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적의 피 (2) >
"좌의정 신경진이 중병으로 체직을 청하였는데, 정승의 중한 자리를 함부로 비워둘 수가 없으므로 조정에서 도원수 대감을 좌상에 삼으려 한다는 교서이오이다. 부원수께 부절을 맡기고 도성으로 돌아오시지요."
선전관의 말에 이자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정승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도 많거니와, 조정에서도 근래의 일로 여러가지 말이 많았을 터인데 의외로군."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가도에서 퍼진 소문이 도성에 닿지 않았을리는 없을 터."
이자원의 말에 선전관의 눈이 흔들렸다.
"예······?"
"명나라에서 내가 폐주의 아들이니 무어니 하며 조선왕으로 책봉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은가. 대비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나를 좌상에 삼겠다 하시던가?"
본인이 직접 그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자 선전관은 당황했다.
정말 대군의 말처럼 이자가 역심이라도 품은 것인가.
"대, 대비께선 도원수 대감을 믿고 계시오이다.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우니 주상 전하의 인척이신 대감께서 안쪽으로 들어와 이런 참소를 근절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라는 하명이시외다."
"그러한가. 주상 전하의 은혜가 지극하니 내 막중한 소임을 받들 수밖에 없겠군."
이자원은 그 말에 더 캐묻지 않았다.
선전관은 그것에 의심을 품을 겨를 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땀을 식히기에 바빴다.
"하지만 부원수는 고령이니 제대로 직무를 인수할지는 모르겠군. 조정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북벌군을 맡길 것을 청해보시게."
"이, 일단 조정으로 돌아가란 말씀이외까?"
"그렇네."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이자원을 불러내야 하는 판이니, 선전관으로서는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우선 자전께 고해보겠으나, 나랏일은 한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는 것이니 대감께서는 소관과 같이 내려가시지요."
"처리해야할 일이 많으니 바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 그 사이에 다녀오면 되지 않겠는가."
이자원이 이리 완강하니 선전관이라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가만히 물러났다.
"태도가 수상하다."
선전관이 물러나는 모양을 본 이자원이 조용히 뇌까렸다.
대비가 자신을 소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기에 제안 자체는 그럴듯했다.
좌의정 정도는 제시해야 자신을 불러올 수 있다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나 이런 생각은 비단 대비 뿐 아니라 다른 이라도 할 수 있는 것.
"박 별장."
"예, 대감."
박철균이 대답했다.
"저자는 분명 교지만 전달하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가 진중에 머무르는 동안 사람을 풀어 뒤를 밟아보라."
"알겠사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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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은 과연 가만히 발을 붙이고 있지 않았다.
안부를 전한다는 핑계로 어영청의 진중에 들어선 것이다.
"이미 도성에서는 봉림대군께서 정변을 일으키시어 간신을 쓸어내고 대권을 쥐셨소이다. 허나 역적의 도당인 도원수가 남아있으니, 그 화가 가슴에 박힌 병과 같지요. 대군께서는 어영대장 영감께 이를 전하고 그를 제거하라 하셨소이다."
"조정에서 대놓고 추포하라는 교서를 내리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올시다. 이곳 북벌군 장졸들의 마음은 도원수에게 가있으니, 교지 한장으로 어찌하기란 힘들었을테지요."
그 중 봉림대군이 특별히 말을 전하라 한 군관 신엄(申儼)과 송극례(宋克禮)는 그리 선전관을 치하했다.
"그 교서를 전하는 순간 포박당하여 목이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을테지요······ 하오면 어찌하면 되겠소?"
신엄과 송극례는 어영청 시절 봉림대군과 친분이 있었으니 밀지를 전달키에 딱 적당한 상대였다.
"이자원이 만약 명을 받들지 않거나 차일피일 시간을 끌 경우, 군사를 몰아 토벌하라 명하시었소이다. 그러니 어영대장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어영청을 몰아 이자원을 제거키만 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이미 이완에게 내리는 별도의 교서도 존재하니, 이자원만 사라지면 북벌군은 쉬이 장악이 가능하리라.
"바로 이를 대장 영감께 말씀드려보겠사오이다."
신엄과 송극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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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있는 봉림대군이나, 교지를 전한 선전관, 그리고 휘하 군관인 신엄과 송극례 모두 대군의 측근인 이완이라면 무조건 가담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완의 태도는 명백히 미묘했다.
그는 돌아가는 사정을 전해듣자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떤 기회주의적인 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명확히 어디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리라.
신엄과 송극례가 재촉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이거 계산이 완전히 틀어졌소이다. 어영대장께서 움직이지 않으신다면 무슨 수로 도원수를 친단 말이오?"
"시간이 얼마 없거늘······."
두 군관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완을 더이상 설득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임을 깨닫고 있었다.
"이것이 정당한 일인지 아닌지 고민하시는 모양인데, 혹 이 밀명을 도원수에게 고하지는 않겠지요?"
"영감은 썩 내키지 않아 가담을 망설이고 있지만 이를 고하지도 않을 것이오. 어찌되었든 어명이 아니겠소이까."
그러나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른다.
이완이 토설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
신엄이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라도 진행하는 수밖에 없겠소."
"우리 휘하의 군사만으로 되겠소이까? 심지어 대장마저도 가담치 않는데?"
"도원수만 없앨 수 있다면 대병(大兵)은 필요가 없소이다. 꾀를 내야지요."
신엄의 말에 송극례가 중얼거렸다.
"그에게 접근할 핑곗거리가 없으려나."
그러다 한가지가 생각이 난 모양인지 이마를 탁 쳤다.
"신 파총은 심양 궁궐의 경비를 서고 있지 않소. 청 폐주는 도원수에게 신경을 많이 기울이고 있으니 그를 이용하면 되지 않겠소?"
도원수에게 술을 바치라 쇼서를 꼬이고, 그것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도원수에게 다가가자는 설명이었다.
이자원 또한 쇼서가 바치는 성의는 굳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자 신엄이 말했다.
"거기에 독(毒)을 태우면 되겠구려."
그러나 송극례는 고개를 저었다.
"폐주가 바치는 술이니 분명 마시기 전 검시를 할 터. 어떻게 독을 탈수가 있겠소. 다만 우리 두 사람이 막사 안으로 들기만 하면 성공이오."
이자원도 사람이니 갑옷을 입은 채로 술을 마실 수가 있겠는가.
특히 사람이 술잔을 기울일 때는 경계가 약해지는 법이니 더더욱 손쉬운 일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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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엄과 송극례는 쟁반에 술과 음식을 받쳐들고 도원수의 군막 앞에 섰다.
훈국 병사들은 정연한 태도로 그들 앞을 막아서 품 속을 검사했다.
검문이 끝난 뒤 신엄이 나서서 말했다.
"소관은 어영청 파총 신엄이올시다. 청 폐주가 대감께 술을 바쳤사오니 모쪼록 들게 해주십시오."
조마조마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이내 허락이 떨어졌다.
"어쩐 일로 청주가 술을 보내왔는가?"
"날이 추운데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려 막사에 머무시는 도원수 대감을 위로키 위해 보냈다 하오이다. 기껏 보낸 성의이니 모쪼록 받아주소서."
이자원은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은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독이 있는지 간단한 검사를 하고 나서, 이자원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잔이 기울어지던 그때, 송극례가 발치에 숨겨놓고 있던 소도(小刀)를 꺼내어 휘둘렀다.
"죽어라!"
- 퍽
그러나 이내 들려온 것은 가슴에 칼이 박히는 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파열음이었다.
송극례의 움직임보다 빨리, 이자원의 주먹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친 것이다.
"이, 이런!"
신엄은 그제야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이판사판이다.
신엄은 역시나 숨겨둔 칼을 뽑아들었다.
"대감, 무슨 일이오이까!"
바깥의 훈국군 역시 안쪽의 소리에 이상한 점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더 시간을 끌면 안된다. 신엄은 이자원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 스릉
그러나 이자원의 허리춤에서 칼이 뽑히는가 싶더니, 이내 신엄의 목이 툭 떨어졌다.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발도였다.
- 퓻
머리가 사라진 시체에서 피가 솟구쳤다.
머리통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송극례는, 그 피를 보고 기겁하며 외쳤다.
"제기랄!"
그는 주춤거리며 막사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이미 밖에서 경비서던 훈국 군사들이 퇴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저놈을 붙잡아라."
칼을 갈무리한 이자원의 명령에 훈련도감군은 즉각 송극례를 덮쳤다.
이자원은 천천히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 으, 으아악!"
이자원이 지그시 송극례의 손을 밟아 누르자 그가 비명을 질렀다.
이자원은 넌지시 물었다.
"너는 누구의 명을 받고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큭, 충의 있는 사내라면 역적의 피를 이은 자를 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누구의 명도 받은 적이 없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이자원은 더 강하게 발을 꾹 내려눌렀다.
송극례의 신음이 커졌다.
"내 이미 너희가 선전관과 모의를 꾸민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와 동시에 심양성의 숙소에 머물고 있던 선전관이 박철균의 손에 포박되어 끌려왔다.
송극례는 그 모습을 보고 숨을 내뱉었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불어라."
이미 피떡이 된 선전관의 입에서 더듬더듬 진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소란에 여기저기서 달려온 장수와 병사들은 그 이야기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봉림대군이 난을 일으켰다라."
이자원이 그렇게 말하자 주위가 쥐죽은듯이 고요해졌다.
정녕 도성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었단 말인가.
그들이 북벌을 하는 사이에?
이자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장들은 내가 한치의 꺼림없이 멸사봉공하였음을 알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장졸은 나와 같이 국적(國敵)을 치는데 목숨을 내어놓았다.
그런데 도성에서는 역적 이호가 명나라의 반간계를 빌미로 역모를 일으켜 대비 마마를 유폐하고 주상 전하를 겁박하였으며, 나아가 우리 북벌군을 역적의 굴혈로 규정하였다!"
이 말에 분노하는 데에는 장수와 병졸들이 따로 없었다.
"망할 놈들······."
"저런 죽일 놈들이 있나······."
북벌군은 갖은 고생을 해가며 전장을 거쳐왔다.
청을 멸한 뒤에도 1년이 넘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오로지 돌아가면 가득 받을 포상으로 고된 마음을 달래던 장졸들이었는데, 봉림대군이 난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숫제 트집을 잡아 그들을 제거하려 든다는 말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를 도성으로 소환하려는 것도 역적의 간악한 꾀이다! 내가 여기에 순순히 당했다면 휘하의 장졸들이라 한들 무사했겠는가!"
이제 나는 역적을 쓸어없애고 임금을 다시 받들어 모시기 위해 회군(回軍)코자 하는데 혹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이자원의 시선이 장졸들을 훑었다.
두려움이나 분노로 사로잡혀 있던 그들의 눈은 이자원이 길을 제시하자 이내 결연함으로 바뀌었다.
장졸들이 하나둘씩 무릎 꿇기 시작했다.
"도원수 대감을 따르겠나이다!"
조을동이나 고발피 같은 병졸들부터 허응선과 신류, 이사룡 같은 초관들까지 그리 외쳤다.
그러니 황익이나 이완, 김준룡, 유림 등의 고관에 이어 홍승주와 조대수, 오양, 오삼계 같은 항장들 역시 분위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한 사람, 박철균만은 한발짝 떨어져서 미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자원은 굳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군, 회군하라."
1643년.
팔도 도원수 이자원이 이끄는 북벌군은 토역(討逆)의 기치를 내세우고 남진했다.
< 역적의 피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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