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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72화 (172/213)

< 거사 (2) >

"소용 조씨가 요사스런 무당을 시켜 존귀한 대군을 모해하였으니 이처럼 간특한 꾀를 낸 것은 필경 임금과 종친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것이옵니다."

"어서 추옥하시어 국문을 행해야 할 것이옵니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고변의 바람은 조 소용을 겨냥했다.

실제로 의금부에 끌려온 앵무가 소용 조씨의 악행을 토설하자 대비는 머리를 감싸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이 정녕 있었다면 도저히 참작하여 줄 수가 없소. 의금부는 낱낱이 이를 밝혀내도록 하시오."

소용 조씨는 연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으나 대비는 자신이 그를 비호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허나 그녀의 마음 속에는 미심쩍음이 남아있었다.

이어진 한가지 논의를 물리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창경궁에서는 불길한 일이 많으니 상서롭지 못합니다. 호위청과 금군이 제대로 연계하지 못하는 문제 또한 있으니 창덕궁으로 이어하심이 어떻겠나이까."

신준의 말에 대비가 무어라 하교하기 전, 송시열이 나서서 말했다.

"아직 창덕궁의 중건이 끝나지도 않았사온데 궁실을 옮긴다면 왕실의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요, 멀쩡히 진행 중인 역사(役事)에도 방해가 될 것이옵니다. 구태여 불길함 따위를 들어 지금 이어하실 필요가 있겠나이까."

창덕궁은 인조반정 당시 불타 상당 부분이 사라진 까닭으로 여전히 중건 중에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5년 뒤에야 끝나는 공사이나 명으로부터 받은 돈도 있고 흉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측면도 있어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공사가 다 끝난 것은 아닌 터.

송시열의 간언에 대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니 굳이 이어할 필요는 없을 듯 하오. 소용 조씨는 엄히 문초토록 하고 관련인은 모두 잡아다 죄상을 면밀히 살피시오. 또한······."

적비란 자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아와 이자원이 폐주의 아들이라고 불어버렸다.

이를 논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지만, 누군가 이를 본격적으로 꺼내들기 시작하면 쓸데없는 정쟁에 모든 국사가 말려들 것이 뻔했다.

"도원수를 고변했다는 그 자는 본래 명나라 사람으로, 제 나라의 반간계에 부화뇌동하여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겠소. 배후를 낱낱이 캐내도록 하시오. 도원수가 도성에 돌아오고 나면 그간의 사정 또한 엄히 물어야겠으나······."

대비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정쟁과 음모에 이마를 짚었다.

조 소용이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상대편이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자작한 일일까.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은 명확히 진실만을 고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들마저 믿지 말아야 할지.

안개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제부가 회군을 거부하고, 명나라는 아예 그를 책봉한다는 소리까지 들리며, 조 소용은 제가 음모를 꾸민 것인지 음모에 당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자신까지 곤란하게 만들었다.

잠시 물러나앉아 머리를 식히고 있던 대비에게 아버지 강석기가 면대를 청해왔다.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누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쓸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것은 폭군의 치세입니다. 어린 주상께 모범이 되셔야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그러니 어떻게든 모두를 이끌고 산을 넘어가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비 강씨는 그렇게 말했다.

강석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마, 봉림대군이 오늘밤 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해왔사옵니다."

"대군이요?"

대비의 물음에 강석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제 속을 털어놓기 힘든 작금의 정국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차라리 대군과 만나 모두 털어버리는 것이 어떨는지요. 도원수가 폐주의 아들이라느니, 조 소용이 대군을 모해하였다느니, 우리 집안이 나라를 틀어쥐고 세도하려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로 서로의 눈과 귀가 막혀 있는 형국이 아니옵니까."

종친들과 더이상 대립하면 나라를 위해서도 좋지가 않다.

두문불출하던 봉림대군이 느닷없이 청해온 이야기였지만 강석기로서는 차라리 이것이 반가웠다.

게다가 모략의 피해자인 봉림대군이 먼저 나서서 만나기를 청하였으니, 일을 확대시키지 않고 적당히 조 소용만 잘라내는 선에서 합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대비에게 직접 정치적 공격할수야 없겠으나 뒷말은 무성할 터이니.

"아버님께서 이야기를 잘 나누어보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

봉림대군 이호가 종들을 거느리고 강석기의 집을 찾은 것은 그날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가 다 되어서였다.

초저녁부터 한참 기다리고 있던 강석기는 대문 앞에 봉림대군이 거하는 소리가 들리자 몸소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 시절이 하수상하니 이리 뵙는 것도 오랜만이외다."

강석기의 말에 봉림대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 소용의 모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제아무리 당당한 강씨 외척들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그에게 나름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것이 그가 의도한 바였다.

"중간에 일을 보느라 조금 늦었소이다. 혹 어른을 너무 기다리게 한 것이 아닐까 걱정되오이다."

"가만히 집에 앉아있던 이 사람이야 한 시진이든 두 시진이든 기다려 문제될 것이 있겠소이까. 지체 높은 분이 몸소 찾아드셨으니 그것만으로 영광이지요."

봉림대군과 강석기는 의례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주고 받았다.

이제 안으로 그를 안내하려는 강석기에게 봉림대군이 말했다.

"나는 그간 은인자중하고 있었으나 온 나라가 뒤흔들리는 파국(破局)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대감을 뵈러 왔습니다. 대감께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시겠지요?"

"물론이오이다. 그 부분에서는 우리 두 사람의 뜻이 통하니 다행입니다."

강석기는 그리 말하며 봉림대군의 팔을 잡아끌었다.

대군 같은 귀한 몸이 문간에 서서 계속 대화만 나눌 수는 없지 않은가.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내 대군과 나눌 말이 많소이다."

"그 전에 이 문서 하나를 읽어주시지요. 우상께 꼭 전해야할 말이오이다."

봉림대군은 슬쩍 강석기의 손을 뿌리친 뒤 소매에서 종이 한장을 끄집어냈다.

강석기는 의아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온통 밤하늘을 가리던 구름이 흘러가고, 이내 종이에 비쳐든 달빛이 써져있는 글자를 드러냈다.

「발안중정(拔眼中釘), 평천하(平天下)」

"이것은?"

강석기가 당혹감에 중얼거렸다.

발안중정이란 눈에 박힌 못을 뽑아낸다는 말이니, 곧 간신을 제거하는 일을 뜻한다.

강석기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 퍽!

봉림대군의 종 하나가 허리춤에 숨겨놓고 있던 쇠몽둥이로 강석기의 머리를 내리쳤다.

멀찍이 떨어져 아버지가 대군과 말을 주고 받는 양을 살피던 강문성이 놀라 외쳤다.

"무슨 짓이냐!"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림대군의 가노들이 우르르 쏟아져들어왔다.

감히 예상하지 못한 일에 강석기의 집안 종들은 무방비로 쓰러졌다.

강문성이 급히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아버지에게 달려갔으나, 그 역시 맨손이었다.

- 푹

봉림대군은 강석기를 감싼 강문성의 가슴을 환도로 찔렀다.

사람을 죽이는 불쾌한 감각이 검신을 타고 손에 전해졌다.

'빌어먹을.'

봉림대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불쾌감 때문에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봉림대군은 가노들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호위대장의 부절을 가지고 오라!"

호위청의 대장은 명목상 강석기가 맡고 있었다.

신준이 호위별장이라 하나 역시나 호위청을 몽땅 틀어쥐기 위해선 그 증좌가 필요했다.

봉림대군의 명에 강석기의 집으로 무기를 뽑아든 가노들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꺄아악!"

"역모다! 역모가 일어났다!"

비명이 울려퍼졌다.

방금까지 고요하던 강석기의 저택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강석기의 방문을 우지끈 부수고 들어가 문갑을 뒤지던 이들이 이내 강석기의 부절을 찾아냈다.

종들은 봉림대군에게 부절을 공손히 바쳤다.

"이자원의 아내와 자식들은 제 집에 있는 모양이로군."

봉림대군이 물었다.

이자원이 본가를 비운 상황이니 제 친정에 들어와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건만, 원래 집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훈국신영 근처의 집에 살고 있다 들었는데 사람을 보내어 잡아들이오리까?"

"이미 그쪽에는 경평군이 움직이기로 하였다. 우리는 창덕궁으로 간다!"

벌써 소란이 일어났으니 지금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창덕궁에는 호위청의 본영이 있고, 신준이 휘하의 병력을 대기시켜놓았을 것이다.

"어서 창덕궁으로 가자!"

호위청을 맡고 있는 강석기를 무력화시켰으니 사실상 도성 내에서는 이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창덕궁으로가 가자 이미 제 휘하의 군관들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던 신준이 고개를 조아렸다.

봉림대군은 그에게 부절을 건네주며 소리쳤다.

"역모가 일어나 우상이 죽었소. 대장이 없으니 그대가 서둘러 병력을 통솔하여 창경궁으로 가도록 하시오!"

"예, 대감!"

신준이 씩씩하게 외쳤다.

'역모가 일어나 우상이 죽었다'는 말은 참으로 절묘한 것이었다.

사실만 말하되, 그 이상의 정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모가 일어나 역도들이 우의정을 죽였다는 것인지, 우의정이 역모를 일으키려다 죽었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눈 앞의 봉림대군이 바로 그 역적인 것인지.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는 가장 선임인 신준의 말이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부절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역모가 일어났다니 한시가 급하다! 창경궁으로 가서 주상 전하를 안전한 곳으로 뫼셔야 하느니라!"

모여있던 호위군관들은 그 말에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신경진 대부터 따르던 군관들이 신준을 따라나서자 다른 이들 역시 주춤거리며 합류하기 시작했다.

본래가 옛날 공신들의 밑에 있다가 강석기의 통솔을 받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지 않은가.

"이 병력으로 궐을 뚫어낼 수 있겠는가?"

봉림대군이 신준에게 속삭였다.

"호위군관들을 모두 장악하였으니 금군과도 겨루어 볼만 합니다. 다만 모든 것은 시간에 달려있음이니, 주상을 확보하기 전에 총융청이 수상한 점을 느껴 들이닥친다면······."

총융청은 도성 북쪽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다.

지금의 이 소란이 전해지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서둘러 창경궁의 침전으로 진입해야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한데 붙어있긴 하나, 그 구역만은 명확히 분리되어 그 일대는 금군이 지키는 중이다.

호위군관들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 저벅저벅

"웬 소란이냐?"

"호위청이 이쪽으로는 무슨 일이오?"

금군들이 두런거리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창덕궁 인정문 쪽을 수비하는 그들이 별안간 모여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성에서 변고가 일어났소! 어서 이를 임금께 고해야 하니 길을 비키시오!"

이쪽 군관의 외침에도 금군은 길을 열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일이오? 우리가 직접 고하겠소!"

"시간이 없소!"

그 말처럼 실랑이할 시간은 없었다.

쉬이 비킬 모양새가 아니자 신준은 군관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별장 쯤 되는 높은 양반이 나오자 금군 병사는 잠시 움찔했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때, 신준의 칼이 금군을 찔렀다.

"커헉!"

"호, 호위군이 금군을 죽였다! 역모다!"

"무엇하느냐! 어서 쳐라!"

신준의 느닷없는 행동에 쭈뼛거리던 군관들은 신준의 재촉에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에, 에이!"

달려든 호위군관들은 금군과 창칼을 주고 받았다.

이 소란이 창경궁의 침전까지 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거사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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