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날 (3) >
"조선을 물릴 수 있는 계책이 있다."
뜬금없이 숭정제가 외친 말에 신하들은 놀랐다.
"송산의 패전으로 화약을 맺기는 하였으나 실상 이는 오랑캐에게 세폐를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계속 이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신료들은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 송산의 패전으로 각지의 반란은 커져가는 판인데 화약을 어기면 무슨 재주로 조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그 말이 다들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다들 아무말하지 못했다.
패전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황제는 누구든 목을 날려버릴 준비가 되어있었으니.
"황상께서 이르시는 바는 바로 이이벌이(以夷伐夷)의 책략입니다."
대전 한 구석에 서있던 낙양성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다.
동창에 끌려가 혹독히 문초당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숭정제는 패전 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를 옥에서 꺼내 다시 금의위의 장에 앉혔다.
"이자원에게 붙였던 간자가 중요한 정보를 알려왔으니 일이 잘된다면 저들은 곧장 두 패로 나뉘어 싸우겠지요."
그자는 북경까지 직접 와서 그것을 고해바치진 않았다.
숭정제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저 이빨달린 조선을 꺾어낼 계책을 바친 자이거늘.
"혹 그자가 돌아오면 후히 포상하도록 하라."
낙양성은 잠시 머뭇대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하겠나이다."
숭정제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번장(蕃將) 이자원에게 고명과 인신을 내리겠다. 예부는 속히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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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최명길이 대비 강씨를 찾았다.
그는 명재상답게 대비를 성심성의껏 보좌하였는데, 대개 국사의 실무적인 측면은 그가 도맡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부분을 최명길에게 맡겨두고 있는 대비였지만 그와 정략적인 부분을 의논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영풍군을 풀어주심이 가하옵니다."
최명길의 말에 수렴 너머의 대비는 이마를 짚었다.
"근거없이 헐뜯는 말로써 도원수를 모해하였으니 어찌 국문치 아니하겠소?"
"능원대군이 성치 않은 정신에도 나와 곡하고 있으니 모양새가 좋지 않사옵니다. 영풍군이 난언을 하였기는 하나 대군은 인조대왕의 하나 남은 동생. 자칫 종친과 외척의 싸움으로 비춰질 수가 있나이다."
대비는 한숨을 쉬었다.
중외에서 외척 세도 운운하는 것은 그녀도 익히 알고 경계하고 있는 바였다.
자신 스스로도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궁리하고 있는 판이건만, 세간의 시선이 그러하니 오히려 자신의 발목이 잡히는 판이 아닌가.
"더이상 종실과 외척의 사이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돌아서는 아니되옵니다. 영풍군을 국문함으로써 도원수를 지키려는 뜻은 대개 전해졌으니 이만 석방하심이 가할 것이옵니다."
최명길은 최대한 양쪽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대비가 제 제부를 지키기 위해 억울한 종친을 잡아가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그간 사람을 죽이고도 벌받지 않던 종친들의 눈에는 무슨 뜻으로 보이겠는가.
왕실의 권위가 드높으므로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저들이 물 밑에서 어떤 소리를 수군대고 있을지는 훤히 보였다.
'주상께서 장성하셔서 친정하신다면 모르되,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봉합해가며 움직여야 한다.'
훗날 영풍군을 벌주어도 임금이 주어야 하는 법.
"영상의 뜻대로 하시오."
끝내 대비의 조령이 떨어지자 최명길은 길게 읍하며 답했다.
"하옵고 좌상 신경진이 병들어서 나랏일을 돌보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체직을 청하였사옵니다."
"하아, 좌상이."
신경진은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사람됨이 침착하고 꿋꿋하였다.
왕실의 인척인데다 무신 출신이라 그간 믿고 쓸만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명도 이제 다해가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해를 넘기고 얼마 있지 않아 졸하는 것이다.
"하면 후임을 정해야겠구려."
"좌상은 도원수를 천거하였사옵니다."
그 말에 대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자원을?
"이미 국구가 정승을 맡고 있는데······ 게다가 아직 나이가 많지 않고 수령으로 있던 경험도 없으니 정녕 괜찮겠소?"
"세조대왕 조에서 구성군이 이립(而立,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로 영의정을 지냈으니, 사람이 중요하지 그 연치는 문제될 것이 없사옵니다. 또 정식으로 수령으로 보임받지는 않았으되, 도원수가 요동에서 행하고 있는 군정이 곧 수령의 업무나 다름없지 않겠사옵니까."
최명길이 간하자 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좌상이 큰일을 해주는구려."
신경진은 따지자면 종실의 편이다.
그런 그가 이자원을 천거하였다는 것은, 순수히 그의 능력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대비는 조금 다른쪽으로 생각했지만.
'본인을 좌의정에 제수하고 아들을 국혼에서 놓아주는 정도라면.'
그만하면 이자원도 만족할 터.
필경 순순히 도성으로 돌아오리라.
이만하면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타협안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말하던 최명길이 생각이 어딘가에 미쳤다.
'요즘 저자에 떠돈다는 노래가 마음에 걸리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꾸민 하잘것없는 술수에 불과하다.
옛날 간신들이 조광조를 쫓아내기 위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넉자를 썼다는 얘기처럼, 도원수에 대한 의심을 돋우기 위한 계략이리라.
최명길은 조만간 배후를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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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은 곧 내년이온데 계(癸)는 계방을 의미하고, 미(未)는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니 소위 귀인이 북쪽에서 못 다 이룬 뜻을 이루러 내려온다는 뜻이라고 말이 많사옵니다."
계방은 정북(正北)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나 대개 북방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인평대군은 이어서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꿈에서 배운 노래라 하지만 그런 일이 세상에 어딨겠습니까? 이것은 누군가 서한연의(西漢演義)에서 따온 책략임이 분명합니다. 천명을 운운하기 위해 말입니다."
서한연의는 명 만력 시절 종산거사 견위가 지은 역사소설이다.
조선에서는 아직 읽은 이가 많지 않으나, 문예에 능한 인평대군은 척 듣고도 무슨 일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정학을 공부할 생각은 않고 그런 허랑방탕한 잡서나 읽는단 말이냐."
봉림대군이 조용히 꾸지람했지만 인평대군은 꿋꿋이 말했다.
"이런 노래까지 나도는 것을 보면 확실히 도성의 분위기가 수상합니다. 설령 도원수가 꾸민 일이 아니라 해도 몇년전 흉적 권대용이 이자원의 이름을 내세웠듯, 찬역하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종친들의 위기감은 그 어느때보다 높았다.
원래 종친은 국사에서 배제되는 것이 보통이라 하나 선왕의 비호 아래 어영청을 다스리던 봉림대군이 한순간에 밀려난데다, 영풍군마저 하옥되지 않았는가.
"차라리 우리 종친들 가운데 오위 관직을 사는 사람이 많으니 무슨 일이 있거든 나서서 왕실을 보호해야한다는 말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봉림대군이 혀를 찼다.
"오위의 옛 제도가 사라지고 관명(官名)만이 남은지 오래이다. 주상께서 회은군 같은 인망 높은 종친에게 오위도총관을 제수하신 까닭을 정녕 모르겠느냐?"
오위도총관이니 부총관이니 해도 실제 부릴 수 있는 군사는 한 사람도 없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명예직인 것이다.
인평대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는 결코 그런 일에 끼어서는 안된다."
봉림대군은 길게 탄하며 말했다.
동생은 학문과 시서화(詩書?)에는 뛰어나나 아직 나이가 어려 군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 어디서 잘 모르는 사람이 한 소리를 듣고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리라.
"내가 대비 마마를 뵙고 흉중에 품고 계신 뜻을 여쭈어보마."
봉림대군이 말했다.
만약 정말로 일이 잘못될 지경이라면, 그때는, 그때는.
봉림대군은 생각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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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궐한 봉림대군은 곧 대비에게로 안내받았다.
"대군은 어쩐 일로 입궐하시었소? 부부인과 아이도 잘 지내지요?"
"성총 덕에 평안하옵니다."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자에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리 편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형수와 시동생 간의 좋은 사이는 고종의 훙서와 함께 끝난지 오래였다.
"신은 자전께 간할 것이 있어 입궐하였나이다."
"말씀하시오."
수렴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대비는 필경 경계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그러나 봉림대군은 망설임없이 말했다.
"지금 금천 강씨의 일문이 제각기 관직에 출사하여 고관이 되었사온데, 여러 선비들이 이를 두고 염려하는 바가 많사옵니다."
"그 무슨 말이오."
대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강석기와 제부 이자원은 나라에서 손꼽히는 권력자기는 하다. 거기다 형부 정태제도 외관으로 나가 승승장구하는 중이고.
그러나 자신의 오빠들은 출사는 했으되 말직에 불과하거늘, 어찌 자신의 앞에서까지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말인가.
"자전께서는 이 나라의 근본을 생각하여 주십시오. 제아무리 도원수가 공신이라 하나 종실을 하옥하신 것은 심한 처사였사옵니다. 이를 두고 뭇 사람들이 자전께서 집안 사람을 총애한 까닭에 종실들과 싸운다고 떠들어대니 기강이 바로 설 수가 없사옵니다."
"영풍군은 이미 풀어주었소. 게다가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면 어찌하란 말인가.
이자원을 이대로 놓아두란 말인가?
그러나 봉림대군은 대비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대비 강씨가 묻자 봉림대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전께서 정녕 주상을 대신하여 나라를 올바로 이끌 생각이 있으시거든, 척족을 정사에서 물리치시고, 현인들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정사를 다스리소서."
대비의 눈빛이 변했다.
장성한 대군이 자신의 친위 세력을 내치라고 하다니.
이것은 숫제 그를 의심하라고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것을 모를리는 없는 봉림대군이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 하시고 난 뒤에는, 신을 절해로 유배보내시옵소서. 주상께옵서 장성하실 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머무르겠나이다."
봉림대군은 진심이었다.
이대로라면 파국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외척들과 자신이 동반퇴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것 역시 대비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실로 외척을 걱정하는 것은 소관이나, 종실 식구가 국사에 관여할 바는 아니오. 이미 좌상의 후임으로 도원수를 내정키로 하였소."
대비의 말에 봉림대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대비는 자신의 타협을 거부한 것이다.
게다가 정승이라니.
정말 여러 사람이 의심하는 바처럼 이 나라를 강씨의 나라로 만들려 하는 것인가?
"또 대군은 고종대왕의 친동기간이고, 죄도 없거늘 어찌 유배에 처하겠습니까. 여러 정승들도 이를 반대할 것이오."
자신마저 유배보내라는 의지 때문인지 대비의 목소리는 퍽 누그러졌지만, 봉림대군의 귀에는 더이상 대비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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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이 무슨 말을 하고 갔기에 그리 수심에 차셨는지요."
조씨의 물음에 대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영의정 최명길과 좌의정 신경진이 먼저 나서서 추진한 일이라고 덧붙였지만, 딱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마마."
조씨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단을 내려야할 때는 신속히, 명의(名義)를 돌아보셔서는 아니되는 법이옵니다."
"자네가 감히 국사에 간여하는가."
대비는 조씨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찔끔한 조씨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 여인은 평소에는 현숙해보이면서도 어딘가 기민하고 총명한데가 있었다.
문득문득 드러나는 그런 면모는 어쩌면 교활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조씨는 내명부를 장악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대비도 나름 총애했지만 이리 도를 넘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죄, 죄송하옵니다, 마마. 소인은 그저 모시는 분께 도움이 되고자······."
조씨가 납작 엎드렸다.
대비는 대답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탓에 그녀는 아래에서 슬며시 웃음 짓는 조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칼날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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