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78화 (178/213)

< 다시, 남한산성 (1) >

"이미 통진에 적병이 출현하였고, 인평대군 대감과 대비 마마는 달아나던 중 사로잡혔다 하오이다!"

최명길이 돌아옴과 동시에 들어온 소식에 봉림대군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적병의 진격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기에 혹시나 하여 말머리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유일한 희망인 최명길의 제안마저 가볍게 거절당한 상황.

그나마 그가 시간을 끄는 동안 도망칠 준비는 끝마쳤으니 다행일런가.

"대의멸친이라."

언제나 말은 쉽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을 내뱉는 것은 결코 허튼 말이 아니었다.

"적장은 이자원의 추궁도 두렵지도 않다 하던가?"

"도원수라면 해량할 것이라 하더이다."

박철균은 유주와 안세의 안위를 언급해도 여전히 싸늘한 눈이었다.

마치 이자원이 정말 어떻게 나올지 보고 싶은 것처럼.

"강화도로 가는 길은 끊겼고, 적은 정예한데 아직 우리군은 병력이 충분치 않다······."

도성을 지키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강화도로 딸려보낸 호위병력과 임진강 수비를 위해 출진시킨 병력 때문에 총융청의 정군(正軍)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양 도성은 지키기에 마땅치가 않사오이다. 병력 일부를 남겨두어 시간을 끌고, 그 틈에 남쪽으로 달아나시지요."

"남쪽이라면."

봉림대군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아챘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갈 곳은 한 곳 밖에 없었으니.

"남한산성(南漢山城) 말씀이외다."

그곳은 우리 사직이 한번 구해진 땅이기도 하거니와, 수어청 병력들이 지키고 있으니 든든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도성에도 수어청 병력이 일부 올라와 번을 서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남한산성 일대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이라."

결국 그곳에서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봉림대군은 눈을 부릅 떴다.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뫼시시오. 도성을 지킬 병력 일부만 빼놓고 모든 대신, 인질들과 함께 수구문을 통해 빠져나갈 것이오."

===

한양 도성은 수비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축조되었으되, 실전에서 그런 역할을 수행한 적은 드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이 남한산성으로의 파천을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선봉으로 달려온 북벌군은 화기가 그리 변변치 않았던지라 성벽만 단단히 끼고 군사들을 호령하면 적어도 어가가 파천할 때까지는 시간을 끌지 않겠는가.

적이 파천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자 그대로 어기(御旗)마저 올려놓은 신준이었다.

그의 손에는 땀이 잔뜩 배여있었다.

'어찌하자고 그런 일에 가담을 하였느냐!'

병으로 앓아누웠던 아버지는 자신이 봉림대군의 거사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자 더욱 위중해졌다.

아버지도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자신처럼 하룻밤만에 정권을 장악했으니 성공한 이상 이런 꾸중을 들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신준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때는 아버지가 왜 그리 화를 내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되었다.

대신들은 이자원의 군대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제 집에 칩거하여 대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저자 백성들의 여론마저 좋게 보아도 관망에 가까웠다.

총융청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이 이끌던 호위청처럼 정변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니 더욱 그러했다.

"창의문 바깥에 적이 들이닥쳤사오이다!"

"내가 직접 가겠다!"

신준이 성벽 위로 올라서자 훈국과 정초군, 야인 기병이 가득 늘어선 광경이 보였다.

"역적들아! 감히 오랑캐와 손을 잡고 도성을 범하려 드느냐!"

봉림대군이 민심을 얻었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오랑캐에 대한 증오는 도성 백성들에게 뿌리깊은 터. 신준은 이런 식으로 여론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맨 앞에 서있던 장수는 대답 한번 하지 않고 활시위에 살을 먹인 뒤, 그를 향해 쏘아냈다.

"이크!"

신준은 급히 고개를 숙여 회피했다.

문답무용.

어차피 싸워야할 것 가타부타 말로 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와아아아!"

그것이 신호였는지 기병들이 일제히 창의문을 향해 돌격했다.

- 쿵, 쿵, 쿵

"조총을 쏘아라! 저들이 문을 돌파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아니된다!"

신준이 외쳤다.

화살이 이리로도 비오듯 쏟아졌지만 신준의 명에 병사들은 제법 잘 따라주었다.

도성의 각 문은 엄히 걸어잠그고 장애물이 될 집기들을 가득 쌓아두었던 터.

돌파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실제로 도끼로 문을 거푸 찍어대던 적병들은 이쪽의 공격에 하나둘 쓰러져갔다.

제아무리 흉포한 야인들이 문에 부닥친다 한들 소용없을 것이었다.

신준은 이대로 다만 반나절이라도 버텼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전투가 지지부진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쯤이었다.

"별장 영감!"

다급한 목소리에 신준이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유, 유생들이 궐기하여 숙정문 쪽으로 가고 있사오이다!"

"무엇이?"

숙정문은 한양의 북대문이요, 이곳 창의문과도 그 거리가 멀지 않다.

유생이 궐기하여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은 숙정문을 열어젖히겠다는 뜻이 아닌가.

"······너희는 다만 이곳을 굳게 지키라!"

신준은 황급히 말을 달렸다.

말을 탄 채 뒤따르는 군관들에 의해 거리에 서있던 백성들이 기겁하고 널브러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쓸 틈은 없었다.

유생들의 돌발행동을 진압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

성균관에서 일제히 궐기하여 걸어온 유생들은 숙정문을 지키는 병력과 대치했다.

포도청과 한성부에서 나온 병력이 이들을 제지하고 있었으나, 상대가 상대이기에 쉽사리 창칼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

유생들의 맨 앞에 서있던 김좌명이 외쳤다.

"봉림대군은 종실의 일원으로 전하를 보좌하지는 못할 망정 보위를 탐해 난을 일으켰으니 실로 그 간악한 흉심에 만백성이 울고 있소! 게다가 공자(孔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진 성균관에 침입해 유생들을 폭행하였으니 이 어떻게 유학을 배운 자라 하겠소이까?"

"옳소!"

"옳소이다!"

신준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김좌명이 선동하는 말에 유생들이 서로 주먹을 치켜들고 호응하고 있었다.

"역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충의군이 지척까지 와있소! 역적이 성벽을 믿고 버티고 있으나 그 말로는 뻔한 것! 어서 성문을 열고 충의군을 맞아들입시다!"

유생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귀한 몸으로 자라 나라의 동량이라며 국가적으로 보살핌을 받던 그들이다.

그런 그들을 폭행하고 도망친 임금을 끌어낸 것은 크나큰 모욕이었다.

봉림대군으로서는 워낙 상황이 급박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만, 그곳에 숙식하던 유생들의 눈에는 어마어마한 폭거였다.

그러니 유생들은 그간 침묵하고 있다가도 상황이 반전될 기미가 보이자 일거에 들고 일어난 것이다.

"너희는 한갓 더벅머리 선비로 충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자원이 도성에 들어오면 이 나라가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모르는 것이냐?"

신준의 호통에 김좌명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는 오로지 주상 전하를 따를 뿐이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역모를 명분으로 역모를 일으켜 임금을 유폐한 이는 봉림대군이 아니오? 도원수는 국적을 토벌하고 군부의 원수를 갚은 충신인데 국사를 전횡하겠소?"

이자원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사대부들 역시 봉림대군의 정변이 일어나자 그 마음을 손바닥처럼 바꾸었다.

이자원의 공적은 공적이고, 충심을 별개로 두고 보던 이들조차 그리한 것이다.

신준은 말을 더 주고 받아보았자 손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만 외쳤다.

"창칼을 들어서라도 역적들을 물려라!"

그러나 명령을 들은 병졸들은 주춤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김좌명이 외쳤다.

"저들이 유생을 학살하려 든다!"

"너희가 영정(?政, 진시황)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오히려 유생들이 병사들을 밀치고 쌓아놓은 집기를 헤치기 위해 들어섰다.

병사들이 애써 그것을 막으려 들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신준 역시 유생들을 모조리 짓밟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리되면 정말 걷잡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이리하지도, 저리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소란은 도성 밖의 박철균에게도 감지되었다.

"숙정문에서 다툼이 빚어지고 있다라."

창의문을 두들기던 북벌군의 반절이 숙정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도 소동이 일어나는 판에 병사들은 제대로 문을 지킬 수 있을리가 없었다.

"문을 부수어라!"

조금전과는 달리 성문은 금방 완파되었다.

유생들이 가져다 치운 집기를 밟고 박철균의 기병들이 입성하기 시작했다.

===

"와아아!"

"이자원 장군 만세(萬世)!"

만세를 외치는 백성들에게 유생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뿐이었다.

정열하게 대오를 맞추어 도성에 입성하는 정초군은 그 모습을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반면 만주인 기병들은 도성 백성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굳이 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른 임무를 맡긴 터였다.

"도성 남쪽에 보냈던 척후가 보고하기를, 이미 어가가 수구문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하오이다."

"늦지 않게 따라잡아야 할 터인데."

척후가 뒤늦게 전해온 소식에 박철균은 만주인 기병들을 급파했다.

임금의 신병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확보하라는 명을 내린 상태로.

"본군은 어디쯤 오고 있다 하던가?"

"평양을 거쳐 황주에 다다랐사오이다. 황해감사 임광(任?)이 항복했고, 그 앞뒤로 줄줄이 군현들이 투항하여 싸움은 없었다고 하오이다."

본군의 진격 속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이들 선봉을 먼저 보내지 않았더라면 봉림대군은 임금과 대비를 데리고 강화도에서 농성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니, 실로 아슬아슬했지만 말이다.

이윽고 황익이 통진에서 대비를 데리고 귀환했다.

나머지 인평대군을 포함한 종친 대신들도 함께였다. 대비를 제외하곤 대개 포로 취급이었지만.

대비를 맞은 박철균이 부복했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히 대비 강씨에게 한 장의 종이를 바쳤다.

"도원수가 신을 시켜 이 상소를 대비께 올리라 명하였으니, 모쪼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이자원이 임금이나 대비 중 하나를 사로잡을 경우 올리라며 쥐여준 것이었다.

"봉림대군의 군호를 삭탈하고 정식으로 도원수에게 역적의 토벌을 명하라······ 인가."

"역적 이호는 감히 자전을 유폐하고 보위를 탐하였으니 어찌 그 종실의 작위를 유지하오리까. 그와 연좌된 모든 이의 작위를 박탈하고, 도원수로 하여금 역적을 치게 하소서."

대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로서도 한순간 봉림대군에 의해 실각한 후 매일 꿈꾸고 있던 일이었다.

차라리 저쪽의 사정도 냉혹하게 나갔다면 친정아버지도 오빠와 동생들도 별일없었을 것을.

게다가 그녀 자신과 아들의 목숨마저 위협받게 만들었지 않은가.

"역적 이호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

그녀는 강하게 말했다.

"윤허할 터이니 주상의 신변은 털끝만큼도 상하게 해서는 아니된다. 알겠느냐?"

"명을 받잡겠나이다."

박철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예의바르게 답했다.

그러나 그 앞을 물러나오자마자 그의 표정은 차갑게 변했다.

"안 대장(隊長)."

"예, 별장 영감."

박철균이 안익신을 부르자 그가 대답했다.

"나는 곧장 역도들을 추격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도원수 대감은 며칠 뒤에야 도착하실 것이고."

박철균은 말했다.

"그동안 결코 자전의 곁에 누군가 다가가게 해서는 안될 것이네. 알겠는가."

대비는 어디까지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한 장식품일 뿐이다.

그녀가 공백을 틈타 무슨 일이든 벌이지 못하게 하는 조치였다.

이미 대비의 시간은 지나갔으니.

"어서 역도들을 쫓아라. 전하를 뫼셔야 한다!"

===

남한산성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봉림대군은 천신만고를 겪었다.

광주에 겨우 들어섰을 때쯤, 추격해온 야인 기병들이 어가의 뒤를 들이친 것이다.

이시백이 이끄는 수어청 병력이 마중나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끝장이었으리라.

그 뒤로 험한 지세를 타고 산성에 입보하는 동안 일행은 모두 지쳐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다른 이들과 달리 형형한 눈빛을 뿜어냈다.

그는 산성에 들어서자마자 쉴틈도 없이 명령했다.

"화포를 꺼내오라."

< 다시, 남한산성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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