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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2화 (182/213)

< 저주 - 수정 완료 >

곳곳에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전투 전부터 상부에서는 민가에 손을 대지 말라고는 명령을 내려놓았으나, 병졸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역적'으로 지목된 자들의 거처에는 거리낌없이 손을 대는 모습이었다.

"군율을 어기는 자는 즉참하라는 명이다. 모든 논공과 행상은 전투가 끝난 뒤 이루어질 것이다."

이사룡의 말에 신류가 물었다.

"야인 병사들이 특히 이런 행태가 심한데 어떻게 하오이까. 즉참의 명은 받았으되 보통 일이 아닐듯한데······."

과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런 행태가 눈에 띄었다.

"이놈들이."

이사룡은 씩씩거리며 다가가 역적의 여인네들을 겁간하려 드는 오랑캐들을 걷어차버렸다.

"군율은 언제나 엄히 세워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즉참을 명하였으니 다음부터는 망설임없이 베어라!"

"알겠사오이다."

초관 신류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미친듯이 칼을 휘둘렀다.

'차라리 오랑캐랑 싸우는게 낫겠군.'

신류는 여러 싸움에서도 공을 세웠지만 이처럼 기분이 더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야인과 왜인, 한인들은 자신들도 이 나라 조선에서의 입지를 다지려는 듯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역도'들을 도륙냈지만, 자신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잘못이야 윗놈들이 한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놈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본래 산성에서 살던 백성들은 또 무슨 죄가 있고.

"저기 한놈이 도망가오이다! 쫓으오리까?"

잽싸게 비탈을 굴러떨어지는 자를 보며 병사가 소리치자 신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었다. 눈 앞의 적에게나 집중해라."

===

"하, 항복하겠사오이다."

"죽이지만 말아주십시오!"

봉림대군이 임금을 끼고 남한산성에 들어온 탓에 같이 입보한 종친이며 대신들도 부지기수였다.

"너희는 역적 이호의 주구(走狗)들로 반역에 가담하여 임금을 핍박하고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어찌 살려둘 수 있겠느냐!"

허응선은 그리 일갈했다.

그가 비록 훈련도감의 초관이라 하나, 여기 모인 대소신료들 가운데 그보다 관등 낮은 자가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허응선의 태도는 거리낌이 없었다.

"모든 것은 역적 이호가 시킨 것이오이다."

"소관들의 본의는 그것이 아니었으니 부디 도원수 대감께서는 이런 사정을 봐주어 주십시오."

그렇게 매달리는 이들이었지만 이자원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들을 모두 단단히 구속하게만 했다.

"절의 없는 놈들."

허응선이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한패가 되어 역적질을 할 때는 언제고 인제 대세가 기울어버리자 서로 책임을 떠미는구나!"

허응선은 서둘러 이동 중인 이자원의 뒤를 쫓아 보고했다.

"죽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입보해있는 종친과 신료들을 거의 사로잡았사오이다. 도성으로 압송하오리까?"

"그리하도록."

이자원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또 가도군이 김포까지 다다랐다고 하온데."

이자원은 봉림대군이 무사히 강화도로 들어갈 경우를 대비코자 심기원에게 사선(沙船) 여러 척을 거느리고 남하할 것을 명했었다.

박철균과 황익이 제 역할을 다해줌으로써 결과적으론 필요없게 되었으나, 심기원에게 시킬 일은 있었다.

"심기원의 부총병 직을 거둔다. 이제 조정으로 들어오라고 전하라."

현재 심기원이 맡고 있는 직은 가도 부총병이었으니, 그것을 거두는 것은 가도 총병인 이자원의 권한이 맞았다.

그러나 대비와의 아무런 교감없이 심기원을 조정에 들어앉히는 것은, 이자원이 이제 이 나라를 완전히 틀어쥐었다는 확신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끄아악!"

이자원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남한산성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서 역적 이호의 죽음을 산성에 알리고 전투를 끝내도록 하라."

"예, 대감."

저 멀리 연무관이 보였다.

그의 가족들도 그곳에 있을 터였다.

이자원은 다시금 불쾌한 기분이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을 서둘러 몰았다.

===

"적들이 발악하는구나."

박철균은 뜻밖의 증원에 중얼거렸다.

적의 주력은 거진 쓸어버리고, 이제 완전히 진압의 단계로 접어든줄 알았던 터에 군관 수십 명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이미 산성이 깨진 이상, 아니 그 전에 속수무책으로 산성에 갇혀버린 이상 이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지막으로 싸우려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잔병(殘兵)의 발악이라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휘리리릭!

"적들이 화살을 쐈사오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귀곡성(鬼哭聲) 같은 화살 소리만은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눈 먼 화살에 재수없이 맞은 마병이 떨어져 내렸다.

"이 개같은 역적들이!"

정초군들은 동료의 죽음에 분노했다.

싸움에 난입하자마자 공격을 가해오는 적들에게 손속을 보아줄 필요는 없었다.

"비켜라!"

미친듯이 말을 몰아 눈 앞을 가로막는 수어청 병력들부터 짓밟는 정초군이었다.

군관 송의영은 황급히 칼을 휘둘렀지만 맨몸으로 정초군의 돌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 우직

뼈가 짓이겨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곧 사방의 함성과 신음소리에 묻혀버렸다.

"나, 나리······."

놀라 다가간 병사의 목이 정초군의 칼에 맞아 떨어졌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 막 오르기 시작한 전투의 흥분에 날뛰고 있었다.

"흐, 흐익!"

"나리가 죽었다!"

"비켜, 이리로 온다!"

수어청 병사들은 송의영의 죽음을 목도하자 서로를 밀치며 도망가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정초군은 그들의 등에 무자비한 날붙이의 세례를 퍼부었다.

재빠른 자들은 돌아서 도망치는 대신 서둘러 엎드렸으나 정초군은 더러는 그마저도 모른척 쓸어버렸다.

"쓸데없는 짓 말고 증원된 적부터 쓰러트려라!"

박철균의 명령이 있고서야 정초군은 무너져내린 수어청 전열을 그대로 돌파, 지원온 호위청 군관들에게 달려들었다.

일신의 무용(武勇)만으로는 이들 역시 삼군문에 뒤지지 않겠으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전세를 바꾸겠는가.

특히 기병과 보병의 싸움이라면 웬만해서는 질 수가 없다.

어둑한 전방에서 한 덩어리로 모여있는 인영(人影)을 향해 정초군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잠깐, 잠깐!"

박철균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의아함을 느낀 그가 돌아보자, 투구가 반쯤 벗겨진 채 달려오는 황익이 보였다.

산에서 말을 급히 몬 모양인지 짐승의 입가에는 거품이 피어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별장은 저 모양이구나.'

뒤돌아본 마병들은 모두 속으로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무관에 귀한 분이 잡혀있네! 함부로 싸움을 벌여서는······."

황익이 무어라 외쳤지만 이미 소음에 파묻힌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들렸다 하더라도 이미 관성에 실린 정초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순간, 구름에 가려져있던 달이 휘영청한 모습을 드러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세는 아버지가 도원수요, 외할아버지가 우의정이요, 사촌형이 임금인, 지고한 벌족(閥族)의 자손이었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역적의 자식이 되어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었으니 제아무리 여섯살난 안세라 해도 이런 영락(零落)에 비감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고생은 지금 이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 호위군관들은 거친 손길로 가족들을 붙들어 두었다.

안세는 몸부림쳤지만 성인 남성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 촤라라락!

이쪽에서 쏘아낸 화살이 일제히 저리를 덮치더니, 앞에서 마구 깨부수는 소리와 기이한 비명이 들려왔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안세는 그것을 두려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어느 틈에 앞의 사람들이 마구 무너져내렸다.

"적도들을 토벌하라!"

커다란 말이 잔뜩 투레질을 하며 달겨들었다.

그저 큰 짐승으로만 여겼던 말이 그리 무서운 동물인줄은 처음 알았다.

도성에서 이따금씩 보던, 수레 따위나 끄는 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동만주에서 사들여와 삼군문 전체가 널리 쓰고 있는 전마(戰馬)는, 단순한 축생이 아니라 하나의 맹수였던 것이다.

그 맹수에 올라탄 인간들 또한 맹수였다.

다른 생명을 살육하기 위한 능력과 의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니 맹수가 아니면 무어라 하겠는가.

안세는 눈 앞의 사람들이 쓰러지는 광경을 보며, 그도 모르게 직감했다.

그 다음은 자신이 될 것이란 것을.

"흑."

그는 딸꾹질을 삼켰다.

군자는 어느때에나 당황해서는 안된다는 외조부의 가르침을 익히 들었던 터였다.

그러니, 저 태산같은 무리 앞에서도······.

"안돼!"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세는 순간 어머니가 자신과 동생을 푹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 두두두

달려온 말들이 그들 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는 동생을 끌어안고 귀를 푹 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차 땅을 울리던 진동이 가라앉고, 귀를 파고 들던 굉음도 잦아들었다.

귓가에 희미한 외침이 들려왔다.

"······별장 영감······!"

안세는 서서히 눈을 떴다.

어느새 그의 조그마한 등에는 무게가 가득 실려 있었다.

자신들을 안고 있던 어머니의 몸이었다.

희미하게 뜬눈에는 불타는 세상이 가득 담겼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외쳤다.

"도원수 대감 납시오!"

===

이자원은 백마를 몰아 천천히 다가갔다.

시체가 가득 널려있었다.

칼맞아 죽은 자들, 내장을 다 드러내놓고 혀를 빼문 자들, 연기에 질식하거나 불길에 타죽은 자들.

전생이든 현생이든 이자원은 이런 광경을 질리도록 보았다.

그가 거쳐온 시산(屍山)과 혈해(血海) 가운데 아무런 사연 없는 주검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러니 이자원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는 팔뚝으로 동생을 안아든채, 그 어미의 품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에게.

이자원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인간 세상에서 무슨 지옥도가 펼쳐지든 상관없이, 하늘에 깔린 별들은 언제나 그렇듯 제각기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자원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불규칙한 걸음걸이로 아들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발 밑에서 누워 쓰러진 호위군관 하나가 꿈틀거렸다.

박철균은 그것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도원수 대감!"

그러나 외침보다 먼저 군관이 반쯤 일어서 달려들었다.

"위험하오이······."

그와 동시에, 이자원의 칼집에서 천지검이 뽑혔다.

- 촤악!

뽑힌 환도가 군더더기없는 움직임으로 군관을 갈랐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을 터.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군관은 털썩 주저 앉았다.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이자원은 피를 뒤집어쓴 채 아들을 조심스레 죽은 아내의 품에서 떼어냈다.

"아, 아버님."

안세가 멍한 얼굴로 그에게 안겼다.

"왜······."

벌어진 일련의 일에 대해 의문을 품은채 그는 이자원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볐다.

이제 남한산성 전역이 완전히 토벌군의 손에 떨어진 듯, 여기저기서 승전보가 들려왔다.

전투의 끝은 언제나 흥겨운 법이다.

"만세(萬歲)!"

"만세!"

멀찍이서 만세가 울려퍼졌지만 이자원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이 중령, 미안해.

그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 내가 왔을땐 이미······.

"박 별장."

한참 침묵을 지키다 내뱉은 이자원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냉정했다.

"예, 대감."

박철균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채비를 하라."

그는 다시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한창 울음을 터뜨리다 잠든 딸에서 시선을 돌리자, 눈에서 빛이 사라진 아들이 보였다.

이자원은 잠시 할말을 잊은채 그 눈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눈이었다.

이자원은 치솟아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 저주 - 수정 완료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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