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77화 (177/213)

< 회군 (2) >

인평대군 등이 종묘사직의 신주와 대비를 받들어 강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지 하루도 되지 않아 개성으로부터 장계가 날아왔다.

"개성 유수가 치계하기를, 이미 적은 송도를 거쳐갔다고 하오이다!"

봉림대군은 입술을 짓씹었다.

요동에서 미적거리던 때와 달리 이자원은 매우 신속했다.

적의 선봉은 침식마저 잊고 도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임금을 곁눈질한 뒤, 봉림대군은 침착하게 말했다.

"역적은 고을을 함락치 아니하고 오로지 직도(直道)하고 있으니 이것이 오히려 적의 화근이 되지 않겠는가?"

명백히 후방의 위협은 신경쓰지 않고 달려오고 있으니 여러 수령들이 움직인다면 위기에 빠지는 것은 이자원 측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역시 철석같이 이를 믿고 있다기보다는, 일말의 희망을 담아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구굉은 기어이 그 희망을 분쇄했다.

"고을의 한줌 병력으로 정예한 적의 뒤를 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거니와, 필경 이자원이 뒤에 본군을 이끌고 오고 있을테니 우리 수령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이다."

"허면 도성까지 닿는데는 얼마나 걸리겠소?"

개성은 한양과 그야말로 지척이다.

구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총융청에 급히 명하여 경기 북부의 속오군을 소집하라 명하였으나 얼마나 모였을지는 모르겠사오이다. 그들이 얼마나 시간을 끌어주는지가 관건이지요."

강화도로 피할 수 있다면 우선 한 고비는 넘긴다.

최소한 인평대군과 대비 일행, 그리고 뒤따라가는 주상 일행이 입보할 때까지만 버텨주면 된다.

봉림대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실로 시간과의 싸움이구나."

===

- 타타탕!

조총 소리가 거세게 울려 퍼졌다.

급히 모인 경기도 속오군은 총융청에서 파견된 군관들과 함께 임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이 사실상 도성으로 가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경기 속오군은 정예이나 옛 삼수병의 제도를 고수하고 있고, 그 수도 많지 않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박철균의 외침에 마병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훈련도감, 정초군, 그리고 팔기와 동만주의 야인 기병들이 뒤섞인 혼성 부대였으나 여러번의 실전 경험으로 능숙하게 발을 맞추는 그들이었다.

그 모습에 속오군은 지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군관 김석남(金碩男)이 호령했다.

"겁먹지 마라! 강을 낀 이점은 십만 대군을 호령하는 것과 같다! 자리를 지키며 총탄과 궁시를 쏘아내면 능히 막아낼 수 있느니라!"

그는 한때 훈련도감에 있었으나, 이자원이 벌인 대대적인 숙군 작업으로 총융청으로 배속을 옮겨야만 했던 이였다.

그런만큼 훈국에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그 정강함을 내심 인정치 아니하던 김석남이었다.

"군관 나리! 적이 아랑곳 않고 강을 건너는 중이외다!"

"이, 이런······."

하지만 그런 그라 할지라도 그냥 말탄채로 얕은 목을 건너버리는 마병들을 보자 턱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연초라 강물이 줄어든 탓에 수위가 높지 않고 물살도 세지 않다지만,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건너는 것이 아닌가.

"사, 살수대!"

급히 김석남이 살수대를 불렀다.

낭선과 당파 등이 어지러이 마병들을 향했다.

"가소롭구나, 이 고려 놈들아!"

만주인 하나가 그리 외치며 속오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법 훈련은 챙겨받은 듯 하지만, 훈국의 살수들이 펼치는 빽빽히 밀집한 장창 방진처럼 뚫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머리를 박박 깎은 야인 기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이리저리 저항해보려던 총융청 병사들의 사기는 단박에 꺾여버렸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김석남은 그래도 군관답게 용맹히 맞섰지만 그뿐이었다. 뒤따라온 박철균의 편곤에 그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군관 나리가 죽었다!"

"비, 비켜!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까 보냐!"

"밀지 마라!"

"이쪽에 사람이 깔렸어!"

쏘아진 총탄과 궁시에 상한 마병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다.

박철균과 황익이 이끄는 선봉은 압록강을 넘은지 6일만에 저항을 분쇄하고 한양 근교에 다다랐다.

===

- 적이 양철평(良鐵坪)에 들어섰다!

임진강 전투에서 얻은 수확이란 오로지 약간의 시간과 적의 도달 상황 뿐이었다.

'완성군께서 적들을 잠시만 달래보아 주시오.'

결국 조정이 찾은 이는 전 영의정 최명길이었다.

변설에 능하고 도원수 이자원과도 그리 나쁜 관계가 아니었던데다 지난 호란 때에도 비슷한 짓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조대왕의 파천을 도운 분이 완성군 아니시오이까. 한번만 힘을 써주십시오.'

최명길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봉림대군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숭례문을 통해 나간 최명길은 박철균의 막사로 안내를 받았다.

절도를 지키면서 취식 중인 조선군들도 보였고, 비슷하게 저희 나름대로 질서를 세워놓고 움직이는 만주인도 보였으며, 숫제 여기저기 널브러져 게걸스레 육포를 뜯어먹는 자들도 있었다.

"저치들은 두번이나 조선 땅을 밟았다 하외다. 개중에는 정묘년까지 포함하여 세번 밟은 자도 있겠지요."

그 중에서 옛 팔기 출신들을 가리키며 박철균이 말했다.

"그때처럼 오랑캐들은 도성 인근까지 다다랐고, 나는 다시 그것을 막으려 이곳에 왔구려.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인듯 싶소."

최명길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들을 이끌고 온 주인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박철균이 말했다.

"저들의 주인은 더이상 포악한 오랑캐 황제가 아니올시다. 야인들은 이미 조선의 번견으로 전락한지 오래지요."

"조선의 번견이라."

최명길은 순순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저 흉포한 오랑캐들의 주인이 지금 궁중에 갇힌 임금일리는 없었다.

누가 무어라 하든 그 '주인'에 가장 가까운 이는 따로 있으리라.

이자원.

"도원수가 충신이라 믿소?"

그 물음에 박철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역모를 일으킨 자는 봉림대군이지 않습니까. 도원수께서는 역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몰아온 것이고요."

"모양새로 따지자면 그럴 터이지만, 그 속내를 어찌 알겠소."

최명길은 이 나라의 종사에 충성했다.

인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종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유군을 위해 뛰어다녔지만 그것은 결국 전주 이씨 나라를 위한 것.

"이 난리가 도원수의 승리로 끝나고 나면 그가 순순히 대권을 주상 전하께 돌려드리겠소?"

명나라의 책봉을 핑계 삼아 찬탈을 하거나.

전조 최씨들을 본받아 무신정권을 세우거나.

어느쪽이든 바람직한 결말은 아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같은 종친인 봉림대군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최명길은 이런 자리에 군말않고 나오게 된 것이다.

"······도원수께서는."

박철균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도원수께서는 종사를 보전해주실 생각이라 하시었소이다. 대감께서도 감히 보위를 탐내려는 생각 따위는 없고요. 그분이 보위를 노렸더라면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조선왕을 칭했겠지요."

반간계든 뭐든 명나라의 책봉은 강력한 명분이다.

스스로도 왕실의 피를 이었기도 하니, 진정 빼앗긴 임금의 자리를 되찾고자 했다면 그리하였으리라.

하지만 이자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의멸친이다.'

자신은 그 말에 이끌려 두 형을 죽였다.

이자원 역시 마찬가지로 생부를 독살했다.

그것이 이 나라 조선을 위한 충정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박철균은 애써 설득한 자신을 다시 흔들고 싶지 않았다.

"잡설이 길었소이다. 할말이 그것이 다라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시지요."

말투가 퉁명스러워진데다 축객령마저 떨어졌으니 최명길을 더 그것을 캐묻지 못했다.

"대군에게 장졸들의 식솔이 붙들려 있소. 그들을 죄인 취급도 하지 아니하고, 제법 후히 대해주고 있으니 이 사실을 알렸으면 하오."

최명길은 그리고 숨을 삼킨 뒤 말했다.

"그러나 옛날 이괄의 난 때와 같이 역적의 식솔들을 모두 베자는 논의가 점차 세지고 있으니, 이 사람으로서는 막기가 힘드오."

그는 몰려드는 자괴감을 겨우 이겨낸 뒤 말을 이었다.

"잠시 군사를 거두어 고양군까지만 물러나면 내가 앞장서 이런 논의를 중지시켜 보겠소. 고양군이면 불과 10여리 밖이 아니오."

박철균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완성군께서 좋은 것을 알려주셨으니 소관도 한가지 알려드리겠소이다."

그는 말했다.

"지금쯤 우리군이 대가(臺駕)를 붙잡았을 것이오."

===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고······."

황익은 멀리 바닷가를 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실컷 전공도 세웠으니 이제 훈련도감을 벗어나 어디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편히 여생을 즐기는 꿈을 꾸었던 황익이었다.

그런데 졸지에 정국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어찌저찌하다 역모를 토벌한다며 회군하는 군대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임진강을 돌파한 박철균은 일부를 이끌고 그대로 남하해 도성으로 향했고, 황익 자신은 통진(通津)으로 왔다.

통진은 강화도로 통하는 나루터이니, 혹 인질이나 중요 인사들이 먼저 강화도로 향했을 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과연 그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별장 영감! 근처에 인마 한 무리가 접근했다가 다시 물러가고 있사오이다!"

"그래?"

황익이 품 속에서 천리경(千里鏡)을 꺼내 살피니 과연 저쪽도 무슨 언질을 받은 것인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 통진까지 발걸음을 옮길 자들은 한 종류 밖에 없다.

도성에서 강도로 피난하는 자들.

특히 호위가 많은 것을 보니 대어(大漁)임이 분명했다.

'어찌하나.'

받은 명령이야 강화도로 향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란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귀한 분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걸까.

그것이 황익의 결단을 망설이게 했다.

"영감."

곁에 있던 군관이 넌지시 그를 불렀다.

"도원수 대감의 명이 있지 않았사오이까."

속내를 들킨 황익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확실히 이자원은 이런 기회를 놓치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팽팽하던 마음 속 저울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큼, 먼지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런 것 뿐이니라!"

애써 변명한 황익은 이어서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권총으로 적병을 우선 쏘아넘기는 것이 훈국의 주된 전법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경우엔 혹 호위 대상 가운데 다치는 사람이 나올까봐 그럴 수가 없었다.

가마에 누가 타고 있을지 알고 총을 쏜단 말인가.

호위를 맡은 호위청과 금군, 그리고 총융청 병력들로서는 나름 호재였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백병전으로도 그들은 훈국 마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비 마마를 지켜라!"

"물러나십시오, 대감!"

- 스릉

호기롭게 그리 외치며 창칼을 뽑아든 호위군이었으나 막상 훈국 마병이 짓쳐들어오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혹독한 마상 훈련을 받은데다 지난 세월 동안 숱한 실전을 거치며 단련되어온 마병들이다.

제아무리 왕실을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자들이라 하나, 그 지옥도에서 살아온 훈국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수적으로도 중과부적인 것도 있어, 오래지 않아 호위군은 땅에 그 피를 적신채 쓰러졌다.

"모두 사로잡아라!"

사방으로 대신과 종친들이 달아났지만 말탄 훈국 병사들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제일 먼저 인평대군의 뒷덜미가 붙잡혀 패대기쳐지고,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 타고 계신 분은 누구시오?"

다른 사람은 모두 말에 타고 있거늘, 고아한 가마 하나만 덩그러니 있자 황익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두려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시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계신 분은 금상의 모친이신 대비 마마시오. 어서 예를 갖추시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황익을 비롯한 훈국 병사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부복했다.

황익이 엎드려 외쳤다.

"대비 마마, 뫼시러 왔나이다!"

가마의 겹창 너머로 들려온 소리에 대비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 회군 (2)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