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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5화 (185/213)

< 새로운 나라 (2) >

- 중국에 나아가 천하를 소유하자!

그간의 북벌 논의가 '인조의 원수'인 청나라를 정벌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것은 세계관을 뿌리채 흔드는 주장임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분명했다.

'명을 곧 죽어도 상국이라 섬기던 이들은 모두 목이 잘려나간지 오래. 게다가 송산 이후로 끝없이 명나라는 조선을 도발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건원칭제, 제국이라는 말에 좌중의 눈이 변했다.

'그런가, 우리도 제국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깨달음에 가까웠다.

한갓 달단 오랑캐에 불과한 저 원나라라 할지라도 중원을 차지하니 사서에는 길이 황제국의 이름으로 남지 않는가.

하물며 이 조선이겠는가.

기대감이든, 아니면 두려움이든.

제국이란 단어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이자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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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오."

이자원의 말에 김육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호의 난 진압에 공신으로 책봉이 되었는데,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방관한 대신들과 달리 도성 바깥에 있었으며 아들 김좌명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 자체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명 관계는 파국에 다다랐소. 저들이 때가 되었는데도 차일피일 세폐의 납부를 미루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

숭정제는 내전을 관망하는 동안 원래 인도해야할 은을 주지 않았다.

사정상 아직 마련이 되지 않았다는 상투적인 핑계였으나, 이 기회에 조선과의 화약을 청산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던 것이다.

"그야 그렇지요. 하오나 가도의 무역이 끊기면 벽란도도 타격을 입을 것이오이다. 이 점은 어찌하실 작정이시온지······? 안그래도 재정의 소용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터인데."

"내가 호판을 부른 것은 그 때문이오."

이자원은 말을 이었다.

"몰수한 종친과 신하들의 토지, 노비 등이 수없이 많소. 이것을 처분하여 재정을 마련하시오. 단,"

김육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 땅에서 소작 짓는 이들에게 먼저 불하(拂下)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수확량에 따라 수년 걸쳐 대금을 상환받을 것이오. 노비도 마찬가지. 대개 속량(贖良)시키되, 그 비용은 분할하여 받아내시오."

거기까지야 김육 역시 동감했다.

그러나 이자원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 이렇게 시범적으로 토지분배를 행하여 본 뒤, 시행착오를 수정하여 장차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나갈 것이오. 그때에는 역도들과 달리 지주들에겐 나라에서 적절한 보상금을 주어야겠지."

이자원은 당황한 김육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에겐 해결해야할 일이 산적해있었다.

===

- 뻐어억!

멀리서 날아온 철환에 망루가 박살이 났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진천뢰에 불이 옮겨붙자, 어설프게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우왕좌왕 뛰어다녔다.

"당황하지 마라!"

등주위지휘첨사 척조국(戚祚國)이 그리 외쳤지만, 어느 누구보다 당황하는 이는 바로 그였다.

명장 척계광의 장남으로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지휘첨사를 습직한 그였으나 아버지와 같은 군재는 없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이렇다할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죽은 자였으니, 자연 위소 관리나 둔전 경영 따위의 평시 업무는 그럭저럭 해나갈지언정 이런 비상사태에는 어찌 대처해야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지룡의 반란군은 강남 해안에나 들끓을 뿐 여기에는 오지 않았고 왜구 역시 잠잠해진 뒤론 마찬가지였다.

헌데 별안간 배 수십 척이 조선의 깃발을 달고 쳐들어오지 않는가.

"혀, 형태는 분명 우리식인데······. 가도 놈들이구나!"

척조국이 소리쳤다.

조선은 가도를 장악한 후 교역을 위해서 많은 배를 건조했다.

대개는 명나라식 선박으로 이루어진 가도 선단은 등주를 비롯한 해안가를 다니며 교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물길에도 밝았고, 군사들이 어디를 지키고 서있는지도 사정이 훤했다.

해안가에 쏟아진 포탄에 병사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명나라의 군율은 해이해진지 오래. 많은 병력이 그저 서류상이었으니 제대로 소집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 끌어모은 군사들조차 방어를 해나갈 마음이 없었다.

해전을 벌이려 해도 선박이 다 썩어들어가거나, 도저히 맞아싸울 수 없는 소형에 불과했으니 불가한 일이었다.

변변한 저항없이 포구에 다다른 가도군은 줄줄이 병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겁에 질려 혼비백산했지만 조선군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민폐(民弊)를 끼쳐서는 아니된다! 금고와 곡창은 저쪽에 있으니 남김없이 쓸어담아라!"

북경에 세금을 바치기 위해 쌓아두었던 은 역시 조선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여염집은 건드리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관창을 털고 있는 조선군을 보며 백성들은 어리둥절했다.

"가져갈 수 있는만큼 싣고, 나머지 식량이나 포목 같은 것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오삼계가 명령했다.

어차피 전부 가져갈 수는 없다.

이름은 구휼미라 하되 탐관오리들이 그간 철저히 착복해온 탓에 백성들은 구경도 못하고 있던 쌀이었으나, 갑자기 조선군이 창고를 열고 이를 가져가라 명하니 사람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것은 모두 조선 통령 대감과 이 상승장군 오삼계의 성덕(聖德)이니라! 모두들 이 은혜를 잊지 말도록 하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명나라고 조선이고 무슨 상관인가.

개미떼처럼 백성들이 허겁지겁 쌀가마니를 울러매고 흩어졌다.

척조국은 멀리서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

숭정제는 기함했다.

"등주가 적습을 받고, 이어 장성 너머에서도 대대적으로 약탈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냐?"

"그, 그러하옵니다."

몽골을 속국삼은 조선은 그리로 기병을 대거 보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만주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살육과 약탈에 익숙한지라 가도군처럼 관창만을 털고 빠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산해관만은 어찌어찌 틀어쥐고 있던 명나라였으나 수륙(水陸)의 양용으로 감행되는 이런 우회 공격에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

조선을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자신하던 계책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조선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난리를 치고 있다.

숭정제가 하문했으나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답답하게 바라보던 숭정제가 옥좌의 팔걸이를 내려치며 외쳤다.

"이것은 간신들이 짐을 속인 탓이다! 금의위는 어서 나서서 이따위 계책에 찬동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

따지자면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숭정제가 주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는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히익!"

"폐하, 살려주십시오!"

"어서 끌고 가라!"

숭정제를 대신하여 책임을 짊어질 신하들이 대전에서 사라졌지만 그것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조선군이 물러간 등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사옵니다."

"무어라? 도대체 왜!"

숭정제가 소리를 질렀다.

"조선군이 멋대로 나누어준 식량을 등주 관리들이 다시 거두어들였는데, 여기에 반발하여 기민들이 지현(知縣)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고 하나이다."

"이 도적놈들이!"

숭정제의 노호성이 터져나왔다.

"등주 뿐만 아니라 내주와 회안 등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백성들은 조선군이 나눠준 식량과 재물을 내놓지 않으려 들고 있사옵니다."

황제는 이를 갈았다.

"이놈들이 민심을 흔드는구나."

제놈들이 싣고 갈 수 있을만큼만 양껏 약탈하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뿌리면 끝. 그러나 졸지에 창고가 텅 비어버린 지방관들로서는 그것을 다시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선의 이름은 높아지고, 반면 이 명 조정의 악명만 퍼지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산해관을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수비군을 뺄 수도 없고, 이젠 사천 전역을 장악하고 옹량으로 손을 뻗치는 장헌충을 억누를 병력을 보낼수도 없다.

군대를 재정비할 자금은 지난 세월 조선에 뭉텅이로 빨려나갔으니 말이다.

"남천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가."

숭정제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

벽란도에 약탈품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들어왔다.

출항은 가도에서 했으나, 돌아올 때는 이곳이 더 가까웠다.

애초에 약탈품의 배분도 도성과 더 가까운 이곳에서 하는 것이 편했다.

"중국은 조선의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얀 반 엘세라크가 말했다.

그는 새로 데지마에서 옮겨온 VOC의 벽란도 상관장이었다.

데지마 상관과는 달리 벽란도는 거주와 행동, 거래 품목이 제한된 일본보다 훨씬 자유로워 알짜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것은 VOC만이 갖고 있는 특혜는 아닌지라, 예수회 역시 아예 조선의 수도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들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분야가 다르지 않은가.

사업상 경쟁자가 아니라 기술과 학문을 전수하는 대신 포교에 집중하는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프로테스탄트니, 가톨릭이니 따지는 것은 본토에서만 하기로 해두세. 예수회가 하는 포교가 우리한테도 제법 도움이 되거든."

쿠케박케르가 말했다.

그는 조선과의 교역을 맡아 수년간 여기에 매진하다, 그 공로로 승진해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공백을 메우러 온 사람이 눈 앞의 엘세라크였다.

예수회 신부들이나 자신들이나 조선인의 눈에는 똑같은 남만인이다.

예수회는 그간의 봉사와 조선 정부에의 협력, 그리고 교육 등을 인정받아 나름 호의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은 정말 중국을 정복할 작정일까요."

"불가능하진 않겠지."

쿠케박케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빙글빙글 웃던 그가 별안간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조선만큼 우리에게 협조적인 교역 상대는 없네. 예수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거고."

예수회는 나름 명나라 황제들의 총애를 받아왔다지만, 어디까지나 포교를 허용하는 선에 그쳤을 뿐, 조선에서 이리 대대적으로 교세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이자원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 컸다.

"조선이 중국을 정복하면 시장은 몇배로 넓어지네. 우리 VOC의 동방 교역 역시 절정에 달하겠지. 그땐 이 좁은 벽란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의 포구에서 무역을 할 수 있을거야."

"그래서 조선인들이 전선을 건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까?"

"이건 예전부터 포함되어있던 계약조건이야. 다시 한번 요청을 받은 것 뿐일세."

쿠케박케르는 조선을 위해 선박공과 설계도를 수배해주고, 기타 노하우도 모두 전수해줄 것을 약속했다.

조선은 몇년 내로 자체적으로 서양식 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되리라.

물론 이런 호의는 공짜가 아니었지만, 쿠케박케르는 몇배, 몇십배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대만에 조선인들을 보내겠다는 통령의 제안은요?"

쿠케박케르는 엘세라크의 물음에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들이 우리 네덜란드의 신민이 되기를 자청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자네도 알다시피 대만 내의 중국인들은 시도때도 없이 말썽을 피우지 않나. 정지룡의 세력도 호시탐탐 그쪽을 넘보는 모양이니······ 총독께 긍정적인 방향으로 건의드릴 생각일세."

그가 보기에도 조선의 가뭄은 심각했다.

조선이 중국을 먹으면 이 문제가 해결이야 되겠지만, 그때까지 당장 먹일 입을 줄이기도 해야할 터이니 말이다.

쿠케박케르의 말에도 엘세라크는 어딘가 찜찜했다.

'조선의 개항이 상관장의 최대 치적이니 좋게만 보시는 것은 아닐까?'

조선이 바다로 나아온다면 네덜란드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기야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그가 만나본 동양인들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기는 했다.

엘세라크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새로운 업무,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려면 쿠케박케르가 떠날 때까지 바쁘게 배워야했다.

< 새로운 나라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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