오이라트라는 적마저 있으니 비단 내부의 권력투쟁이 아니더라도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지르갈랑의 꿍꿍이가 어찌되었든 그가 데리고 합류한 병력이 도움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대동의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 약해빠진 명나라 놈들아! 만주제일용사에 맞설 자는 없느냐?"

오보이는 피를 마구 뒤집어쓴 채로 성첩 위에서 날뛰었다.

대동에 주둔한 명군들은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주춤주춤 다가가던 병사의 목이 오보이의 극에 꿰뚫리자, 명군들은 서로 병장기를 내버리며 패주했다.

"으악!"

"도망가라!"

내몽골 쪽으로 돌아오느라 변변한 화포가 없었지만 대동은 금세 무너졌다.

"대동이 북경과 나름 거리가 있다 하나 수비가 이정도로 허술할 줄은 몰랐소."

"명나라는 이젠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습니다. 몇몇 필수적인 거점을 빼놓고는 전부 이정도 수준이겠지요. 만약 거용관을 바로 들이쳤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입니다만."

거용관은 북경 바로 위에 위치한 관문으로, 그곳을 공략하는 방안이 먼저 검토가 되었다.

그러나 화력이 부족한 이들 북로군으로서는 대비가 충실히 되어있을 거용관보다 대동을 뚫는 것이 손쉬우리란 판단 하에 조금 더 돌아가게 된 것이다.

대동에 조선(朝鮮) 깃발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지르갈랑이 물었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 것이오?"

"죽 남하하여 북경을 크게 돌아 포위할 것입니다. 바다를 통해 건너온 남로군과 합류해서요."

===

- 퍼펑!

강진흔이 이끄는 조선군 함대는 해안가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철환과 산탄, 진천뢰 등을 가득 뒤집어쓴 명군은 조선군이 상륙하자 혼비백산했다.

"도망치지 마라! 적은 한줌일 뿐이다!"

호광에서 명군을 이끌고 올라온 총병 고걸(高傑)이 외쳤지만 통제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단지 포를 쏘아낸 후 일부 병력이 뭍에 올라와 조총을 쏘아냈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한번 얼이 빠진 병력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흩어졌다.

조선군은 명군을 한번 공격함으로써 전과를 챙긴 뒤 고을의 창고를 털어 물러났다.

고걸을 비롯한 명군 장수들이 달아나고 흩어져버린 장졸들을 수습하여 간신히 전열을 정비했 때는 이미 조선 함대가 유유히 남쪽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막대한 피해를 입힌 조선 수군이 물러나는데도 고걸이 이끌던 호광군은 닭 쫓던 개처럼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조선군이 일단은 퇴각한 것이니 말이다.

'직례의 해안에 상륙해 북경으로 진격하던 조선군을 패퇴시켰다'는 장계를 작성하던 고걸은, 문득 부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조선군을 물리친 것은 물리친 것인데, 이제 어떻게 움직여야 하겠는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요."

하나는 원래 황명을 받은대로 산해관을 지원하러 가는 것.

다른 하나는 함대를 쫓아 계속 남하하는 것.

그러나 전자를 선택했을 땐 언제 다시 적군이 되돌아와 천진에 상륙을 시도할지 알 수 없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도대체 언제까지 적을 쫓아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되도록 조선군과 직접 맞서고 싶지는 않은데.'

고걸은 이자성 휘하에 있다가 그 아내 형씨와 눈이 맞아 관군에 투항한 자로 처음에 유격 자리를 받았다가 현재는 총병으로까지 올라온 터였다.

저에게 이를 갈고 있던 이자성도 불귀의 객이 되었고, 그러니 싸울 이유가 없어 장헌충을 토벌하라는 황명이 내려온 뒤에도 계속 미적대고 있었지 않은가.

'제길, 이럴줄 알았으면 계속 핑계나 대며 호광에 남아있을 것을 그랬군.'

고걸은 혀를 찼다.

'그래도 산해관 앞에서 버티고 있을 조선군의 주력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수군과 맞서는 것이 좀 더 낫지 않을까.'

한 나라의 장수가 내리는 판단치고는 너무나 이상한 기준이 끼어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만력 연간부터 수십년간 숱한 명장 명신들이 내외의 난리로 죽어나간 상황.

따지자면 그처럼 반란군 출신의 용렬한 장수마저 쓸 수 밖에 없는 명나라가 이상한 것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고걸이 외쳤다.

"산해관을 붙들어 지킨다 하더라도 저놈들이 천진(天津) 같은 곳에 상륙하여 경사를 노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차라리 놈들을 쫓아 내려감만 못하다!"

고걸은 그 길로 숭정제에게 장계를 올렸다.

북경을 향하던 조선군을 패퇴시켰으나 뿌리를 뽑지 못하였으니 추격할 것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장계였다.

대함대가 북경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기함한 숭정제가 이를 허락하니, 산해관에 예정되었던 지원은 이로써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산해관 총병 황득공은 아직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사절이 왔다는 말에 황득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적의 꾐이나 황제의 의심에서 벗아나자면 사절을 아예 들이지 않거나, 아무말 않고 즉각 목을 베는 것이 옳다.

황득공 역시 전일이라면 망설임없이 그리하였을 것이나, 전황이 불리하고 성중 민심이 흔들리니 사절 목을 베어 사기를 다잡는 것은 역효과만 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황득공은 조선군에서 왔다는 사절을 성 안으로 들이되 대뜸 문초하듯 윽박을 질러댔다.

"이자원이 병법을 아는 것만 믿고 천조에 군대를 몰아왔으나 변변한 수확이 없어 너희들을 보내었구나. 솔직히 털어놓으면 살려줄 것이로되, 헛된 말로 나를 꾀려 들면 목없는 귀신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자 사절의 앞줄에 서있던 이암이 태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웃긴가?"

황득공이 성이 나서 물었다.

"독에 구멍이 셋이나 뚫렸으니 한팔 넣어 막는다 한들 새는 물을 어찌 막으리오. 장군이 아무리 날고 긴들 산해관에 앉아 대동과 천진을 통해 나아가는 우리군을 막을 수가 있겠소?"

이암의 차분한 반론에 황득공은 입을 다물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항복 말고는 답이 없지 않은가.

황득공이 말이 없자 이암은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공손히 설득을 이어나갔다.

"이미 하늘이 명나라를 버렸으니, 사방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와 기근이 바로 그 징조이외다. 황제는 아랫사람을 하찮게 여겨 벌써 몇번이나 쓰고 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총병만은 예외라 생각하십니까?"

'천자에게 충성해보았자 돌아올 것이 없다라.'

황득공은 이암을 노려보았지만 이암은 여전히 침착했다.

"장군이 직접 칼끝을 돌리라는 것도 아니고, 명나라를 치러 가는데 길만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무에 어렵겠습니까. 길을 빌려주신다면 그 빌린 값은 후히 치르겠습니다."

이암의 뒤편에 있던 다른 사절들도 동조하며 말했다.

"저희는 장군과 같은 요동 사람입니다. 조선 통령께서는 공언하신 일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마땅히 열후(列侯)의 자리를 장군께 약속하셨으니 고향으로 돌아와 자손 대대로 복록을 누리십시오."

황득공이 그들을 보니 과연 낯이 익었다.

산해관에 진격하기 전 일부러 자신의 고향에서 모아온 이들이리라.

황득공은 치밀한 준비성에 혀를 내둘렀다.

고민하던 황득공이 대답했다.

"이것은 당장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나 뿐 아니라 제장(諸將)과 군민(軍民)의 의견도 들어보아야 하니 잠시 군사를 물려주면 숙고해보겠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암은 선선히 대답하며 사절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그러나 가지고 온 예물은 거두지 않았으니, 황득공이 이암을 불러 다시 그것을 가져가게 했다.

그러나 이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것은 우리 통령께서 그간 산해관을 철벽같이 지킨 장군의 용맹을 칭찬하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항복의 대가 같은 것은 아니니 마음놓고 가지십시오."

"음."

황득공은 그러자 정말 별말없이 이것을 받아들었다.

'용맹을 칭찬한다느니 하는 말은 헛소리이고,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틀림없구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황득공이다.

고향 사람들을 사절로 데리고 온 것을 보면 이런 사정을 적들도 다 알아채고 있을 터.

자신이 재물욕이 많으리라 짐작하여 뇌물로써 보낸 것이다.

'차라리 잘되었다.'

적은 그를 회유할 수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황득공은 이암이 건네준 예물을 군말없이 받음으로써 그런 조선군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적이 군사를 거둔 동안 군민을 쉬게 하고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가 있겠지.'

이것이 장계취계(將計就計)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황득공의 요구대로 조선군은 공격을 그만두었다.

편액이 떨어진 일로 뒤숭숭하던 산해관의 분위기도 잠정적 휴전이 성사되자 사기도 회복되고 민심도 안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황득공은 조금 마음이 편해져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

이암이 진중으로 돌아오자 장수들이 황급히 물었다.

"적진의 분위기가 어떻던가?"

"총병은 무어라 반응하던가?"

"처음에는 황득공이 저희를 두고 마구 꾸짖더니, 종래에는 생각해보겠다며 여지를 주었습니다. 가지고 간 예물도 망설임없이 취하였고요."

이암의 말에 장수들이 감탄했다.

"과연!"

"기울어가는 나라에 충성할 자가 많지 않사오이다. 고민은 길지 않겠지요."

"창검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천하제일관을 열어젖히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산해관은 난공불락이었다.

조금씩 밀어내는 중이긴 했으나 언제 함락이 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판에 적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니 이제 일은 다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득공의 사람됨으로 보건대 진실로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원은 냉정하게 그들의 희망사항을 일축했다.

황득공은 원래 역사에서 남명의 주유숭 같은 암군을 모시고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은 자다.

고작 작위와 뇌물 따위에 혹해 항복할 인물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끌기 위한 적의 수작이다."

"허면 통령 대감께서 사절을 보내 달래신 것은······?"

처음부터 이자원의 노림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황득공에게 항복을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으로 이쪽을 오판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오늘의 회유를 진실로 믿고 풀어져 있을 터. 지금 들이치면 힘으로 산해관을 얻을 수 있다."

통령의 말에 장수들이 긴장하여 얼굴을 굳혔다.

이자원은 선언했다.

"오늘 천하 제일의 관문을 함락한다!"

< 정명 전쟁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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