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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79화 (179/213)

< 다시, 남한산성 (2) >

상황은 최악이었다.

호위별장 신준은 말발굽에 밟혀 죽었고, 한성을 지키던 병력들은 흩어져 사라지거나 적에게 투항했다.

어가는 간발의 차로 산성에 들어왔다. 뒤쫓아온 적들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빈틈없이 죄어들어왔다.

원래 계획해놓았던 모든 것이 무너진 이상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선 한가지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화포를, 말씀이시오이까?"

봉림대군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화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한 사건을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한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라 하면 그것 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군이 오랑캐 황제를 격살한 예를 본받고자 하십니까?"

절망적이었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버린 대사건.

하지만 회군해서 남진하고 있는 상대가 바로 그 일을 저질렀던 장본인이지 않은가.

그자에게 화포를 들이대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이자원이 이미 화포로 했던 일이라면 우리가 하지 못할 것은 없다. 인조대왕의 혼령께서 계시다면 필시 일을 도와주시리라."

봉림대군은 나지막이 말했다.

순식간에 선택지를 모두 빼앗기고 산성에 들어오게 된 그였으니 이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홍타이지를 직접 죽여본 이자원이 실제로 사정거리에 들어올지도 의문이었지만······.

봉림대군은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든, 아니면 아내가 믿는 천주든 간에 지금은 대운(大運)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축년의 초하루 당시 그러했듯이.

'조선을 온통 삼킬 듯이 쳐들어왔던 황태극 역시 하늘의 도우심으로 죽었다. 진정 이 나라 조선에 천명이란 것이 남아있다면 한번의 기회는 생기리라.'

"대포의 수량은 많은가? 화약은 넉넉하고?"

"예, 대감. 지난 호란 당시 두 대왕께서 겪으신 어려움이 있기에 늘상 물자를 넉넉히 비축해두고 있긴 하오이다."

갑사창을 빼앗겨 곤란을 겪었던 고종은 항상 일정 수준의 식량을 남한산성에 비축해두고 있었다.

화약 등 전략물자 역시 마찬가지.

게다가 수어청과 총융청 병력의 합류로 병력은 넉넉했으니 버티고자 한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버티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대비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

세조가 기의했을 때는 명분이 나뉘어진 적 역시 없었고, 이징옥이나 반란 세력들은 전부 한성의 명령에 따라 토벌당했다.

병자호란 때에야 사방에서 인조를 구하기 위해 근왕군이 몰려왔지만, 이제와 그가 왕명을 내린다 한들 그들이 따르기나 할까.

오히려 대비가 이자원의 손에 넘어간 것을 빌미로 봉림대군을 임금 납치범 따위로 몰아갈 공산이 컸다.

차라리 이것으로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화포란 화포는 전부 성첩에 대어놓아라. 천자총통부터 자잘한 것들까지 모두 말이다."

봉림대군은 외쳤다.

===

남한산성에서 한창 병력들이 수성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이자원이 이끄는 본군은 한양에 입성했다.

"우리는 해방군이지 외적이 아니다. 약탈을 엄금한다."

조선 경군은 대부분 한성에 집을 두고 있었기에 약탈 따윈 애초 생각지도 않고 있었으며, 만주인이나 일본인 출신 병사들은 백성들의 정서를 고려해 한양 바깥에 머물렀다.

이자원은 곧장 창경궁으로 가 대비를 알현했다.

대비는 고작 몇달 사이 확 늙어보였다.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리라.

대비는 잠시 이자원을 떨리는 눈길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늦으셨구려."

"공사가 다망하였던지라."

은근한 책망이 담긴 말에도 이자원은 태연히 그리 대답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 이리 대비 마마를 구출해내었고, 조만간 역적 이호마저 몰아낼 터이니 대비께서는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시고 마음을 편히 하시옵소서."

대비는 이자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임금에게 응당 바쳐야하는 충성심이 그의 얼굴에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대비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제까지 부정해왔지만, 설마 폐주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사실이라 한다면.

"······난전 중에 주상의 신변에 변고가 생기기라도 하면, 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이자원이 혼란을 핑계삼아 임금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믿기 싫은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럴리가 있겠사오이까. 반드시 전하를 구출해낼 것이옵니다."

이자원이 말했다.

"내 도원수의 충심을 믿어도 되겠지요?"

그러나 대비로서는 다른 방안은 없었다.

역적 이호가 자신을 유폐해버리고 모든 권병을 쓸어가버린지 오래이니.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믿을 사람은 도원수 밖에 없소."

대비가 간원하듯 말했다.

"유주와 아이들 역시 역적이 남한산성으로 끌고 들어갔소. 우리는 실로 동병상련이나 다름없으니 같은 일가로서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겠소."

이자원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대비를 알현한 이자원은 곧장 본군을 이끌고 한강을 넘었다.

박철균과 황익은 남한산성에서 대치하며 적들이 바깥과 통하지 못하게 단단히 지키는 중이었다.

"훌륭히 일을 해내주었다."

이자원은 그들을 그리 치하했다.

박철균과 황익은 누구보다 빨리 전선을 돌파해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을 뿐만 아니라, 대비를 확보하고 한양을 함락했다.

봉림대군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그들 역시 공주 등 더 남쪽으로 파천하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충분한 성과였다.

적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으니.

"과찬이시오이다, 도원수 대감."

박철균이 말했다.

"하오나 적이 우리군 장수들의 식솔을 붙잡고 협박을 해대고 있사오이다. 도성에서야 소관이 한번 꾸짖어 물리쳤으나, 이제는 적들도 더 물러날 곳이 없으니 정말로 흉한 일을 저지를지 모르오이다."

박철균은 그리 말하며 슬쩍 이자원의 안색을 살폈다.

"······."

이자원은 침묵을 지켰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지세를 살펴야겠다. 벌봉에 오르자."

그 말에 여러 장수들이 놀랐다.

"벌봉에 말씀이시오이까."

"대감. 그곳은······."

벌봉은 남한산성의 동장대와 마주 보고 있는 봉우리로, 홍타이지가 정찰을 위해 올랐다가 포를 맞고 죽은 곳이었다.

홍타이지를 죽이고 이자원이 이름을 떨친 역사적인 장소.

"정찰이 필요하신게라면 소관이 대신 가겠사오이다. 굳이 도원수께서 친히 왕림하실 필요는 없으실 것이온데······."

유림이 말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분명 나를 노리고 있을 것이오."

"알고 계시다면 어찌하여 그리로 가실 작정이신지요."

황익은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말했다.

"천명이 누구에게 있는지 드러내기 위해서요."

싸우지 않고 적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낸다.

저들이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

이자원의 본군은 남한산성을 길게 포위하고 늘어섰다.

사방에 흩날리는 기치에 병사들은 잔뜩 질린 표정이었다.

어째 출발할 때보다 병력이 더 많아진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이곳을 올려다보는 오랑캐들까지 있었다.

"적이 군관 한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하였사오이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오!"

상원군 이상국이 외쳤다.

그는 원래 역사에서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순절한 인물로, 이곳에서도 아우인 진원군 이세완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이미 종사가 보전되느냐 마느냐하는 싸움이거늘, 항복 따위 허망한 말을 따를 수가 없소. 우리는 죽음으로 성을 지킬 것이오이다!"

진원군 역시 그리 말했다.

특히 고집세고 결기 있는 이 두 형제가 나서서 그리 외치자 죽상이 된 종친들 역시 이들의 말에 따랐다.

봉림대군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충량한 종친들이 이리 절의를 지키니 나 역시 목숨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열성조가 굽어보신다면 기필코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종친들의 이런 결연한 낯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 퍼퍼펑!

봉림대군이 항복을 거절하자마자 이자원군 측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온 것이다.

"어서 쏘아라!"

남한산성에서는 최선을 다해 응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숫자부터 밀리거니와, 훈련도감 측의 숙련도나 대포의 성능은 수어청의 그것을 한참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사격제원까지 운용하고 있는 훈련도감 포병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적의 대포가 망월대에 맞아 대장기의 기둥이 꺾어졌으며, 또 잇달아 성첩에 포환이 날아와 한 귀퉁이가 무너져내렸사오이다."

"군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사오니 모쪼록 한번 나가 적을 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그것은 적의 노림수이외다. 성문을 열고 나가면 반드시 적이 순식간에 들이쳐 성을 떨어트릴 것이오."

가타부타 말없이 듣고 있던 봉림대군이 명했다.

"빈 섬에다 흙을 넣어 무너진 성벽에다 쌓고 그 외로도 적이 침입해올만한 곳은 부지런히 수선하여 성을 굳게 지키라!"

모든 의사결정은 그가 내리고 있었다.

어린 임금은 행궁 한켠에 머무르며 멍하니 자는 것으로 소일했고, 누구도 그에게 명령을 묻지 않았다.

"이자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예, 대감. 오로지 군관 몇만 앞에서 왔다갔다할 뿐, 정작 이자원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사오이다."

봉림대군은 눈을 감았다.

가능성이 낮기는 하였으나, 결국 마지막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그때였다.

"이자원이 포병들을 데리고 벌봉에 올랐사오이다!"

옆에서 보좌하던 수어군관 송의영(宋義榮)의 말에 봉림대군은 눈을 부릅 떴다.

"사실인가?"

"그러하오이다!"

정녕 왔단 말인가.

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봉림대군은 그 담대함에 혀를 내두르며, 또한 절호의 기회를 내려준 것에 감사하며 동장대로 향했다.

벌봉에는 과연 벌써 포가 여러군데 방열되어 있고,

지세가 높아 정찰 뿐만 아니라 포격 역시 가하기 좋은 위치였던 것이다..

- 팔도 도원수 이자원

수놓은 기치가 온통 사방에 휘날렸다.

그것은 마치 이 나라 산하가 온통 이자원의 발 밑에 들어간 것만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봉림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 그리고 그 밑의 군관들과 일개 병사들까지도 그 모습을 보며 묘한 비감(悲感)을 느꼈다.

그리고 늘어선 대포 사이로, 이자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상이 사나운 백마(白馬)를 타고 벌봉에 오른 그는 흡사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 같았다.

"쏘아라!"

봉림대군이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외쳤다.

- 펑!

대군을 비롯한 신하들은 모두 그것이 이자원에게 적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날아간 포탄은 형편없이 골짜기에 처박혔다.

"다음, 다음 탄을 쏘아라!"

이 시대의 화포류는 장전 시간이 많이 걸리니만큼, 재장전할 시간은 없었다.

다른 천자총통에서 쏘아낸 포탄이 절벽 한 군데에 처박혔다.

"일제히 포격하라! 전 탄을 쏘아내라!"

- 퍼엉!

- 퍼퍼펑!

초연이 가득 뿜어졌다.

자욱하게 깔린 초연으로 시야가 보이지 않았지만, 포격 소리만은 쉼없이 울려 퍼졌다.

봉림대군은 계속해서 외쳤다.

"더 쏘아라, 더!"

"대감."

옆에서 최명길이 그를 부여잡았다.

어느 틈에 포격은 멈춰있었다.

한창 재장전 중이겠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초연이 걷히자 그제야 벌봉이 보였다.

핏자국으로 흥건할 것을 기대했던 그곳이지만, 착탄지는 형편없이 멀었다.

이자원은 포격 전과 다름없이 백마에 올라타 이곳을 당당히 굽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봉림대군은 떨리는 눈으로 벌봉을 바라보았다.

"대감, 황태극을 죽인 일은 일세(一世)에 한번 있을법한 일로, 운이 아주 좋거나 하늘이 도와야만 가능한 일이오이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옵소서."

"나도 알고 있소."

종친들이 곁에서 위로했지만 봉림대군은 멍하니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늘이 우리 조선을 버린 것이오?"

최명길이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병자호란 당시와 지금.

주체만 달라졌을 뿐, 하늘이 안배라도 해놓은 것마냥 정확히 똑같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처럼 달랐다.

마치 천명이 이자원에게 있다는 것처럼.

그 생각을 최명길만이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곳의 병사들 역시 홍타이지가 죽은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성공하고, 한번은 실패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두가 알고 있을 것 아닌가.

"방포하라."

그 모습을 보며 이자원이 명령했다.

이윽고, 벌봉에서 쏘아진 포탄이 산성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 다시, 남한산성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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