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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4화 (184/213)

< 새로운 나라 (1) >

한성 양화나루 인근에는 잠두봉(蠶頭峰)이라는 언덕이 있으니, 흡사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시 한가로울 때면 삼삼오오 모여 흐드러진 버들꽃이며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풍취를 즐기기가 좋은 곳이었으나, 작금의 흉흉한 광경을 보고 그리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잠두봉이 아니라 절두봉(切頭峰)이네 그려."

이리 수군거리는 것처럼, 종친이란 종친들은 죄다 이리로 잡혀와 그 목을 한강 아래로 떨구고 있는 판이었다.

고귀한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한낱 개처럼 목이 달아나는 한편으로, 본래라면 생각지도 못할 반사이익을 취한 자들도 있었다.

장현의 부친 장경인(張敬仁)이 대표적이었다.

"예, 예조참판 말씀이시오이까."

장경인은 품계로는 정2품 동지에 이르렀으나, 당연히 그만한 실직(實職)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런 그를 이자원이 끌어올려 예조에 앉힌 것이다.

이것은 아들 장현이 이자원과 맺고 있던 교분 덕이 컸다.

장현이 이자원의 위세를 업고 교역으로 큰돈을 번 것은 누구나 아는 터.

그는 이호의 난 당시 벽란도에 머물고 있다가 북쪽으로 달아났고, 그 아버지와 숙부, 사촌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다만 납작 엎드려 살아남았다.

"크나큰 광영이오나 과연 대소신료들이 가만히 있겠나이까?"

이호의 난으로 상당수 신하가 갈려나간 관계로 그 공석에 이자원이 자신의 사람을 앉히는 것은 당연했지만, 중인인 장경인을 앉히자면 반발은 심할 터였다.

"이 나라는 양반의 나라이지."

이자원은 장경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인이나 서얼은 한품서용(限品敍用)의 법에 걸려 정3품의 당하관까지만 올라갈 수 있으며, 그 위로는 실직을 지닐 수 없다.

그런 판이니 당상관이 된다 하여도 제대로 된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실무에서 물러나야만 했으니 여러 중인들은 되려 당상관이 되는 것을 꺼리는 판이었다.

비단 조선만이 그런 것은 아니라, 그만한 신분제는 이 시대에는 어딜가나 두루두루 뿌리깊게 박혀있었다.

"나는 이런 한품거관의 법도를 폐할 것이오."

이자원의 지지세력은 양반 벌열사족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현재는 그가 쥐고 있는 군권이 그의 기반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자원은 중인과 서얼들을 모두 조정으로 끌어올릴 작정이었다.

자신의 추종세력을 만드는 한편으로, 더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그러나 이런 작업에는 필연적으로 반발이 따르는 법이다.

당장 종친들의 목을 날릴 때는 가만히 있던 자들도 나섰다.

"통령 대감, 대저 법을 세운다 함은 곧 만세(萬世)에 드리우는 것이며, 그 귀천의 분별을 분명히 하고 적서의 분수를 엄히 한 것은 여러 임금께서 공언하신 바입니다. 예조참판은 대임을 맡은 중신이온데 장경인 같은 상민을 그 자리에 앉혀 조정을 높이지 못할까 우려되오이다."

이자원은 조용히 반문했다.

"우선 나부터가 얼자의 출신인데 그렇다면 나를 뭇 신하의 우두머리로 세우신 임금의 뜻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오?"

이자원이 노려보며 묻자 신하는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이자원은 무력으로 나라의 권력을 온통 틀어쥔 실권자이니 어느 누가 거기에 대고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자원은 때를 놓치지 않고 선언했다.

"앞으로는 각부의 관리들은 실무를 깊게 아는 자가 선발될 것이오. 과거를 통과한 자라면 누구나 그 출신에 관계없이 서용되어야 할 터. 다른 마음이 있는자는 앞으로 나서시오."

아직 대숙청이 몰아치는 중이다.

생살부를 지닌 심기원이 닥치는대로 연루자들을 끌고 가서 목을 날려대고 있으니, 이자원이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에 그들의 이름을 집어넣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 그 출신에 관계없이 현량하고 배움이 빠른 자들을 뽑아올리라 명하겠소."

"예?"

이어진 통령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남만에도 성현(聖賢)이 있고 어진 가르침이 있소. 경당문노(耕當問奴)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니 오늘에 이르러 남만 열국이 재부를 높이 쌓고 그 백성을 배불리는 방법을 배워오게 해 조선의 동량으로 삼을 것이오."

"······."

과연 사족의 후예 가운데 누가 있어 조상 묻힌 땅을 버리고 만리 길을 건너 그것을 배우려 들겠는가.

당장 홀란도로 떠났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조정에서 끈떨어지고 사실상 밀려나다시피하여 그리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각각 이조정랑과 좌랑이 되어 중용받았으니, 눈치빠른 사람은 이리 속으로 개탄했다.

'남만의 병기가 날카롭다 하나 결국 금수같은 오랑캐가 아닌가. 통령은 공맹의 도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로지 남만에서 잡기(雜技) 배운 자를 장차 조정의 중신으로 앉히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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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이 조정을 빠져나와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하자, 반응은 첨예하게 갈렸다.

"명나라로 가는 사행 정도면 모르되, 그 험한 바다를 건너 듣도 보도 못한 남만 나라들에 가서 학문을 배우란 말인가?"

양반들의 반응은 대개 이러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다.

그들의 기반은 조선에 있었고, 그들이 배워야할 학문은 조선과 중원의 것이었으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유학적 소양을 쌓아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남만학이란 오로지 중인이나 배울법한 잡과용 학문이었으니 시큰둥한 것이다.

하지만 중인들은 달랐다.

"역관 장경인 어른이 예조참판이 되었다!"

"나라에서 이제 중인이라 할지라도 망설임없이 대신으로 삼는구나."

"남만에 한번 다녀오면 그야말로 출세길이 열릴 것이란 소문일세. 어쩌면 기회가 아니겠는가?"

역관들은 대부분 벽란도를 통한 상업에도 한손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만큼 소위 남만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귀동냥을 해왔으며, 이미 잡과에서 남만학이 대부분 도입되었던만큼 거부감도 없었다.

오히려 이것이 출세의 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들은 망설임없이 나섰다.

평소같으면 여기저기 모여 신세한탄이나 할 서얼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고, 세상은 한치 앞도 알 수가 없는거여. 우리 같은 얼자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 되지를 않나, 귀하디귀한 왕자님네들이 죽어나자빠지질 않나."

"이제는 중인이 호조의 참판이 되었다지."

"그것 때문에 도성이 난리일세. 이번에 벽란도의 홀란도 배를 통해 나라에서 유학을 보낼 작정인데, 송상에서도 사람을 넣는다던걸."

그 말에 누군가가 관심을 보였다.

"그래? 상민들도 거기에 낄 수가 있다던가?"

"기초적인 학습 능력을 보는 시험을 봐서 붙으면 누구라도 끼워준다던데. 그게 아니더라도 남만승들이 연 학당에 가면 학문을 배울 수가 있다던걸."

"음, 그래도 의술 배워 잡과나 하기에는."

"나도 그런 것만 가르치는 줄 알았더니, 남만 성현들의 말씀을 배우기도 한다더군."

"그런 것은 어디에 쓰나?"

"이미 왕양명이 주희를 밀어내고 과거 시험 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남만인 성현이라고 못나올 것이 뭐가 있겠나? 이번에 종친들 목을 베고 몰수한 돈을 들여 나라에서 그런 것 배우라고 보내준다니 천지가 뒤집히긴 할 모양이야."

서자들이 이리 삼삼오오 앉아다가 떠들고 있자니, 제법 차려입은 유생들이 지나가며 침을 탁 뱉었다.

"퉷! 서얼 놈들 김칫국이나 마시는군."

"더러운 핏줄이 더러운 말을 쏟아내는구나! 나라가 아무리 거꾸로 돌아가도 대과에 오랑캐의 참람한 말이 나올성 싶더냐?"

그러자 서자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통령 대감께오서도 얼자 출신이신데 감히 대감을 모욕한 것인가! 저 절두산에서 목잘리는 역도들과 한패더냐?"

"서얼이 더럽다고? 서얼을 만드는 네놈들 좆이 더 더럽다!"

평소같으면 모욕을 당하더라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을 자들이 급기야 대어들자 유생들은 당황했다.

어느틈엔가 공고한 귀천의 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왕족이라 할지라도 조용히 사약만 받아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원록에서 이름이 파여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했다는 이유로 공개처형이 시행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종친들이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장면을 매일 똑똑히 지켜보던 이들은 더이상 양반이라 할지라도 천상 위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얼자가 정승이 되고, 중인이 참판이 되고, 단지 유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이라도 대성한다면 출세하는 세상이다.'

지금까지 이어진 일단의 정국 속에서 충효가 흔들리고, 사대와 유학이 흔들리고, 신분제에 대한 의구심이 솟아난다.

혹자는 정학(正學)이 무너지고 귀천이 뒤집히는 일에 한탄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들리기 시작한 질서보다는 거기에서 떨어질 콩고물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러기에 난세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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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조는 대외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무신들이 대부분 장악한 조정은 더욱 그랬다.

"내부의 사정은 대개 정리가 되었으나, 문제는 명나라이오이다. 통령 대감께서는 어찌하실 작정이신지요."

이완의 물음에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숭정제는 이자원을 책봉함으로써 내전을 유도했고,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날렸다.

어차피 이자원 역시 이를 고작 수년짜리 휴전으로 여기고 있었던 터였으나, 당장 가도의 무역이 끊어지게 되면 골치가 아파진다.

VOC는 이젠 대일 무역보다 대조선 무역에 치중하는 중이었고, 그것은 대개 명과의 중계무역에 힘입은 결과였다.

거기다 명이 매년 보내는 제사비도 있고, 아직까지 명목상으로 명나라는 조선의 상국이다.

그렇기에 흉중에 품고 있던 생각이 어떻든, 당장 명과의 전쟁을 선언하지는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자원은 신하들을 둘러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명을 멸할 것이오."

"······!"

무관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놀란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송산에서의 싸움을 거치며 명에 대한 사대가 말끔히 씻겨내려간지 오래.

명은 조선의 적, 혹은 재정을 털기 위한 금고에 불과했다.

"제신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자원은 침묵으로 동의를 표한 무신들 대신 문관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들은 이자원의 한양 입성과 대숙청으로 한층 소극적이 되긴 했으나, 그 말 자체에는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이자원을 책봉한 것은 그야말로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숭정제야 인조반정을 찬탈 그 이상 그 이하로 여기지 않았기에 별로 와닿지 않았을 듯 하지만, 막상 일대 내전을 겪은 조선에는 반명 감정이 크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이미 황제는 덕을 잃었사오이다. 제 나라도 다스리지 못해 안으로 썩어들어감이 몹시 심한데다, 제일가는 충량한 번국인 이 조선을 멸하려 드니 어찌 제대로 된 임금이라 하겠소이까. 예로부터 잔적한 이는 임금이 아니라 필부에 불과할 뿐이라 했으니, 대군을 일으켜 천명을 새로이 해야할 것이오이다."

송시열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말했다.

"천명을 새로이 한다함은?"

이자원이 묻자 송준길이 말을 받았다.

"황친 중에서 택현하여 그를 세우고 군대를 두어 대국의 스승이 되는 것이······."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시열이 그것을 가로챘다.

"중원의 정세를 보건대 천명은 거기 있지 아니하오. 주씨 천자를 세우는 것은 불가하외다."

"허, 허면?"

송준길이 놀라 묻자 송시열이 말했다.

"주나라의 문물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은 우리 조선 밖에 없소이다! 마땅히 조선이 중원으로 나아가 건원칭제(建元稱帝)하여야 할 일! 그렇기에 통령 대감께서 명을 멸(滅)한다 하신 것이오!"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아예 중원을 통째로 차지하자는 말이 아닌가.

송시열은 쐐기를 박듯 소리쳤다.

"조선은 제국(帝國)이 될 것이외다!"

< 새로운 나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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