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군 (1) >
"흐윽, 흐윽······."
함거에 갇힌 강문정이 서럽게 흐느꼈다.
아직 약관이나 겨우 넘긴 젊은이였으니 기어이 이런 상황이 닥치자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음이 복받친 것이다.
아버지가 참살당하고 봉림대군이 도성을 장악하던 와중 간신히 달아난 강문정이었으나 결국 추포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방으로 향하는 길에 몸을 의탁하려 했던 큰 자형 정태제마저 함께 붙잡혀 버렸다.
강석기의 역모에 연좌된 탓이었다.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게."
정태제는 침통한 표정으로 강문정에게 그리 말을 건넸다.
임지인 정주에 있던 중 갑작스레 금부도사가 들이닥치자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붙잡힌 정태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은 뒤틀리고 있었다.
"자형, 우리는 어찌되겠습니까."
"도성에 닿아 보아야알겠지. 이 한 목숨만 거두는 것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정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가 식구들은 이미 모조리 연좌되어 하옥되었다 들었다.
그 역시 수령으로 나와있으니 가만 두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시집간 딸은 연좌하지 않는 것이 법도이니 그대로만 따진다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은 괜찮겠으나, 불똥이 어떻게 튀느냐에 따라선 다같이 불귀의 객이 되거나 노비로 전락하리라.
강문정 역시 자형의 반응에서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것인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어디서 오는 이들인고."
곁에서 함께 따라가던 금부도사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무심하게 물음을 던졌던 그의 표정은 점차 경악으로 변했다.
부옇게 일어난 연기 사이로 무장한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은 이미 망하였으니 그 정체가 팔기일리는 없었다.
그들은 훈국 마병이었다.
팔도 도원수의 기치가 흔들렸다.
"뭐, 뭐냐? 요동에 있어야할 자들이 왜 여기에······."
"거기에 있는 자들은 누구냐!"
저쪽에서 장수의 외침이 들려오자 금부도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어명을 받아 나라의 죄인을 압송하는 의금부 관리들이다! 훈국은 예 무슨 일인가?"
"죄인이라! 필경 봉림대군이 충신을 잡아들이는 수작이렷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않고 상대가 그리 받아치자 금부도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함거에 갇힌 자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인수하여 판단할 터이니 너희는 곱게 사람을 내어놓고 물러가거라!"
"어찌 나라의 죄인을 압송하는 금부도사가 너희 말을 듣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금부도사가 그리 외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호송하던 나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몸을 움츠렸다.
어디라고 감히 훈국 기병의 앞을 막아세우겠는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절대적인 이쪽의 열세인데 말이다.
"이, 이놈들이! 어깨를 펴지 못하겠느냐? 너희가 그러고도 어명을 받든 의금부 나졸들이냐?"
금부도사가 휘하를 다그칠 때, 장수가 앞으로 나와 피스톨을 겨누었다.
- 탕
연기가 피어오르고, 말에 타고 있던 금부도사가 털썩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나졸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어서 함거를 열어 죄인들을 석방하라."
파총 박철균의 명령에 병사들이 함거로 달려들었다.
북벌군이 압록강을 넘은지 단 하루.
그들은 이미 정주에 다다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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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속도는 필연적으로 느려질 것이다."
평안도를 지켜야할 북병은 이자원의 손에 있고, 그 외에도 조선땅의 웬만한 군대는 죄다 요동에 올라가있었으니 막아설 병력 자체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교전이 없더라도 기동 자체가 느려지면 골치 아픈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역적 이호는 나를 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 어찌하겠다 하더냐?"
송극례와 선전관을 엄히 심문하자 저쪽이 생각하는 대강의 윤곽이 드러나왔다.
어영대장 이완이 봉림대군의 명을 받들면 당연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실패하면 차선책으로 파천(播遷)을 결행한다는 것이었다.
정통성있는 임금을 끼고 있는 것이야말로 봉림대군의 가장 큰 강점이다.
'온 나라의 군대가 내 손에 있다한들 임금을 탈환하지 못하면 안으로부터 무너지리란 속셈이군.'
마치 도성을 점령했어도 끝내 토벌되고 만 이괄과 같이.
"이호가 도망칠 곳은 뻔하다. 훈국 마병별장 황익, 정초별장 박철균. 그대들은 마병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먼저 내달려라."
이자원이 말했다.
"도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은 본군이 맡을 것이다. 열흘 안에 도성을 탈환한다."
그리하여 박철균과 황익은 먼저 압록강을 건너 정주에 다다랐고, 이자원이 이끄는 본군은 의주를 지나 남진했다.
의주는 본래 조선의 국경으로서 요충지였지만, 북벌 당시 서북군 대부분을 쓸어간 터라 의미있는 저항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벌군은 선천(宣川)에 이르러서야 저항을 맞이했다.
"선천부사(宣川府使) 이계(李?)가 길을 막고 도원수께서 함부로 군사를 움직임을 꾸짖고 있나이다."
"우리는 역모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반적을 토벌하러 가는 중임을 전하였는가?"
"예. 그러나 너무나 막무가내이기에······."
그러자 부원수 유림이 나섰다.
"소관이 나서서 한번 설득해보겠사오이다."
유림은 서북에 오래있었으니 이계 같은 자와도 안면이 있었다.
그러니 늙은 몸을 움직여서라도 설득을 해보겠다는 유림이었으나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토역의 명의가 명명백백하거늘 구태여 의군의 앞을 막아선 자이올시다. 괜한 시간낭비일 것이오."
게다가 한번 저항하는 측을 짓밟아놓아야 이런 식으로 시간이 끌리는 일이 없을 터.
"쇼군,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저정도 병력이야 일거에 쓸어낼 수 있습니다."
아마쿠사 시로가 말했지만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키리시탄들의 검술은 일절이니 이제까지 잘써먹어왔지만 그들은 엄연히 조선 백성의 눈에는 '왜구'인 바.
괜히 봉림대군에게 '오랑캐와 결탁했다'는 명분을 쥐여줄 필요는 없었다.
결국 나선 이들은 역시나 훈련도감이었다.
"돌격하라!"
초관 허응선이 나서서 외쳤다.
훈국 군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자 선천 군사들은 완전히 기세에 눌려버렸다.
"방포하라!"
- 탕, 탕
이계가 서둘러 소리쳤지만 군사들은 산발적으로 쏘아댈 뿐, 훈국군의 돌입을 막지 못했다.
이내 훈국군이 장창을 내세우고 짓쳐들어오자 선천 군사들은 냅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느냐? 어, 어서 싸워라!"
이계의 재촉에도 군사들은 하나둘씩 병기를 내버리고 달아났다.
그렇잖아도 대병을 앞에 두고 사기가 떨어진 판이 아닌가.
"역적은 내 칼을 받으라!"
깨강정처럼 흩어져버린 병사들을 헤치고 신류가 날듯이 뛰쳐들어왔다.
이계는 채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불과 일각도 되지 않아 싸움은 끝났다.
"도원수 대감!"
한편 선봉에서도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박철균과 황익이 이끄는 선봉대는 정주에서 정태제와 강문정을 석방한 뒤 청천강을 넘어 끝없이 남진했다.
그리고 안주를 통과했을 때 쯤, 그들은 평양으로부터 온 아전과 조우했다.
"평안 감사 민영(閔?)이 관인을 바치고 항복했사오이다!"
이즈음 평안 감사를 맡고 있던 자는 바로 쌍령에서 함께 싸웠던 전 경상우병사 민영이었으니, 휘하에 병졸이 없고 민폐(民弊)됨을 명분삼아 항복 의사를 전해온 것이다.
북도(北道) 제일의 대읍(大邑) 평양은 싸움 한번 없이 북벌군의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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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영청이 이자원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 이자원이 기어이 난을 일으켰다!
봉림대군은 멀리서 전해온 이야기를 듣고 침음성을 흘렸다.
물론 정변을 일으킬 때부터 이런 위험을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닥쳐오자 새삼 상황의 위급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총융청과 수어청은 어가를 호위하여 강도(江都)로 건너가시오. 또 삼남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으시오. 전선을 형성하여 적들을 밀어냄이 옳겠소."
봉림대군을 따르는 자들이든, 내심 고까워하는 자들이든 간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감히 봉림대군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하오면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세워 도성을 지키게 하고, 삼남의 군사를 맡겨야 할 것이오이다. 누가 적당하겠사오이까."
구굉의 물음에 봉림대군이 답했다.
"내가 직접 육지에 남겠소."
"대군께서요?"
"나는 종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거병하였소. 내가 솔선수범치 않으면 누가 이 명분을 믿고 따르겠소이까."
봉림대군은 결연하게 말했다.
자신은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탓에 특히 명분이 취약하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오이다. 그렇잖아도 대군께서 주상 전하를 대신해 중임을 맡으신지 얼마 되지 않았사온데."
정변을 일으킨 핵심인 봉림대군이 임금, 대비 등과 떨어져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차라리 소관을 유도대장으로 삼아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선 이는 수어사 이시백이었다.
그간 인조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정확히는 수어청 군사들이 인조를 죽인 벌로써- 서용(敍用)되지 아니하였으나, 봉림대군은 이미 최명길이 사면받았음을 내세워 조정에 복귀시켰다.
특히 문관이었으나 용맹하고 결기가 있었으므로 적절한 인선이었다.
"음."
확실히 이시백 정도라면 맡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구굉과 구인후 등도 나서서 봉림대군을 설득하니, 대군은 끝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파천이 결정되었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소. 인평대군은 대비 마마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건너가시오. 준비가 되는대로 나 역시 주상 전하와 함께 뒤를 따르겠소."
봉림대군이 동생 인평대군 요(?)에게 말했다.
동생은 길게 읍하며 명을 받들었다.
'해볼만할지도 모른다.'
봉림대군은 애써 마음을 달랬다.
'역군 장수들의 식솔이 모두 우리 손 안에 있다. 그들을 내세워 저들의 내분을 유도하는 한편으로 어영대장을 다시 달래보자. 삼남군이 모여들고, 조정이 강화도로 건너가 농성하기 시작하면 그의 마음도 바뀔 것이다.'
이미 각지의 속오군에게 파발을 전해놓았다.
적의 군사가 많고 훈련도감이 정예라 하나, 임금을 얻지 못하는 이상 육지에서 소요하며 시간을 끌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제아무리 이자원이라 할지라도 어찌 버티겠는가.
그들은 안으로부터 무너질 것이다.
'옛날 이괄과 같이 말이다.'
인평대군은 종친들과 함께 바쁘게 채비하여 떠날 준비를 했다.
이윽고 그들은 돈의문을 따라 도성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바깥에서 파발이 급히 당도했다.
"대군 대감!"
"무어냐?"
급박한 소식에 봉림대군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이자원이 난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들려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 나아왔을까.
그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말을 재촉했다.
"적군이 벌써 평양을 함락했다 하오이다!"
"무엇이?"
봉림대군이 경악해 외쳤다.
평양이면 그래도 방어가 튼튼하고 치안을 유지키 위한 군사들도 제법 있다.
평안도가 대개 무주공산이라 하지만, 그들이 끌어줄 시간을 믿고 있었거늘 채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벌써 함락됐다니.
"적들이 언제 평양에 입성했다 하더냐?"
"그, 그것이."
파발이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봉림대군의 호령에 파발은 겨우 입을 열었다.
"벌써 사흘 전이오이다. 적군이 쉬지 않고 내려오고 있으니 아마 지금쯤······."
상상 이상으로 빠른 진격 속도에 봉림대군은 기함했다.
평양 뒤로는 변변찮은 방어선이 없다.
그러니 이자원의 난을 보고받자마자 강도로 옮길 준비를 했던 것인데.
"서둘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임금을 강화도에 뫼셔야 한다!"
봉림대군이 외쳤다.
< 회군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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