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1화 (181/213)

< 다시, 남한산성 (4) - 수정완료 >

아비규환이었다.

노도처럼 몰려드는 오랑캐들 앞에 수어청 병사들은 무력했다.

사기마저 크게 떨어진 판이었으니 한번 성문이 돌파되고 나자 그들은 줄줄이 항복했다.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자들, 어설프게 저항하다 창칼에 맞아 쓰러진 자들, 그리고 벌벌 떨며 땅에 엎드린 자들.

조을동은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찼다.

"같은 조선인끼리 이게 무슨 짓인가 말이야."

"죽고 죽이는 싸움터에 그런게 무슨 상관이 있겠수."

조선인이든 오랑캐든.

자기 편이면 같이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어찌보면 가장 명쾌한 해답이었다.

그렇게 마구 적을 쳐부수며 산성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던 조을동에게 저멀리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분위기로 보건대 제법 높아보이는 사람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사로잡을깝쇼?"

"저쪽으로 가면 현절사(顯節祠)가 아니냐. 지금은 행궁으로 가는 것이 급하다."

현절사는 산성에 청군이 진입했을 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김상헌을 기리려 건립한 사당이었다.

행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제법 거리가 있으니 저쪽은 다른 병사들 몫으로 남겨두자는 조을동이었다.

가장 먼저 확보해야할 사람은 임금이었으니.

===

"어느쪽으로 가시겠사오이까."

남문인 지화문으로 들어선 이자원을 향해 군관이 물었다.

이자원은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왼쪽으로 접어들면 행궁인가."

"예, 우리 군사들이 이미 그리로 향했사오이다."

"인질들은 어디 있다더냐?"

"동쪽 연무관에 잡혀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오이다."

"······도원수 대감?"

이자원이 입을 다물고 멈춰서있자 병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띄었다.

'누가 보더라도 우선순위는 임금의 신병을 확보하는데 있겠지.'

이자원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멀리 연무관을 훑고, 이내 행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허겁지겁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원수 대감!"

'황익인가.'

도원수가 몸소 움직이는데 따라붙지 않을 수 없으니 서둘러 이자원의 뒤를 쫓아온 황익이었다.

"행궁으로 가실 작정이시오이까."

말이 없자 황익은 서둘러 이자원의 안색을 살폈다.

"행궁으로······ 가셔야지요?"

도원수가 임금을 직접 구출하는 그림이 가장 좋다.

'왜 여기에서 망설이는가!'

황익은 속이 탔다.

만에 하나 임금을 놓치기라도 하면 일이 꼬인다.

그렇게 굴러간 눈덩이가 자신을 덮칠지 누가 알겠는가.

결국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들으니 인질이 연무관에 잡혀있다던데, 소관은 그곳으로 가겠사오이다. 대감께서는 어서 행궁으로 움직이시지요. "

황익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렸다.

마병들을 데리고 서둘러 움직이고 있을 때,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 별장."

설마 명령없이 움직이는 것을 책망하는 것인가.

자신이 도원수의 의중을 잘못 읽었을까.

'겍.'

황익의 뒷덜미가 순간 서늘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부탁하마."

황익은 말없이 코를 긁적였다.

===

"도원수 대감 행차시다!"

"모두 길을 열어라!"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지만 군관들이 내뱉는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가 길을 비켜서 그들의 도원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미 행궁으로 가는 길은 정리가 된 상황.

이자원은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행궁을 향했다.

그때 반대편에서 우르르 한무리의 군사가 쏟아져 내려왔다.

그 앞에는 칼을 뽑아들고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봉림대군이 있었다.

"오랜만이오."

이자원이 인사를 건넸지만 봉림대군은 응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주상 전하를 손에 넣으러 온 것이오?"

"역적의 손에서 구해내기 위해 왔소."

두 사람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봉림대군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백마에 올라탄 이자원은 위에서 아래로 그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이자원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형세였으리라.

원래 역사에서는 중흥의 명군이 되었을 자였으나, 그 길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이자원이 조선에 왔을 때부터.

눈 앞의 봉림대군은 이역만리 심양에서 인고의 시간을 다지다, 십수년의 준비기간을 딛고 즉위했을 효종과는 다른 사람이라 보아도 좋으리라.

봉림대군은 번득거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자원."

그의 속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님은 너를 믿었느니라. 헌데 너는 어찌하여 그것을 배신하였느냐."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배신이란 서로를 신뢰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자신과 고종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을 뿐.

고종의 심경이 변하여,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어떤 믿음을 보냈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줄 하등의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의 목적은 너무나 달랐으니까.

그러나 이자원은 이런 말을 꺼내는 대신, 봉림대군의 정곡을 찔렀다.

"어린 임금과 대비를 유폐하고 정사를 농단한 것은 배신이 아닌가? 나는 그것을 징치하기 위해 왔을 뿐."

봉림대군은 먼저 대비가 자신을 치려한 정황, 이자원의 수상쩍은 행동이나 그 혈통에 대해서 쏘아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뭐라 변명하든, 결국 패한 그는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길밖에 없으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봉림대군은 환도를 이자원에게 겨누었다.

이자원은 백마를 몰아 그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가 물었다.

"인질들은 연무관에 있는가?"

이자원의 물음에 봉림대군이 콧방귀를 뀌었다.

"인질, 인질들 말인가? 너 같은 자가 식구를 돌아볼줄도 알던가?"

이자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봉림대군은 칼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었다."

- 스릉

"커헉······!"

천지검이 봉림대군의 가슴을 찔렀다.

이호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대감, 이 자리에서 죽이실 필요는······."

"살려놓을 필요도 없겠지."

이자원은 냉혹하게 말했다.

"임금을 모셔라."

훈국 병사들은 그 명령에 한치의 망설임없이 행궁으로 뛰쳐들어갔다.

봉림대군은 종친들의 '의병'들을 끌고 왔으나, 그들은 봉림대군이 참살당하는 광경을 보자 전의를 잃고 주춤대며 물러났다.

훈국 병사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행궁으로 들어가 임금을 들쳐메고 나왔다.

"히, 히끅······."

자다깬 임금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좀 더 정중히 모시라 명령할 수는 있겠으나, 이자원은 딱히 그리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저 아이는 임금이되 더이상 임금이 아니었으니.

"연무관으로 간다."

이자원은 임금을 확보하는 것을 보며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

적비는 여기저기 치솟는 연기와 불길을 보며 중얼거렸다.

'잘 타는구나.'

마치 북경에 있던 양부의 집처럼.

추국을 위해 의금부에 갇혀 있다 남한산성으로 같이 끌려온 그는 포탄에 맞아 축대가 무너진 가옥에서 어렵잖게 탈출할 수 있었다.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닌가 보군.'

사실상 봉림대군을 등떠밀어 정변을 일으키고, 낙양성에게 밀서를 보낸 것으로 그는 역할을 완수했다.

'봉림대군이 이자원을 죽이는데 성공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내전을 좀 더 끌어주었다면 좋았으련만.'

봉림대군이 성공하면 이자원은 죽는다. 그리고 기껏 장악한 요동은 다시 혼란에 빠지리라.

이자원이 봉림대군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으면 숭정제는 몰락한다.

어느쪽이든 명을 야금야금 좀먹어들어가는 적들을 제거할 수 있다.

가만 놔두면 말라죽어갈 명나라의 절반이라도 보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대로 죽기에는 무언가가 아쉬웠다.

적비는 얼굴을 감싼채 길을 더듬어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산성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게섯거라!"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어색한 조선어에 슬쩍 돌아보니 요동(遼東), 두 자가 적힌 깃발이 보였다.

이자원을 따라온 요동군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적비가 발을 우뚝 멈춰선 것은, 다른 것 때문이었다.

상대방 역시 적비를 보고 무언가를 눈치챈 듯, 다가오지 않고 멈췄다.

"당신은."

원문필이 중얼거렸다.

휘하에 요동군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원문필은, 비록 얼굴의 반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적비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자를 사로잡아라!"

원문필이 명령했다.

요동군은 상관의 명에 소리를 지르며 적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적비는 망가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수어청 병사들은 연무관을 맡아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는 대개의 인질들이 하옥되어 있었기에 성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도 일정 수준만큼은 반드시 주둔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호위군관들이 철걱거리며 다가와 수어청 병사들에게 길을 열라 명했다.

"봉림대군 대감의 명이니라. 역적의 식솔들을 데려 오라고 하셨느니라."

"수어사 영감께는 따로이 들은 말이 없사오이다."

"이놈! 봉림대군께서는 영의정부사로 나라의 전권을 대리하는 분이시거늘 수어사의 명이 문제이더냐!"

그러나 병사들은 완강했다.

단지 데려오라는 명령 뿐이지만 무슨 짓을 벌일지 그들 역시 감으로 알고 있는 터.

이미 대세가 기운 판에 그리되면 어찌하겠는가.

"쳐라!"

호위군관들이 환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저들을 들여보내서는 안된다! 어서 막아라!"

수어군관의 외침에 병사들은 서둘러 창을 내세워 그들의 돌입을 저지했다.

"크윽!"

군관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병사 하나의 목을 쳤다.

옆에 서있던 병사가 놀라 창날을 그리로 돌렸으나 이미 군관은 몸을 뺀 뒤였다.

호위군관들은 그렇게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수어청 역시 오군영의 일원으로 제법 정예한 훈련을 받았다고 하나, 아예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경호를 맡던 호위군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수어청 병사들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현격한 기량차를 이기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이자원의 식솔들을 끌고 와라!"

호위군관들은 우르르 쏟아져들어갔다.

격렬한 전투와 기울어가는 전세로 흥분한 군관들은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갇혀있던 유주와 아이들은 머리채가 잡힌 채 바깥에 내동댕이쳐졌다.

"하아하아, 개같은. 나리, 어서 이동하시지요."

부하가 씨근덕거리며 말하자 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봉림대군은 임금을 옮기기 위해 행궁으로 갔을 것이다.

사방에 이자원군이 깔린 판이었으나, 어차피 이대로 가면 죽은 목숨.

"이놈들을 앞세워서 길을 뚫어라!"

군관은 명령했다.

===

어둑해진터라 피아식별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박철균은 마구 적을 짓밟으며 이동했다.

- 타앙!

"커헉!"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마병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박철균은 그쪽으로 말을 몰아 편곤을 휘둘렀다.

- 퍼억

호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적병 하나가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어둠에 숨어 조총을 쏜 것이다.

"항복치 아니하는 자는 인정을 봐주지 마라! 이미 성이 거진 박살났거늘 이호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자들은 역도 중의 역도들이다!"

훈국 병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항복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지만, 종친들이 일으킨 '의병'이나 호위청 군사만큼은 그리하지 않았다.

의리인지 아니면 어차피 항복해봤자 죽을 것이란 생각 때문인지.

"이야아!"

창을 들고 달려드는 병졸의 머리통을 마병이 꿰어버렸다.

아무리 적이 저항한다 해보았자 전쟁의 베테랑인 그들을 쉬이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앞 어영군 쪽은 의외로 제법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적들 사이에 정예 병력이 섞여있다 하나 어영청은 훈국 다음가는 부대였으니, 박철균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우리군이 당하고 있사오이다!"

"서둘러 지원하라! 적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이로다!"

박철균은 마병들을 거느리고 그리로 짓쳐들어갔다.

마병들이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어영청 병사들을 지원키 위해 뛰어들자 함성이 터졌다.

"정초군이 왔다!"

"와아아!"

정초군의 합류로 어영청은 한껏 기세가 올랐다.

삽시간에 적병을 쓰러뜨리는 그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수어군관 송의영은 칼을 늘어뜨렸다.

나름 수어청의 정예들을 거느리고 분투했지만 여기서 끝인 모양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병사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군관 나리!"

"뭐냐?"

"뒤에서 지원이 오고 있사오이다!"

< 다시, 남한산성 (4) - 수정완료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