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7화 (187/213)

< 정명 전쟁 (1) >

경연을 빼놓고는 하루종일 멍하니 시간을 죽이던 이백은 갑작스럽게 찾아든 이자원에게 놀랐다.

"신 이자원, 전하께 정명(征明)의 윤허를 받고자 이리 왔사옵니다."

"알겠소."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으니.

그는 내관에게 명하여 절월(節鉞)을 가져오게 했다.

이자원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경군(京軍) 1만여, 북병 2만, 삼남에서 3만, 다시 요동에서 3만 명이니 거의 10만에 육박하는 병력이옵니다."

이자원이 임금에게 보고했지만 임금에게 그 숫자가 와닿을리도 없고, 실질적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병력도 아니었으니 그저 듣고만 있는 수밖에 없었다.

경군은 대부분 삼군문이다.

수어청과 총융청은 이호의 난 이후 해산되었고, 훈련도감과 어영청, 그리고 금위영(禁衛營)으로 개편된 정초군이 인원을 크게 확충하여 한성의 방비를 맡았던 것이다.

그 중 단연 제일은 훈련도감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훈국이었으나, 통령의 친위세력이나 다름없기에 단독으로 1만 명이 넘는 수준으로 커졌던 것이다.

어영청과 금위영 역시 규모를 키우는 한편, 훈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인력과 장비의 정예화를 달성하는 중이었으나 큰 의미가 없었다.

"주장(主將)은 누가 맡기로 하였소? 충장공(忠壯公) 유림도 작년에 죽었지 않소?"

"신이 직접 군대를 거느릴 것이옵니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이 물었다.

"통령이 친정(親征)하면 누가 도성을 지킨단 말이오?"

이 나라의 군주는 조선왕 이백이다.

친정이란 말은 감히 신하에게 쓸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백은 무심코 그리 말했다.

타의에 의해 권력을 모두 빼앗긴 그는 자신의 말실수에 은근한 비감을 느꼈다.

"형조판서 심기원은 호란 시절 도원수를 지냈고, 또한 가도 부총병으로 오래 있으며 군무를 익혔으니 그에게 대임을 맡겨둘 생각이옵니다."

심기원은 2년 전 이호의 난 당시 이자원을 대신해 숱한 피를 묻힌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이자원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이.

"내정은 호판 김육에게 맡겨두고, 정 중대한 일이 있으면 신이 적지(敵地)에 있는 동안 틈틈이 처리하겠사옵니다."

이자원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아무 염려마시고 그동안 심신(心身)을 갈고 닦으며 학문을 부지런히 익히시옵소서."

실상 이백이 할 수 있는 일, 하고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말을 이자원에게 직접 듣자 이백은 불뚝 화가 치솟아 말했다.

"만사가 통령의 손에 있는데 학문을 익혀 보았자 무슨 소용이오? 통령 같은 명신이 있으니 나는 다만 목숨이나 붙이고자 할 뿐이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곳에는 임금과 이자원, 그리고 내관 몇만이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엎드려 있던 이자원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이자원은 내관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그가 공손히 받치고 있던 절월을 집어들었다.

"대, 대감! 무슨?"

내관이 놀라 외쳤다.

절월은 예식용이라 하나 엄연한 도끼이다.

설마하는 생각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뇌리에 스친 그때, 이자원이 절월을 대뜸 이백에게 내밀었다.

"전하!"

이자원이 절월을 겨누며 소리치자 임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아랑곳않고 이어서 외쳤다.

"신을 정녕 역적으로 여기시옵니까? 그렇다면 이 절월로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이 나라의 임금은 누가 뭐라해도 전하가 아니시옵니까?"

임금의 고사리 같은 손이 내민 절월에 살짝 닿았다가 황급히 떨어졌다.

"그대, 그대는······."

"그리 하지 못하시겠다면, 신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임금은 얼이 빠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자원은 절월을 그대로 집어든 채로 대전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정도로 엄포를 놓았으니 자신에게 반항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

===

병력은 삼로(三路)를 통해 나아갔다.

만주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된 기병들은 수크사하의 인솔을 받아 몽골로 향했고, 강진흔이 이끄는 함대가 가도를 출항했다.

그리고 이자원이 거느린 본군은 금주와 영원을 지나쳐 요서의 끝자락이자 중원의 관문, 산해관에 도착했다.

"과연 장관이올시다!"

이완이 감탄했다.

산해관은 유관(楡關), 임유관(臨?關) 등으로도 불리나 가장 유명한 별칭은 바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다.

성벽이 견고하고 높으며, 양식 또한 멋들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현대의 관광지가 아니라 공략해야할 관문인 터.

웬만한 공성으로는 까딱없을 법한 곳이었다.

그러니 원래 역사에서도 오삼계가 스스로 열어젖히기 전까지는 그 청나라도 함락하지 못한 곳이 아니겠는가.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자원이 묻자 오삼계가 대답했다.

"총병 황득공(黃得功)이라는 자입니다. 요동 출신으로 용맹하고 공적이 많아 강남 쪽에 총병으로 가있다가 황제가 불러다 산해관을 지키게 한 듯 합니다."

"형세를 보니 쉬이 무너지지는 않겠구나."

천리경으로 산해관을 살펴보던 이자원이 말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진동문(鎭東門)의 현판에 닿았다.

"현판이 멋지군."

진동문은 산해관의 동문으로, 이리로 진격해온 조선군으로서는 바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훗날의 박제가는 진동문의 현판에 쓰인 「천하제일관」이라는 글자를 보고 진나라 이사(李斯)가 쓴 것이라 여겼으나, 실상은 명 현종 주견심의 명에 의해 진사 소현(蕭顯)이 쓴 현판이었다.

이사가 썼든 소현이 썼든 명필이란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지만 이자원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저 현판을 떨어뜨릴 수가 있겠는가?"

"현판을, 말씀이시오이까? 화포를 쓰면 가능이야 할 것입니다만······."

"화포를 써서야 의미가 없다. 야음을 틈타서 사람을 보내 떨어트릴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경계가 삼엄할 것인데 가능하겠사오이까."

이자원이 갑자기 현판을 운운하자 부하들은 당황했다.

성벽을 어떻게 부수고 타넘을지, 성문을 어떻게 열어젖힐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저쪽에서 사람 하나가 나왔다.

"조선은 무슨 일로 군신의 은의를 지키지 않고 군대를 몰아 왔는가? 임오년의 화약을 잊었는가?"

이미 요서를 지나오는 동안 소문은 다 퍼졌을 터인데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는 명군에 노해 이완이 소리쳤다.

"너희 나라가 먼저 화약을 어기고 군신의리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 바쳐야할 제사비도 끊었지 않으냐? 너희 나라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 산해관을 지키는 자는 어서 나와 천병(天兵)을 맞아라!"

"천병이라니! 소방 조선이 감히 그런 말을 쓰느냐!"

이완이 뭐라 받아치려 할 때, 이자원이 손을 들었다.

"문답무용이다. 이대로 일전을 겨루어봄만 못하구나! 좌군은 나가서 성을 떨어뜨리라!"

이자원이 등채를 휘두르며 외치자 좌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섰던 명군 장수의 눈이 커졌다.

"그대들은······!"

오양과 조대수, 홍승주와 오삼계.

옛 항장들이 줄줄이 옛 명군을 이끌고 온 모습을 보고 산해관을 지키던 명군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들은 영원 쪽 병력인데?"

"항복하라, 항복!"

명군 출신 항병들은 산해관을 향해 그렇게 외쳐댔다.

그들은 조국에 대한 정이라고는 한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명나라는 우리가 붙잡혀 있는데도 조선에 흉계를 부렸다. 일이 잘못되었으면 우리는 죄 목이 달아났을게 아닌가?'

이미 송산 싸움으로부터도 수년이 지나있던 터.

아예 요동에 말뚝을 막고 가정을 이룬 자들도 많았거니와, 이런 분노가 덮치자 그들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았다.

"항복하지 않는 놈들은 죽여야 한다!"

"전부 쳐라!"

항병들은 운제와 충차 같은 공성 무기를 성벽 아래로 끌고 가 성문을 두들겨 댔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당연하게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던 산해관은 이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끓는 기름이 명군 하나의 얼굴에 쏟아져내리고, 개미처럼 새카맣게 달라붙어있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떨어져내렸다.

"적은 수성에 능하여 피해가 크겠사오이다."

이런 점을 예상했기에 이자원은 명군을 먼저 내세웠다.

물론 포격 지원은 대대적으로 해주었지만, 정병인 조선군 목숨을 녹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항병들은 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 쿠쿵!

조선군의 포격에 성첩에 있던 명군이 쓸려내려갔다.

그러나 과연 산해관은 산해관이었다.

"적의 방비가 너무나 탄탄하오이다."

"처음부터 쉬이 뚫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병력을 셋으로 나눈 것이 아닌가.

명나라가 산해관을 지원하기 위해 급히 병력을 끌어올렸더라도, 그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후방을 찌르면 적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장헌충을 누르지도 못하고, 산재한 반란군을 진압하기는커녕 전장만 확대되고 있던 명나라다.

여기에 다른 루트로 이어지는 병력이 의표를 찌르고 들어간다면 제아무리 산해관이라 하더라도 홀로 꼿꼿이 버티고 설 수는 없다.

"수크사하는 어디에 도착했다고 하던가?"

"대동에 다다라 포위 중이라 하오이다."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세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횃불을 환히 밝힌 채 공격 중인 조선군을 이자원이 응시하고 있을 때, 이암이 와서 말했다.

"통령 대인."

"무슨 일인가?"

"낮에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옵니다."

이암이 말을 이었다.

"대인께서 현판을 떨어트리려 하시는 이유를 짐작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성 싶은데, 소인의 계책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자원은 선선히 허락했다.

이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현판이 떨어졌다고?"

산해관 총병 황득공은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진동문에 걸린 천하제일관의 현판은 산해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싸움을 하다보면 현판쯤이야 떨어질 수도 있는 터.

당장 심심찮으면 조선군의 포격이 날아오지 않는가.

"헌데 어젯밤 진동문에는 싸움이 없었습니다. 적이 징혜루 쪽으로 야습을 감행해오느라 최소한의 병력을 빼어놓고는 모두 그리로 지원을 갔었지요."

"그래,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이백년 가까이 아무일 없던 현판이 떨어진 것은 이상하지만, 그래봤자 현판이고 성문이 뚫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시 붙여놓으면 될 터.

"헌데 이 현판이 떨어진 것을 두고 성 안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소문?"

황득공이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불길한 예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수백년간 아무일없던 편액이 떨어진 것은 천하제일관이 남쪽으로 옮겨갈 징조라며 동요하고 있습니다."

황득공은 이마를 탁 쳤다.

자신은 장수이니 재수없다는 감상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산해관에 뿌리박고 살아오던 사람들의 느낌은 다를 것이었다.

그 수대 조상부터 보고 살아오던 산해관의 상징 같은 편액이 아무런 인과 없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황득공은 좌우를 둘러보며 엄히 외쳤다.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말라! 오래된 현판이 떨어졌을 뿐인즉! 진동문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조선놈들이 수를 쓴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떨어진 편액은 다시 붙이면 된다!"

군사들에게 단단히 명을 해두었으나 흔들리기 시작한 민심이 쉬이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오삼계를 비롯한 항병들이 창칼을 거꾸로 들고 공격해오는 판국이 아닌가.

"경사에 요청했던 지원군은 언제 온다더냐? 듣기로 황상께서 호광의 병력을 빼어 이리로 보내신다 하였는데?"

조선군의 움직임을 감지하자마자 숭정제에게 이를 요청한 황득공이었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암담한 소식이었다.

"직례 해안에 나타난 조선군 함대 때문에 그곳에 붙들려 있다 합니다. 아무래도 근시일에 도달하는 것은 무리일듯 싶습니다."

황득공은 얼굴을 문질렀다.

"아직까진 버틸만하나 적의 기세가 강맹하고 숫자가 적지 않으니 어찌될지 모른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제장들을 둘러보며 말하고 있을 때, 부하 하나가 뛰쳐들어왔다.

"총병 대인, 조선군 측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 정명 전쟁 (1) > 끝

ⓒ 핏콩

작가의말

탈닌님 후원 감사합니다.

큰힘이 되었습니다.

산해관의 현판이 떨어진 사건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 일로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 일본군이 연전연승하니 천하제일관이 남쪽으로 옮겨갈 전조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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