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70화 (170/213)

< 칼날 (5) >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게로구나.”

봉림대군은 기어이 환도를 집어들었다.

이자원이 광해군의 아들이라니.

그런 말을 믿을만큼 그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어디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정말 네놈이 죽고 싶은게냐?"

"그리 믿고 싶으시면 소인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나이다."

적비가 고개를 조아린채로 말했다.

“하오나 정말로 사직에 화가 닥쳤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있겠지요. 소인의 말을 믿으실지 그러지 아니하실지는 전적으로 대군의 몫입니다. 벌써 황제가 이자원을 책봉한다는 이야기가 요동 전역에 퍼지고 있을테니까요.”

적비가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요점이 아니다.

숭정제가 정말 이자원을 폐주의 아들이라 여겨 책봉했고, 그가 부화뇌동해 역심이라도 품는다면.

“너는 방금 명나라에 충성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너희 황제의 명을 어기고 내게 이것을 알려주느냐.”

“소인은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 명나라의 충신이니까요.”

스스로를 충신이라 칭하는 적비였으나, 대군은 감히 그를 비웃을 수 없었다.

한쪽이 일그러진 얼굴로 빛내는 눈빛을 보고 어찌 그리하겠는가.

“이것이 반간계가 아니라는 보장은?”

황제가 이자원과 조정을 갈라놓기 위해 쓰는 계책이라면.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오나 대군께서는 이로써 무엇보다 강한 명분을 쥐게 되셨지요.”

봉림대군의 입꼬리가 내려앉고, 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감히 나를 부추겨 도원수를 쳐내기라도 할 셈인가?”

“대감께서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리셨습니다.”

적비는 대군의 방문 앞에 지고 온 봇짐 하나를 풀어도 되겠느냐 물었다.

봉림대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적비가 그것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피투성이가 된 채 두손두발과 입이 묶인 여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읍! 으읍!”

“이게 무슨······.”

당황하는 봉림대군을 향해 적비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여인은 조 소용의 심복입니다."

"조 소용의?”

봉림대군이 물었다.

소용 조씨라 함은 분명 늦둥이 이복여동생의 생모가 아닌가.

동생이라 하나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는데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판이니 그리 신경쓰지 않고는 있던 봉림대군이었다.

그나마 이자원의 아들과 혼인시킨다는 이야기 때문에 근래 잠시 신경을 썼을 뿐.

'대비 옆에 붙어 입 안의 혀처럼 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은.'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봉림대군은 적비를 노려보았다.

"이 여자의 말로는 조 소용이, 소인을 붙잡아 대군께서 괴이한 노래를 퍼뜨리라 시켰다는 증언을 받아내고자 했다는군요.”

"무엇이?"

대군의 낯이 변했다.

"그것이 정말이냐?"

"믿지 못하겠다면 은밀히 궁중에 줄을 대어 알아보시지요. 이 여인은 바로 조 소용의 복심이니 허튼 말을 지껄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봉림대군은 주먹을 빠득 움켜쥐었다.

조 소용은 이제까지 별다른 두각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일개 후궁이었다.

나이도 젊은데다 한갓 옹주의 어미 따위에 불과하니 어찌 혼자 이런 흉계를 꾸미겠는가.

'이는 필시 대비가 나를 제거하려 함이다.'

봉림대군은 철석 같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외척을 물리라는 내 요청을 거부한데다, 이런 식으로 나를 치려 들어······.’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형수가 맞는가.

봉림대군은 지독한 좌절감을 느꼈다.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고개를 들어올린 봉림대군이 명령했다.

“······저자를 잡아라.”

대군의 집에는 힘쓰는 하인이 깨나 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적비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자원이 역적의 아들이란 것을 고할 증인이다. 잡아다 가둬두어라!”

적비는 우악스런 손길에 잡혀나가면서 한줄기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장군.'

도성의 상황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자원에게는 여태까지처럼 요동에 웅크리며 끌 시간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대는 태조가 되려할 것인가, 충무공이 되려할 것인가.'

===

가도는 조선과 명나라 간의 중요한 무역 거점이다.

송산 전투를 전후로 하여 무역이 끊어지긴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현재는 조선 상인과 명나라 상인이 허다하게 드나드니, 대개 명나라의 소식이 여기로부터 전해지곤 했다.

그러나 여태껏 조정이 받아본 가도의 소식 중 이만큼 황당한 것은 없었다.

“화, 황제의 칙사가 가도에 들렀다가 요동으로 떠났는데, 떠도는 말로는 ‘이자원이 폐주 광해의 아들이니 조선왕으로 책봉하기 위함’이라 하였사옵니다.”

“무어라?”

대비 강씨 이하 신료들은 모두 놀란 눈을 떴다.

“이자원은 성산 일문으로 그 세계(世系)가 분명한데 어찌 명나라는 이리 흉험한 말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칙사가 다녀간 것은 확실한가?”

“예, 마마. 평안 감사가 분명히 확인하고 서둘러 파발을 보내 전해온 소식이옵니다.”

그 말에 조정의 분위기는 벌떼처럼 들끓었다.

영수로서 그것을 간신히 진정시킨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

"명나라는 선묘조에서 종계를 변무하기 전까지 우리 왕실 또한 간신 이인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기록하였으니, 저들의 무지가 이와 같사옵니다. 이는 터무니 없는 말임을 분명히 하고, 명에 사신을 보내 엄중히 항의하소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등허리에는 땀이 축축하게 배였다.

이것은 반간계다.

패전국이지만, 여전히 명목상으론 조선의 상국임을 이용한 반간계.

구태여 칙사가 육로가 아닌 가도를 거쳐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조선은 명목상으론 임금과 세자께서 등극할 적 명에 책봉을 받았으나, 실상은 자주하여 결정해왔사옵니다. 하물며 인조대왕께서 명의 고명과 인신을 받드신지 오래인데 이를 손바닥처럼 뒤집고 이자원을 책봉하다니요!

사람을 보내 엄중히 항의해야할 것이옵니다.”

겨우 화약을 맺었더니 뒤통수를 치고 이따위 장난질이라니.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었다.

이자원이 정말 이 책봉을 빌미로 도성을 친다면 어찌하느냐는 것.

조정과 이자원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여기에 넘어가면 파국이었다.

“도원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직 요동으로부터 장계가 올라오지 않았사옵니다. 가장 근래에 들어온 장계에는 요동의 정세가 혼란하여 사교가 난을 일으켰다는 이야기 밖에······.”

"당장 왕명을 내려 이자원을 불러들이소서! 전쟁이 끝났는데도 장수가 함부로 외방에 나아가있으니 이런 참소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나이까! 도원수를 불러들여 이 사실에 대해 분명히 추궁해야할 것이옵니다.”

그 말에 대비 역시 자신도 그러고 싶노라 받아칠 뻔했다.

그러나 이미 외척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말을 꺼낸다면 그 뒷감당은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도성에 앉아있는 그녀와 조정 중신들로서는 정말 북방의 정세가 혼란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최명길은 대비에게 말했다.

"도원수가 페주의 아들이라는 말은 허언임이 분명하나, 이대로 가만히 넘어갈 일도 아닙니다. 도원수가 역모의 뜻을 품지 않았다 해도 조정이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알겠나이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최악이었지만, 결백을 증명한다며 화약을 깨고 명나라를 치는 것 역시 조선이 감당할 수 없었다.

십중팔구 수많은 생령을 산해관 아래에 묻게 될 것이며, 갓 살아나고 있는 조선의 경제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질 것이다.

“······알겠소. 내 방법을 강구해보리다.”

대비 강씨는 동생을 불러들여서라도 이자원에게 현재의 상황을 전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이리 꼬여들어간 것인지.

그리고 정말 이자원은 결백한 것인지.

대비의 머리가 아파왔다.

===

으리으리한 집에 종친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체높은 왕족들이나 가마도 타지 않고 야음을 틈타 도둑처럼 모여든 그들이었다.

“순라꾼들에게 걸려들지는 않았소?”

“괜찮소이다. 삼군문이 죄 요동에 가있으니 좋은 점도 있구려. 경비가 많이 느슨해졌소.”

종친들은 그리 숙덕거리며 회합을 주선한 집주인을 쳐다보았다.

“다들 잘 오시었습니다.”

단단한 인상의 청년, 봉림대군이 말했다.

“인평대군은 왜 보이지가 않소?”

“제가 오지 말라 일렀습니다.”

봉림대군이 누군가의 물음에 답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한 사람은 살아남아야 할 터.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도성에 돌고 있는 소문은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도원수가 북방에서 돌아올 귀인이라느니, 폐주의 아들이라 상국의 책봉을 받았다느니 하는 소리 말이오?”

경평군 이륵이 말했다.

그는 선조의 아들로 봉림대군에게는 작은할아버지뻘이 되었으나 말을 낮추지 않았다.

그의 인품이 대단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신은 선조의 곁가지 아들이며 상대는 적통 대군이자 오늘의 회합을 주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그의 광패한 성정을 두고 이미 실성한 사람이라고까지 일렀으나 사실 경평군은 실성하기는커녕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사람이었다.

“조당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어찌 결론이 났는지는 아십니까?”

“잘 알지 못하오. 대군께서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소.”

“여러 신료들이 중지를 모아 이자원을 소환해 추국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비께서 이를 물리치고 알아서 처리하겠다 하셨다 합니다.”

봉림대군의 말에 종친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어찌 그런!”

“자고로 역모는 고변만으로도 이름이 나온 자를 모두 잡아들여 공초하는 법이거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런 일을 숱하게 보고 겪었다.

헌데 가장 위험한 인간이, 심지어 명나라로부터 책봉까지 받는다는 인간이 거기에서 예외라니.

“더 기가 막힌 것은 실제 이자원이 폐주의 아들이며,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것을 증언해줄 이가 있소.”

봉림대군이 눈짓하자 하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적비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우리 종친들을 쳐내기 위해 대비 역시 조 소용을 시켜 음모를 꾸몄지요.”

역시나 흠씬 얻어터진 앵무가 철퍼덕 앞에 널부러졌다.

귀한 종친들은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어서 여기 모인 종실들에게 그들의 음모를 고하라.”

봉림대군의 의도대로 앵무는 조 소용이 꾸몄던 대강의 계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금부도사 정선흥을 시켜 강제로 봉림대군이 배후에 있다고 조작하려 했다는 이야기에 종친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이어서 적비가 담담한 표정으로 이자원이 사실 정말로 광해군의 사생아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들은 영풍군의 일처럼 우리 종친들의 입을 틀어막고 세도를 하려는 것을 넘어, 아예 인조대왕부터 이어지는 종사마저 바꾸려 들고 있소.”

봉림대군은 흉흉한 표정으로 주위를 천천히 뜯어보며 말했다.

“더이상 나라가 거꾸로 흘러가는 것을 놔두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이제 종실 사람으로서 대의를 위해 움직이고자 하는데, 누구 막아설 자가 있다면 지금 이야기하시오!”

서로를 향해 겨누고 있던 칼날이, 지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칼날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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