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사 (1) >
"대군, 서, 설마 거병을?"
"지금은 말로써 간언할 때를 넘어섰습니다. 아예 나라가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이자원이 책봉을 받았다는데 자전은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인척이니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봉림대군은 둘러앉은 종친들을 보고 말했다.
종친들은 대군의 선언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발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숨기고 있기보다는, 처음부터 믿을만한 이들을 불러놓고 터뜨린 말인 것이 컸다.
"삼군문이 빠져나갔다 하나 궁궐의 방비는 든든할 것입니다. 세조께서는 노산군······ 단종이 정혜공주의 사저에 갔을 때를 노려 거사하셨다지만 지금은 그런 요행도 바랄 수 없을 터입니다."
그 말에 봉림대군이 입을 열었다.
"호위청이 이쪽에 가담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호위청이······."
미심쩍인 표정을 짓고 있던 회은군 이덕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당시의 공신들이 자신의 군사세력을 기반으로 구성한 부대다.
이들은 호위4청이라 하여 공신인 이서, 김류, 이귀, 신경진으로 하여금 군관 100명씩 분속케 하였는데, 이귀가 죽고 나자 인조는 그 아들 이시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그러나 이서는 죽었고, 김류는 정축옥사 때 자결했으며 이시백은 인조를 지키지 못한 죄로 귀양당했다 지금은 야인으로 머물고 있는 상황.
고종은 금군(禁軍)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호위청을 공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폐단을 없애려 노력했다.
"여러 공신들이 모두 죽거나 물러난데다, 그 대장 역시 우상이 맡고 있는 판인데 대군에게 가담할 자가 있겠습니까?"
"설마 좌상 대감이 가담하기로 하였소?"
봉림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진은 공서의 거두였으나 충실한 왕당파.
고종의 고명을 받아 아예 저쪽에 붙어버렸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하고 있으니 물어보지도 않았다.
봉림대군이 포섭한 쪽은 다른 사람이었다.
"평흥군(平興君)이오."
바로 신경진의 아들 신준(申埈)이었다.
오위의 부총관과 부사를 거쳐 지금은 병든 아버지 신경진에 대한 배려로 호위청 별장이 된 이였다.
그는 반정 후 노비를 함부로 가로챌 정도로 행실은 바르지 않은 이였으나, 나름 무재는 있었던 덕이다.
"호위청은 본래 훈신(勳臣)들이 제각기 군관을 거느리고 있었거늘, 수렴이 들어서고 난 뒤로는 우상이 함부로 제 사람을 집어넣는다며 불만이 많은 모양입니다."
봉림대군의 말에 여러 종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이것은 고종 대부터 이어져온 일이지만, 그는 훙서한지 오래이니 신준의 불만은 대비를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호위청이 궁궐 외각의 수비로 밀려났다 하나 엄연히 숙위군의 하나이니 그가 가담한다면 일이 쉬워지겠구려."
경평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소. 이미 간신들이 종친을 모해하고 역적마저 다스리려 들지 않으니, 우리 종친들이 나서서 나라를 바로잡는 수밖에 없겠소. 기일을 정해 의병(義兵)을 일으킵시다."
종친들은 군권은 없다 하나 각자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만 합쳐도 족히 천 명은 나올 것이다.
여기에 호위청이 가담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도성을 장악하고 나면, 도원수는 어찌 처리하실 작정이외까."
회은군이 말했다.
설마 그가 반역을 일으킨다면?
"왕윤의 계책이라도 쓰실 요량이시오?"
"그 방법도 생각 중입니다. 허나 실패한다면······."
봉림대군이 말했다.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조용히 되뇌였다.
'조선 백성 누구도 폐주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네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다면 무수한 시체의 산을 쌓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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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들 앞에서는 일이 다 되어놓은 것처럼 자신감을 내보인 봉림대군이었으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평흥군이 대의를 위해 죽을 것을 맹세하니 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오. 이제 거사는 반쯤 된 것이나 다름없는 듯 하오."
봉림대군이 추켜세웠으나 신준은 고개를 저었다.
"호위청은 이미 위세를 잃고 궁궐 외곽으로 밀려난지 오래올시다. 명정문(明政門) 안쪽 궐내각사부터는 죄 금군의 관할이지요. 아마 소관이 가담했다 해도 쉬이 뚫어내지 못할 것이오이다."
당금 조선에서 가장 정예한 부대라 하면 훈련도감이고, 그 다음은 어영청이다.
그러나 왕실의 호위만큼은 금군과 호위청이 담당했는데 훈신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은 금군을 주로 키웠다.
내금위와 겸사복, 우림위 등을 통틀어 금군으로 통합하는 한편 호위청 본영은 임금이 머무는 창경궁이 아닌, 창덕궁의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 그대로 두어 필요 병력만을 끌어다 쓴 것이다.
그런 판이니 신준이 가담했다고는 하나 쉬이 창경궁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봉림대군은 필요성을 느꼈다.
"소관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호위군관 100여 명 뿐이니 확실히 궐을 장악할 수 있을지 미지수올시다. 만약 궐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총융청이나 수어청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내가 어찌하여 보겠소."
봉림대군은 신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공으로 어렵다면 꾀를 써야할 터였다.
"방도가 있으시오이까?"
"조 소용이 요사한 무당을 시켜 종친을 모해하려 들었소. 이것이 한가지 방도가 될 것이오."
봉림대군이 말했다.
신준이 의아해하는 사이 봉림대군은 물렸던 하인을 다시 불러들여 말했다.
"그자를 데리고 오라."
이내 꽁꽁 묶인 적비가 끌려 왔다.
'역모'를 고한 증인을 대하는 취급이라기엔 변변찮았지만, 정작 적비는 그것을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계신 모양이구려."
신준을 흘긋 본 적비가 말했다.
봉림대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자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자원을 제거하는 것?'
적비는 명백히 봉림대군을 대비와, 이자원과 싸우는 방향으로 몰아갔다.
일이 성공한다면 당연히 봉림대군은 왕명을 내려 이자원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봉림대군이 실패한다면.
그것도 적비의 계산 안에 있을까.
봉림대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런 생각은 집어넣고 지금은 거사에만 집중할 때였다.
"너는 지금 의금부에 가라. 조 소용이 요사한 무당을 동원해 임금을 저주하고 종친을 모해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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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내놓은 계책이 만족스러웠다.
실상 이것은 적비의 말에 따른 것이지만, 그런 사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이자원이 고명과 인신을 받들어 조선왕으로 즉위하면 그 정통성은 짐에게서 나오는 것. 그러나 조선이 이자원을 제거하면 그 또한 요동의 민심이 흔들릴 터이니 어찌되었든 조선은 한동안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 사이 사방에 들끓는 역도들을 토벌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도살인이요, 이이제이였다.
숭정제는 신료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설명했으나 그들은 그저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고 고개를 조아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쓸모없는 자들. 백성을 착취하고 조세를 착복할줄만 알지, 이런 꾀를 내어놓지도 못하는 자들이 아닌가.'
숭정제는 혀를 찼다.
실상 저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황제 본인이었으나 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의 시선이 한쪽에 서있는 금의위도지휘사 낙양성을 향했다.
대대적인 비리가 적발되어 갇혔으나 '황제의 성은'으로 다시 풀려나 복직한 낙양성이었으니 그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산해관의 성벽은 두텁고 금군까지 나가 수비를 돕고 있는 중이니 조선이 혼란에 빠지면 감히 넘볼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나라가 다시 태평해질 때까지는 불과 수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니, 성상의 헤아림이 지극히 밝사옵니다."
낙양성의 대답에 숭정제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번엔 다른 쪽으로 자신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물었다.
"사천의 전황은 어찌되어가고 있는가?"
"일진일퇴(一進一退) 중이옵니다. 좌량옥(左良玉)과 정계예(丁?睿) 등이 힘껏 맞서 싸우고는 있사오나 장헌충의 이름을 내세우고 여러 군데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지라······."
"그것 때문에 이리도 지지부진하단 말이냐."
숭정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실상 그가 송산에서 정예군을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었으나, 황제 앞에서 그것을 고할 배짱이 있는 자는 남아있지 않았다.
"어찌 어진 백성들이 장헌충 같은 역적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겠는가. 필경 본래가 도적이었던 자들이 틀림없으니, 좌량옥에게 명을 내려 모조리 참하도록 해라. 놔두었다간 반드시 백성에게 해로울 것이다."
숭정제는 냉혹하게 명령했다.
"폐하, 하오나 백성들은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고 역도에게 합류하는 경우가 많사옵니다. 적당히 타일러 돌려보내게 함이 어떻겠나이까."
"장헌충은 이미 조정에 항복했다가 배신하고 나선 자다. 그 수하들이라 한들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느냐. 게다가 이 대명의 종왕마저 그 손에 죽어나가는 중인데 어찌 충의있는 자가 그런 곳에 가담한단 말이냐. 모두 죽여라."
숭정제의 황명은 법과 같았다.
물론 실제에 있어 지켜지지 않는 일이 허다했지만-주로 착복할만한 재물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적어도 사로잡힌 반적들을 죽이라는 명령 정도는 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즉시 이행될 터였다.
신료들은 여전히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고 읍을 했다.
숭정제는 그 명령을 끝으로 내전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황제는 이때까지 말로써 열심히 국사를 돌보았으니 이제 그 실행은 신료들의 몫으로 넘어온 것이다.
'황상께서 이번 일도 실패하면 무슨 반응을 보이실런지.'
낙양성은 한숨을 쉬었다.
조선과의 화약.
겨우 맺은 그것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리는 초강수가 아닌가.
만약 실패한다면 숭정제는 이제껏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그랬듯, 만만한 신하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아마 자신이 될 가능성이 높으리라.
'동창으로 또 들어갈수도 있겠군.'
낙양성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황제를 더 믿어야 하는가?'
결단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적비의 계획이 성공하든, 그렇지 않든.
낙양성은 더이상 황제에게 신뢰와 충성을 계속 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한번 금이 간 것이었기에.
'결국은 나를 이런 지경까지 몰아넣었구나.'
그는 적비가 자신에게 따로 보낸 신호를 기억했다.
자신을 고발하는 투서를 보내 한번 파멸시킨 장본인이 바로 적비였으나 그의 손에 잠자코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했다.
"빌어먹을."
낙양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금의위의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삼대가 되도록 금의위에서 봉직한 집안이니 동창에 한번 다녀오는 정도로 수족이 잘려나가지는 않았다.
이들은 숭정제의 말보다 그의 말을 우선해서 듣는 심복 중의 심복.
낙양성은 조선에서 날아올 소식을 기다리며, 우선 그들을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너희는 지금부터 남경 조정에 가있도록 해라. 반드시 황명이 아니라 내 말에 따라야 하느니라."
형식뿐이긴 하나 남경에는 이곳 북경과 같이 조정이 있고 각부의 관직도 존재한다.
금의위 역시 마찬가지다.
수하들이 모두 물러나고 나자 낙양성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정녕 살길이 이것 뿐인가? 나라를 반쪽이나마 남기는 것?"
< 거사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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