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80화 (180/213)

< 다시, 남한산성 (3) >

벌봉에서 날아온 포탄은 남한산성의 건물 여럿을 주저앉히고, 나아가 백성들의 사기마저 뚝 떨어뜨렸다.

"히익!"

"다시 이런 일을 겪을줄은······."

비격진천뢰 같은 폭탄(爆彈)이 아니라 단순한 철환이었기에 추가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군민(軍民)의 겁질린 심정은 쉬이 다독거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쿠궁

옥에 갇힌 유주에게도 그 소란은 뻔히 들려왔다.

착탄지와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이쪽이 무너질 위험은 없었지만 아이들은 불안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다.

유주는 서둘러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랬다.

그때 바깥에서 군관의 엄한 호령이 들려왔다.

"죄인을 끌고 나오라는 명령이다!"

유주는 급히 안세와 아기를 품에 안았다.

그렇잖아도 불안해하는 아이들이었으니, 어떻게든 달래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군관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들을 끌어냈다.

유주가 향한 곳에는 봉림대군이 있었다.

하룻밤 사이 몸을 일으켜 아버지를 참살한 원수이다.

그러나 봉림대군을 노려보던 유주는 옆에서 경평군이 지껄이는 소리에 고개를 그리로 돌렸다.

"너희가 살고 싶다면 네 지아비에게 편지를 보내 어서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 일러라! 어느 신하가 감히 임금 계신 곳에 포를 쏘아댄단 말이냐?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역적질이다!"

유주는 힘없이 웃었다.

이미 죄없는 아버지도 역적이라 몰아죽이고, 자신의 부군마저 역적이라 규정한 저들이다.

이제 와 새삼스레 그런 말을 꺼내는 저의는 빤했다.

"옛날 한 고조는 광무(廣武)에서 부모가 사로잡힌 것을 보았어도 항복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뭇 사람이 의복(衣服)처럼 여기는 처자이겠습니까.

다만 이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 부디 이 목을 베시더라도 아이들만은 보전하여 주십시오."

유주는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봉림대군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그 역시 여러 딸들과 간신히 얻은 아들이 있었다.

만약 자신의 아내가 자식들을 끌어안고 이런 말을 한다 생각하면······.

그러나 지금은 아귀들끼리 다투는 싸움의 와중이며, 이미 이 집안과는 원수진지 오래이다.

측은지심이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역적의 혈육인데 어찌 손속에 사정을 둘 수가 있겠는가! 대감, 어서 이자원에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지 않으면 친히 그 일가의 목을 구경시켜줄 것이라 하십시오!"

영풍군이 분개해서 외쳤다.

그는 이자원을 욕하다 하옥된 일로 증오심이 충천해 있었다. 게다가 이리 독 안에 든 쥐가 된 판이니 독기가 가득 오른 상태였던 것이다.

봉림대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는 것이로구나."

유주는 눈을 감았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그런 체념을 보며 떨었다.

권력이란 짧게 피었다 지는 것.

언젠가 사세가 영락한다면 이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했다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유주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감!"

그때 최명길이 나섰다.

"이자원처럼 천하를 종횡무진하는 자가 가솔을 돌아보긴 하겠소이까. 애초에 역적의 식솔이라 하나 정식으로 처결하지 않고 함부로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올시다."

최명길은 완성군의 작호 외에는 지금 별다른 벼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야인이었으나, 그는 명망 높은 대신이었던데다 그간 목숨을 걸고 종사를 위해 협력해온 이였다.

"······저 여자의 머리칼을 베어 진중에 보내라. 그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봉림대군은 그리 명령한 뒤 몸을 휙 돌렸다.

수어청 병사들이 유주의 산발한 머리채를 잡아채고 칼로 그것을 끊어냈다.

최명길과 이시백은 그것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수어사."

최명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대감."

"형세가 어떻게 될 것 같소?"

이시백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문관인 소관이 보기에도 모든 것이 끝났사오이다. 설령 이자원의 가족들을 죽인다 해도 멈추지 않겠지요."

최명길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자신이 이 나라 종사를 위해 행해오던 일들은 물거품이 되었다.

역적인 봉림대군을 위해 움직이면서까지 지켜오던 것이, 이자원의 손에 끝장나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산성의 백성들이 모조리 도륙당하지 않으려면 이자원의 일가를 살려야 하오."

"그것은 완성군 대감의 뜻이오이까?"

"그렇소이다. 나에게 수어사에게 명령할 권한은 없으니, 모든 것은 수어사의 결심에 달렸소."

"이제 와 대군을 배반하고 투항할 수는 없겠지요."

이시백이 말했다.

고종의 알 수 없는 미움을 받아 귀양을 떠났다가, 거기서 풀려난 뒤에도 조정에 복직하지 못하고 있던 이시백이었다.

그런 그를 불러다올린 것이 봉림대군이었으니, 이시백 역시 대군을 통해 수어사의 관직을 받든 셈이다. 그 직책을 대군을 치는데 쓸 순 없지 않은가.

"다만 무슨 일이 생기면 보호하도록 하지요."

아마 이런 상황이 오래가진 못하리라.

두 사람은 그 점에서만큼은 동감하고 있었다.

===

운제가 성벽 사방에 걸렸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막아내기 위해 성첩에 괴어놓았던 돌덩이와 통나무, 그리고 끓는 기름이 끊임없이 투하되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넉넉히 비축해놓은 물자라도 동이 나기 마련인 법.

"누가 끓는 기름 좀 더 가지고 오게!"

"온 병사들이 성첩에 붙어있는데 누가 가서 가져온단 말이오?"

병사들이 지쳐서 쓰러지고, 혹 날아온 궁시나 총탄에 맞아 영영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빈틈이 생긴 성벽으로 적병들이 기어올랐다.

"다시 여기에 올줄은 몰랐구나!"

만주인 병사 하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팔기들은 이 험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을 기억했다.

나름대로 공성에 일가견이 있는 그들이었지만 남한산성의 산세와 추위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게다가 이곳은 가장 쓰라린 패배의 기억으로 남아있었으니, 본래라면 근처에도 오기 싫은 곳이었을 터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는 충천해있었다.

숫제 조선군과 협력하여 남한산성을 다시 공략할줄은 꿈에도 몰랐던 만주인들이었다.

"모두 죽여버려라!"

그 외침에 성벽에 올라선 만주족 병사들이 창칼을 휘둘렀다.

"저들은 가, 같은 조선군이 아닌가? 왜 야인 놈들이 끼어있는게냐?"

"이쪽은 왜놈들이다!"

수어청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 훈련도감을 비롯한 삼군문이 주축이 되어 떠났던 이자원군은, 그 구성이 전혀 뜬금없이 변해있었다.

허여멀건한 남만인이 화포를 쏘아대고, 한어(漢語)로 지껄이는 요동군이 충차를 끌고 성문을 쳐댄다.

그들 모두가, 팔도 도원수의 깃발 아래에 한몸처럼 싸우고 있었다.

"아직 희망은 있소이다."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있는 산성을 내려다보며 능봉군 이칭이 말했다.

그는 촌수로는 멀었으되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항복을 위해 가짜 왕제로 삼았던 적이 있으므로 지금까지도 나름 종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저들이 많은 병력으로 성을 공략하고 있으나, 아직 물자는 충분하고 성도 더 버틸 수 있사오이다. 호란 때에는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군은 포위를 뚫고 나가 근왕군을 불러왔지요!"

"그것을 해낸 자가 누구요?"

봉림대군의 물음에 능봉군의 말문이 막혔다.

"그야 당연히 이자원······이지요."

봉림대군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 않느니만 못한 말을 꺼낸 능봉군에게 종친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대감!"

송의영이 급히 뛰쳐들어왔다.

"남쪽의 암문으로 적들이 진입한듯 싶소이다!"

암문은 깊은 곳에 몰래 뚫어놓은 문으로, 비밀리에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당연히 같은 조선군인 이자원군이 파악하지 못했을리가 없기에 봉림대군도 그곳으로 병력을 빼둔지 오래였다.

헌데 그리로 적들이 들이치고 있다는 것은······.

"암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적병을 조우하자마자 항복한 것 같사오이다."

"누구를 탓하겠소."

저들에게 승산을 보여주지 못한 자신의 탓이 아니겠는가.

봉림대군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스르릉 뽑아들었다.

===

암문을 장악한 병력들은 곧장 남문으로 향했다.

성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철균은 안쪽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병사들을 채비시켰다.

"이곳을 다시 오를줄은 몰랐군."

남한산성의 남문은 병자호란 당시 위기에 빠진 성을 구하기 위해 이자원과 박철균이 피칠갑을 한채 진입한 곳이었다.

이제는 그곳을 떨어뜨리기 위해 오게 되다니.

성벽 너머에서는 싸움이 계속되는 모양인지 소란스러웠다.

성첩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안쪽의 부름에 하나둘씩 창칼을 쥐고 내려가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별장 영감!"

누군가의 외침에 박철균이 퍼뜩 앞을 쳐다보았다.

- 끼이익

육중한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암문을 통해 진입한 병력들이 기어이 남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진입하라!"

박철균이 명령했다.

"와아아아!"

우르르 쏟아져들어간 병력들이 한창 싸움을 벌이는 남문 쪽 수어청 병력을 덮쳤다.

"으헉!"

군관 하나가 말발굽에 채여 날아갔다.

그 위를 짓밟으며 정초군 기병들이 쇄도했다.

수어청 병사들이 미친듯이 칼을 휘둘렀지만 뛰쳐드는 병력을 막아서기엔 한참 밀렸다.

"항복하라!"

박철균이 반쯤 으깨진 군관의 목을 들어올리며 외치자 수어청 병사들이 질겁했다.

"너희는 역도에게 속아서 가담했을 뿐이다! 투항한다면 살려주겠다!"

그러나 병사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박철균은 그들에게 시간을 더 줄 생각은 없었다.

"항복할 자들은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짓밟아라!"

박철균의 우렁찬 외침이 사방에 퍼지자 그제서야 수어청 병사들은 줄줄이 항복하고 웅크렸다.

이자원군 기병들이 남문을 통해 산성으로 달려들었다.

===

이자원은 무너져내리는 남한산성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이 나라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재료가.

분명 기뻐해야할 일이건만, 그는 조금의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원래 감정이 마모되어버린 인간이니 그거야 그렇다 치자.

그러나 이 미묘한 불쾌감은 무엇인가.

- 대감은 이미 잃을 것이 없다 여기겠으나,

나지막한 유언이 귓가를 스쳤다.

- 종래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외다.

이자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 있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자원은 불타는 남한산성에서 눈을 떼고, 손에 쥔 한줌의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성에서 보내온 것이다.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

그는 당연히 한치의 망설임없이 거절했다.

애초에 도구로서 만든 가족일 뿐이다.

이미 쓸모가 다해버린 그들을 위해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들어줄 이유 따윈 없었다.

그러니 더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을 터다.

이자원은 잘린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황익."

황익은 갑작스런 이자원의 부름에 깜짝 놀라 답했다.

"예, 대감."

"훈국 마병들을 이끌고 산성으로 진입하라. 사람을 찾아야겠다."

이자원의 명령에 황익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익이 갑주를 주섬주섬 챙겨입던 그때, 이자원이 제지했다.

"잠깐."

이자원은 말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대감,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사온데······."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황익이 슬쩍 만류해보았지만 이자원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황익은 잽싸게 빠져나가 훈국 마병들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이 불쾌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흔들어 그것을 떨쳐내버렸다.

이자원은 묵묵히 환도를 찼다.

"도원수께서 친히 진군하신다!"

"역적 이호는 이제 끝장이구나!"

이자원이 나온 것을 본 병사들의 함성이 온 산하를 덮었다.

남한산성의 운명은 경각에 달해있었다.

< 다시, 남한산성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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