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날 (4) >
삿갓을 뒤집어쓴 사내는 이제까지 깔고 앉아있던 돗자리를 걷었다.
잠시 주위를 티나지 않게 살핀 그가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사내의 앞에 험상궂게 생긴 남자 한 무리가 나타났다.
'······.'
행색으로 미루어보아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은 아니리라.
척 보기에도 힘깨나 써서 먹고 사는 왈짜들이었다.
등 뒤에서도 또한 그런 왈짜들이 버티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사내는 당황한 기색없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초로의 여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은 채 왈패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조 소용의 손발 노릇을 하고 있는 앵무였다.
"근자에 괴이한 일이 많아 귀한 분의 근심이 깊으시네. 혹 도성에서 동남동녀를 꾀어 불온한 노래를 퍼뜨리는 자가 있다던데, 혹시 젊은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도성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겠구려."
사내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앵무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여인은 뒤편에 선 왈패들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저자를 잡아라. 무슨 연유로 감히 괴설을 퍼뜨렸는지 낱낱이 캐어낼 것이다."
앵무의 말에 왈패들이 경박한 웃음을 지으며 사내에게 다가섰다.
이쪽은 여남은 명은 족히 되니 곧 저자를 잡아 '자백'을 받는 것은 손쉬우리라.
말이 자백이지 적당히 주물러주고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는 것이지만.
앵무는 조 소용이 자신을 불러다가 은밀히 내린 명을 떠올렸다.
'옛날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 윤원형)의 일로 종실의 견제가 심하네. 아마 도원수도 그 때문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원수가 빨리 회군을 해야 국혼을 이루든 할 것을, 평생 놀고 먹기만 할줄 알던 종친들 때문에 일이 어그러지게 생겼지 않은가.
한시바삐 외척이 득세해야 그 사돈이 될 자신도 덕을 볼 터.
'영풍군이 이미 도원수를 모해한 일로 투옥까지 되었네. 종친들이 외척을 견제한다는 핑계로 고깝게 보고 있음은 온 도성 사람이 다 아는 터. 마침 사이한 노래가 퍼지고 있으니, 그 배후가 봉림대군임이 밝혀지면 어찌 되겠는가?'
조 소용은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악녀답게, 이러한 모략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였다.
앵무를 통해 노래를 퍼뜨리는 자를 찾아다 잘 다져준 뒤, 의금부에 투옥시켜 봉림대군을 쳐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의금부에는 내가 천거하여 들어간 정선흥이 있으니, 일을 그리 만드는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일세. 자네는 범인을 찾아다가 손을 봐주어.'
앵무는 한낱 천민 무당에 불과하나, 그렇기에 도성의 밑바닥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아들은 역시 뒷골목의 왈짜 패들과 어울리고 있었으니 힘쓸 사람을 모으는 것도 쉬웠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소용께서 입 싹 씻기도 좋고.'
앵무는 조 소용이라는 사람을 알만큼 알았다.
결코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되었다.
"이놈아, 오늘 제삿날 받아놓은줄 알거라."
앵무의 아들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끼와 백정칼을 꼬나든 왈패들이 사내를 둘러싸 다가왔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이내 사내는 푹 눌러쓰고 있던 삿갓을 벗더니, 그것을 휙 던졌다.
"헛!"
별안간 삿갓이 날아오자 왈짜가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뽑아든 칼이 왈짜의 가슴을 푹 찔렀다.
"커헉!"
"순덕아!"
피를 토하며 쓰러진 자를 보고 왈패들이 소리를 질렀다.
분노에 차 사내를 돌아본 그들은 이내 숨을 삼켰다.
삿갓 아래에 숨겨져 있던 사내의 얼굴은, 절반 정도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뭉툭한 얼굴에 튄 피를 슥 문질러 닦으며 사내가 말했다.
"너희 같은 놈들이 붙을거란건 예상하고 있었다만은······."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노인네가 끼어있을줄은 몰랐군.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불어야겠다."
요동 전역에 나붙은 용모파기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지져버린 적비의 안광이 무섭게 번득였다.
"다, 당장 저놈을 붙잡아라! 어서!"
미묘한 불안감을 느낀 앵무는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그녀의 명령에 왈패들이 일제히 적비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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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이 되지 않아 상황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적비는 터벅터벅 걸어가 떨어진 삿갓을 주웠다.
적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제법 소란이 빚어졌지만 방해는 없었다.
괜히 끼어들어 피보기 싫었는지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았는데다, 이곳은 천민들 사는 반촌 근처라 군사들도 접근을 꺼려하는 터였다.
그말인즉슨,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서 앵무의 포를 떠도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그것을 눈치챘는지 앵무는 털썩 주저앉은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들은 이미 죽어 나자빠져있고, 그 동료 왈패들도 죄 마찬가지 운명을 맞았다.
적비는 검을 들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이자원이 조선 폐주의 아들임은 알고 있었다.'
증인이 될만한 자들은 모두 죽은 탓에 물증은 없었지만 적비는 그리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고하지 않았다.
우선은 원수인 청을 들이치는 것이 급했기에.
천하에서 청을 멸할 수 있는 자는 이자원이 유일하다 믿었고, 그는 역시나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명에 칼을 들이밀지만 않았더라면.'
이자원이 누구의 아들이든 적비는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을 멸한 이자원은 폭주했고, 암군의 오판이 더해지며 명은 멸국의 위기까지 치달았다.
지금은 세폐를 받기로 하며 화약을 맺어 잠잠하지만, 그는 언제 다시 산해관을 넘으려 들지 모른다.
'지금쯤 분위기가 무르익었겠군.'
요동을 떠나오며 그는 금의위의 끈을 통해 북경에 이자원의 비밀을 전달했다.
그것을 써먹을 수 있는 계책까지 더하여.
'칙령이 떨어지면 제아무리 물증이 없더라도 이자원은 폐주의 아들이 된다.'
조선 조정이 진실로 이를 믿든 말든 상관없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적비가 퍼뜨린 노래에 더하여, 이자원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폭풍이 될테니까.
덮고 넘어가려 한다면 그러는대로, 방법은 따로 있었다.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적비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내 나라에 충의를 다할 뿐이니.”
숭정제와 이자원, 어느쪽이든 명나라를 위해선 사라져야 할 작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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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사교(善友邪?)?”
이자원의 물음에 박철균이 대답했다.
“예. 한인과 여진인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교이온데 승려도 아니고 도사도 아닌 자들이 사사로이 도장에 모여앉아 향을 사르고 기도를 올리고 있사오이다.”
“붉은 깃발을 두르고 주도자들을 선우(善友)라 칭하며 백성을 미혹하고 있으니 가만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선우는 불교에서 스승이나 친구를 이르는 말이니, 사실상 불교의 이단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당수는 누구인가?”
“이국량(李國梁)이라는 자로 청나라의 옛 기인(旗人)입니다.”
“이국량이라.”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리가 사이하고 모이는 무리가 예사롭지 않구나. 이러한 자들을 놔둔다면 옛날 황건적과 같이 두고 두고 근심이 될 것이다. 모두 색출하여 주모자는 목을 베어라.”
이자원의 명령이 떨어지자 박철균은 그것을 받들어서 나갔다.
이 시대에 만주에서 백성들이 믿는 종교라 하면 대개 불교나 도교다.
그러나 제대로 배워 설법할 수 있는 승려의 수는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으니, 자연 이런 사이비가 성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군, 백성들은 어리석습니다. 선우교에 미혹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상황이 여기까지 온 것은 바르게 이끌 사람이 없는 까닭이 큽니다.”
요동의 행정을 보좌하고 있던 이암이 말했다.
"허면?"
"조선에는 고찰(古刹)과 중이 많으니 그들로 하여금 요동에 건너와 설법케 하시지요. 이는 분명 조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암의 제안에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종교를 통하여 저들을 다스리란 말이군."
승려는 도첩을 받아 조선의 종단에서 관리한다.
조선 출신 승려들이 종교적 지도자로서 이들을 다스린다면, 만에 하나 피지배층이 집단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려 할 때에도 통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또 불도가 허망하다 하나 사람의 성정을 다스리고 내세를 두려워하게 만드니 거친 야인들을 교화하는데도 효과가 있겠지요."
이암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하자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내린다. 조선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여러 절에 둘 것이니 이제부터 다른 사이한 종교에 미혹되는 자는 가차없이 베어라.”
여기까지 얘기한 이자원은 덧붙여 말했다.
“다만 남만교는 허용한다. 믿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믿도록 하여라. 허나 서로 자기가 믿는 도를 내세워 충돌한다면 엄히 다스릴 것이다.”
키리시탄들이 팔참에 정착한 이래로 기독교는 알음알음 인근 지역으로 퍼져가는 모양새였으니, 굳이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장계에는 '사교의 난이 일어나 진압하는 중'이라고 쓰던 이자원에게 소문 하나가 흘러들어왔다.
“책봉이라니.”
이자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제법 머리를 썼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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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대군 이호는 대비와의 만남 이후 며칠간 칩거했다.
대비는 끝끝내 타협을 거부했다.
이자원을 정승으로까지 올리려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외척으로 하여금 나라를 농단케 하려는 뜻.
'대비께서 그런 뜻을 품고 있으셨을줄이야······.'
어찌해야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우 인평대군과 여러 종친들이 찾아왔지만 모두 물리친채, 봉림대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버지 인조대왕과 형님이신 고종대왕이 간신히 수습한 나라다.
이대로 두고만 볼 것인가.
점차 갈등하고 있던 마음이 한쪽으로 쏠려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대, 대감 마님, 웬 손이 찾아들었습니다요."
바깥에서 하인이 부르는 소리에 봉림대군은 방문도 열지 않고 말했다.
"모두 물리치라 이르지 않았는가."
"이, 이자는 도원수의 막하(幕下)에 있던 자인데 종사에 관한 중대한 일로 고할 것이 있다기에."
종사까지 운운할 정도라니.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봉림대군은 잠시 생각 후 입을 열었다.
"들이거라."
들어선 자는 겉보기로는 삿갓을 뒤집어쓴 거사(居士)였다.
이내 그가 삿갓을 벗자 봉림대군은 흉한 몰골에 침음성을 내뱉었다.
"대감께서는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찡그리고 있던 봉림대군의 눈에 차차 얼굴의 윤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열심히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설마 훈련대장, 아니 도원수가 출행할 때마다 줄곧 시립해있던······."
"그렇습니다."
적비는 덤덤하게 말했다.
언제나 눈에 띄지 않게 존재감을 죽이고 있던 그였으니 원래 같으면 봉림대군도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의 용모파기가 전역에 뿌려진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군을 배신하고 죄를 저지른 간자라 하여 사방에서 추포하려 달려드는 중인데, 용케 이곳까지 왔군."
봉림대군은 당장에라도 그를 잡아넣을 것처럼 을러댔다.
실제로 그의 눈길은 뒤에 걸려있던 환도에 닿아있었다.
"소인은 본래 명나라 사람입니다. 나라에 충심을 다하고 있으나 여태까지는 조선에 해를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겁간했다느니하는 죄목에 이르러서는 말할 가치도 없지요."
대군은 당당한 태도에 잠시 할말을 잊었다.
따지고 보면 적비는 봉림대군과 특별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니 그 결백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그의 말에 신뢰감을 더했다.
"허면 어찌하여 도원수가 수하인 그대를 잡아들이라 명했는가?"
봉림대군의 물음에 적비가 천천히 말했다.
"도원수는 역심을 품고 있습니다."
"뭐라?"
봉림대군이 화들짝 놀랐다.
이 나라가 전주 이씨의 나라가 된지도 삼백년이 되어가는데 감히 역심이라니.
그가 순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적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자원은 폐주의 아들입니다, 대감. 황제가 조만간 조칙을 내려 그를 책봉할 것입니다."
< 칼날 (4)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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