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73화 (173/213)

< 거사 (3) >

현재 임금은 주로 양화당(養和堂)에 거처하고 있다.

창덕궁에서 함양문을 넘어서면 곧장 그리로 통하니, 금군은 필사적으로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담장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미 궁중에서도 이상을 깨닫고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의병들은 도달했는가?"

봉림대군이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창경궁의 문을 막아서고 임금과 대비의 도주를 저지하라 지시하였으나 역시나 그것이 잘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종친들은 오위의 허직(虛職) 외에는 군사에 발담글 일이 없는데다, 가노들도 대개 비슷한 수준일 것이 아닌가.

정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제 역할을 다해내주어야 했다.

"어서 뚫어라!"

신준의 재촉에 호위군관들이 바삐 칼을 휘둘렀다.

호위청의 병력들은 전원 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일신의 무용으로만 따지자면 훈국에도 꿀릴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 역도들아!

"전하를 지켜라!"

그러나 금군들은 발악적으로 그들의 앞을 막아나섰다.

호위군관들은 금군의 거센 기세에, 그리고 실상 지금 벌이고 있는 짓을 생각하면 틀린말도 아니었기에 움찔했다.

그때 봉림대군이 직접 나서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실상 역적은 너희 금군들이 아니냐!"

"뭐, 뭣?"

"주상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할 망정 간신이 나라를 제 마음대로 다스리고 제 사위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는 일도 뻔히 방관하였으니 역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봉림대군은 진실로 대비나 강석기가 이자원을 왕으로 세우려하는 일에 동참했다 생각하진 않았다.

제 아들과 외손자를 내버려두고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관점에서는 방조만 하더라도 크나큰 죄였다.

'삼백년 종사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는데 세도에 눈이 멀어.'

봉림대군은 분노에 차서 외쳤다.

"그렇기에 내가 왕실의 종친된 몸으로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이미 역적의 수괴는 처단되었으니 너희는 길을 열어라!"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봉림대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든 이 정변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가 직접 칼을 꼬나쥐고 나서자 금군은 주춤 물러섰다.

아무리 그래도 대군이 아닌가.

그가 방금 외친 낭설에 그들의 머리도 복잡해졌을 무렵, 호위군관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들이쳤다.

이미 칼을 겨룬 이상 어찌되었든 금군은 자신들의 적이었다.

'성공하면 된다, 성공하면.'

성즉군왕(成卽君王), 패즉역적(敗卽逆賊)인 법.

누가 역적이고 누가 충신인지는 마지막 순간에야 결정이 날 것이었다.

한참 호위청과 금군이 격돌하고 있을 때 쯤, 양화당 근처에서는 인영(人影) 몇이 몰래 빠져나가고 있었다.

===

총융중군 조후량(趙後亮)은 급작스런 난리에 정신이 없었다.

총융사가 워낙 깐깐한 인간인터라 기도 잘 펴지 못하고 살던 터에, 그가 조정의 논의에 따라 북한산의 지세를 살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며칠간 살판이 났던 조후량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난리가 일어나다니.

총융청의 본영인 북이영(北二營)은 경희궁 바깥에 있어, 창경궁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조후량은 입번해있던 병사들을 거느리고 쉴새없이 다그쳐 가며 육조거리께에 이르자, 과연 저편에서도 한 무리 군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멈춰라!"

조후량은 총융청 병사들을 제지하며 외쳤다.

"너, 너희들은 어디서 오는 병력이냐? 누구의 지시를 듣고 밤중에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냐?"

조후량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앞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나와 소리쳤다.

"나는 호위별장 신준이오! 어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는 중이오! 그대는 뉘시오?"

"호위군······?"

그 말에 안색이 변한 조후량은 이어서 외쳤다.

"나는 총융중군 조후량이오! 도성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으니 무슨 일이오?"

"우의정 강석기가 난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적발하였기에 전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이를 토벌케 하시었소. 이미 거진 정리가 되었으니 총융청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본영으로 돌아가 가만히 어명을 기다리시오!"

"우상이 난을?"

조후량으로서는 쉬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멈칫하면서도 나아가 말했다.

"우선은 이처럼 도성이 혼란하니 호위별장의 말이 맞다면 도와 빨리 난을 정리하는 것이 옳겠소."

그러나 신준은 대뜸 호통을 쳤다.

"이미 어명을 받아 우리가 적을 대개 토평한 상황이거늘 어찌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려 하는가? 혹 역도들과 부화뇌동한 것이 아닌가?"

"여, 역도라니."

조후량이 중얼거렸다.

신준의 공갈에 그는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신준의 말이 맞다면야 가만히 그에 따르면 되는 것이고, 혹 저들이 역적이라 하더라도 어명 운운하는 것을 보니 이미 대세가 결정이 난듯하지 않은가.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인즉.

"우, 우리는 도성의 변고를 진압하고자 들어가려 했을 뿐이오! 어찌 감히 역모에 가담하려 했겠는가!"

"그럼 함부로 이곳에 있지 말고 본영으로 돌아가 도성 바깥 경비에 집중토록 하시오!"

신준은 그렇게 허세를 부리면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어명 운운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호위청이 침전에 도달했을 때, 이미 임금과 대비는 몸을 뺀지 오래였다.

그러니 봉림대군과 나뉘어 임금을 찾기로 한 것이었다.

왕을 확실히 붙잡았더라면 당장 어명을 빙자해 총융청을 장악하면 될 것이었지만, 그러지 못한 상태니 언제 거짓이 들통날지 모른다.

신준은 총융청이 가만히 물러나는 것을 보고 호위군관들을 다그쳤다.

"어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봉림대군 역시 신준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수색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함부로 도성을 헤집고 다니며 힘을 빼지 않고, 방금까지 같이 있던 나인들을 심문하는데 주력했다.

"전하께서 집춘문을 통해 빠져나가셨다라!"

봉림대군이 중얼거렸다.

의병들이 북동으로 이어지는 숭교방(崇敎坊) 일대를 뛰어다니고 있으니 아마 그쪽으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근처에 숨어있을 공산이 컸다.

함부로 도망치다 잡히기보단, 일단 숨어서 경계가 풀릴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하는 것이리라. 시간이 더 지나면 도성의 변고를 눈치챈 구원군도 올 터였고.

그리고 바로 지척에 숨기 좋은 곳이 있었다.

"문을 깨부숴라!"

굳게 닫긴 성균관 문 안쪽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궁궐부터 시작된 난리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머물던 유생들이 하나둘씩 깨어난 것이다.

"대감, 주상께서 이리로 도망치신 것이 확실하지도 않사오이다. 성균관을 함부로 건드려도 되겠사오이까?"

조선은 유자의 나라이고, 성균관에 재학 중인 유생들은 나라의 동량으로서 사론(士論)의 한축이나 다름없었다.

정변을 일으키는 것도 모자라 성균관을 치면 뒷수습이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피난하는데 제격이 아닌가. 어서 문을 부숴라!"

봉림대군은 아랑곳않고 재차 명령했다.

- 우지끈

육중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빗장이 부서지며, 성균관의 문이 활짝 열렸다.

봉림대군은 성큼성큼 그리로 들어섰다.

"이곳에 주상 전하께서 계신가?"

대군이 그리 물으며 유생들에게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엄청난 폭거를 저지른 대군을 적개심 반 두려움 반으로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물으시는 분께서는 봉림대군 대감이 아니시오이까?"

유생의 물음에 봉림대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학생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이로 치면 봉림대군보다 많아 보였으나 대군의 지체를 일개 성균관의 유생과 비할 수는 없는 노릇.

자연스레 하대하는 봉림대군이었다.

유생은 말했다.

"소생의 이름은 김좌명(金佐明)이라 하옵고, 아버님께서는 호조판서를 지내신 잠곡(潛谷) 대감이시오이다."

"호판 대감의 아들이었군. 나도 몹시 존경하는 분일세. 그분의 충정과 나의 충정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주상 전하께서 예 계시는지 답해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통성명이나 하자고 봉림대군이 성균관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대군의 물음에 김좌명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외쳤다.

"대군께선 종친된 몸으로 나라와 사직을 위해 한 몸을 불사르지는 못할 망정 이 무슨 폭거이외까! 반역이라니요!"

김좌명의 말에 봉림대군의 화가 불끈 치솟았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이들은 소용 조씨가-그리고 그 배후에 있을 대비가- 숫제 자신을 죽이려고 분탕질을 쳐대던 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 사실을 주절주절 늘어놔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기에,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나는 전주 이씨의 나라를 보전하려는 대의를 받들어 분연히 일어났을 뿐, 자리를 탐내는 마음은 전혀 없네. 순순히 고한다면 참작해줄 것이되,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야!"

그러나 김좌명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 따르던 여러 유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봉림대군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의군은 무엇하는가! 이 썩은 선비들은 무시하고 어서 전하와 대비 마마를 찾아라!"

유생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평생 칼밥을 먹던 호위군관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거센 주먹과 몽둥이질에 금세 진압되었고, 대군은 이내 대성전을 거쳐 들어가 명륜당 한켠에서 임금 이백과 대비 강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봉림대군은 명령했다.

"전하와 대비 마마를 뫼셔라."

여기까지 그들을 호위해왔던 금군들은 역시 중과부적으로 호위군관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봉림대군은 피묻은 칼을 들고 성큼 두 모자에게 다가갔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옵니다. 신이 역적들을 토벌하였으나 아직 정세가 혼란하옵니다. 이곳은 안전치 않으니 어서 환궁하시어 나라의 위엄을 제대로 돋우시지요."

"이런 일을 벌이고도, 대군이 천수를 다할 수 있을 것 같소?"

대비의 말에 봉림대군의 눈이 분노로 차올랐다.

"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대비 마마 아니시옵니까?"

"내가 무엇을 했다고! 소용이 꾸민 일은 나 역시 알지 못하였소. 대군은 우상과 오늘밤 그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것이 아니었소?"

대비가 외쳤으나 봉림대군은 오로지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창경궁으로 끌고 가 사실상 유폐할 것을 지시한 뒤, 엉망진창이 된 성균관을 둘러보았다.

박살난 성균관이 흡사 작금 이 나라의 혼란을 보는 듯 했다.

"금군들은 모두 처리했는가?"

"예, 대감."

그 말에 봉림대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기어이 내가 역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게 되었구나.'

노산군이 끝내 복권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자신이 뭐라 변명하든 후세는 조카의 자리를 노려 거병했다 손가락질하리라.

그러나 지금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

"역적 이자원의 식솔은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라!"

집을 우지끈 때려부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고래고래 외쳤다.

"뉘, 뉘신데 이 밤중에······."

"어명을 받들어 역적 이자원을 추포하러 왔다!"

이 시점에서는 어명이고 뭐고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경평군은 고래고래 그리 소리쳤다.

'의병'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역적의 식솔은 모두 죽이거나 노비로 만드는 것이 법도. 그러나 아직 이자원이 북방에 있으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누구보다 중요한 포로나 아닌가.'

"대감, 도망가려던 처와 자식들을 찾았사오이다!"

경평군은 이내 들려온 소식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 거사 (3)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