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날 (2) >
달이 휘영청 떴다.
한창 보채던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듯 새근새근 잠들었다. 유주는 아이가 깨지 않게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그러하듯 정화수 한 그릇을 떠서 장독 위에 올려놓았다.
남편이 떠날 때부터 매일 하던 일이었다.
이제 천하가 대개 평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녀는 어딘가 불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유주의 기도는 그런 찜찜함의 방증이었다.
이자원과 결혼했을 때부터 각오는 했다.
남편은 자신이 바라던 것처럼 실로 당당한 장부였으니, 중히 쓰일 것은 예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적이 족쇄가 되어 옥죄어오는 듯했다.
안세를 부마로 삼겠다는 제안은 물론이거니와, 이자원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에는 경외와 더불어 희미한 긴장이 감돌았다.
'부디 아무일 없이 돌아오시기를. 돌아오실 때까지 아무일이 없기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두가지 소원을 빌고 있던 유주의 등 뒤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어머니······?"
다른 방에 있던 안세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잠버릇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뒤척이다가 깬 모양이었다.
안세는 아장아장 어머니를 향해 걸어왔다.
아이의 시선이 정화수에 꽂혔다.
잠시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안세가 물었다.
"아버지는 언제 오시나요?"
"아직 할일이 많으신가 보다."
유주는 안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연희를 보셔야할텐데."
얼마 전 해산한 둘째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원지에 있던 이자원은 소식만 받았을 뿐, 한번도 보지 못한 딸이었다.
"안세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곧 돌아오신단다."
안세는 칫, 하고 퉁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간 배동으로 입궐해 같이 임금과 놀기도 하고 수업도 듣던 안세는 임금이 즉위하고부터는 한자리에 앉지 못했다.
나름 친해졌던 사촌형과도 헤어져야 했으니, 어린 마음에는 제법 섭섭했으리라.
"놀기만 좋아하면 못쓴단다."
유주는 살짝 어린 아들의 볼을 꼬집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하나, 총명한 구석은 있어도 크게 면학(勉學)에 힘쓰지는 않는 안세다.
그것보다는 여러가지 잡기(雜技)에 능하여 외조부인 강석기가 곤란한 표정을 짓게 하곤 했다.
"그건 무슨 노래니?"
안세가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유주가 질문했다.
"몇달 전부터 동리 아이들이 부르고 다니던 노래인데요."
- 계미년(癸未年)에 귀인이 돌아오네
주인에게 도둑을 잡아 바치면 만금으로 보답할까
금은보화 얻으면 비단옷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유주는 그 의아한 가사에 아들에게 이어 물었다.
"누가 지은 노래라 하더니?"
"행랑아범이 물어보니 그냥 다들 꿈에서 배운 노래라고 하던걸요."
유주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희미한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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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성은 북적북적했다.
조선군은 각지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지만, 상당수 병력은 심양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가 들어서고 가도가 토벌되면서 끊어졌던 교역이 다시 이어지니, 흩어진 사람들도 중심인 심양으로 모여들어 한몫 잡기 위한 궁리를 하는 판이었다.
이것은 중앙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훈국을 관둘 작정이냐?"
훈련도감 살수 조을동이 고발피에게 물었다.
고발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돌아가봤자 쌍놈 소리나 들으면서 살 것, 차라리 심양에 눌러앉는 편이 낫겠수. 마누라도 얻었겠다, 돌아가면 가족들 데리고 영영 올라올 심산이오."
"하기사 요새 요동땅은 조선인이라 하면 반은 먹혀 들어가는 판이니."
만주 일대에는 남는 땅도 많고, 농사만 지어도 제법 넉넉히 살 수 있겠다 싶었다.
파먹고 살 땅이 없어 훈국 초모에 응했다는 고발피니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조을동은 고개를 저었다.
"내사 그냥 돌아가겠네. 평생 훈국에만 있었는데 관둬서야 되겠는가."
"그러시우.. 대신 형수도 세상 떠난지 좀 됐겠다 여기 과부된 여진 여인네들 데려가면 되겠군."
고발피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조을동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엇?"
그 반응에 고발피는 놀랐다.
과부된 만주인 여자들이 성중에 넘쳐나긴 했으나, 설마 이 형님이 정말 그 중 하나와 눈이 맞았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제기, 들어보니 그 남편도 조선군이랑 싸우다 죽었다던데 무슨 염치로 데리고 돌아가겠나."
조을동의 말에 고발피는 그 등을 퍽 쳤다.
"이보시오, 형님. 인의도 좋고 다 좋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 아니겠소? 그쪽만 괜찮다면야 상관없지 뭘."
"허."
조을동은 그렇게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심양성은 곧 있으면 고발피 같은 조선인들로 가득 차겠지.
반대로 한인이나 만주인 가운데는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수백년간 뒤섞인다면, 누가 본래 어느 사람이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 되리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조을동은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정말 이 여자를 데리고 돌아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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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로 돌아가 십자군의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쇼군."
아마쿠사 시로가 열의에 차서 말했다.
그들은 공을 세웠다.
조선을 따라 신앙을 탄압하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
그렇기에 그 공으로 시로는 이자원에게 간청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강력한 조선군이 일본으로 건너간다면 막부 따위야 금세 타도할 수 있으리라.
잠시 시로를 쳐다보던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좋다."
"정말이십니까? 역시 쇼군께서는 동방에 나타난 성자······!"
시로가 호들갑을 떨어대려 할 때, 이자원이 손을 들어올려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무엇입니까?"
"조선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피폐한 나라 사정을 복구한 뒤, 너의 뜻대로 해주겠다."
몇년이 걸릴지, 몇십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확답을 받은 시로의 표정은 밝았다.
"예, 쇼군!"
"계속 들어오는 남만교인들에게도 주지시켜두어라. 이 조선에 잘만 협력하면, 십자가와 함께 너희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시로는 이자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돌아갔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박철균이 말했다.
"도원수 대감."
그는 이자원을 보고 물었다.
"정말 왜를 치실 생각이시오이까?"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십년 뒤 찾아올 심각한 대재앙을 생각한다면.
그러나 언젠가는 결행해야할 일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박철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청이야 먼저 쳐들어왔으니 북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역시 이자원이 의도한 바라 해도 선공을 날렸으므로 마찬가지.
오이라트 또한 더욱 커지면 요동을 노릴 가능성이 있었다.
"임진년의 원수를 갚겠다······ 이런 명분으로는 부족한가?"
이자원이 박철균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의상일 뿐이지요. 도원수께서 생각하시는 바는 따로 있을 것 같사오이다."
자신은 이자원의 측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남한산성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전장을 함께 넘나들었으니.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비밀스런 일 역시 그에게 맡겼다.
누가 보더라도 박철균은 이자원의 심복이었다.
"이 나라 조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도원수 대감의 목적이지요. 그런데 북벌에 성공해 요동과 요서를 얻었으니 다 된 것이 아니오이까? 어째서 바다 건너 왜에 신경쓰시는지 모르겠사오이다. 고작 임진년의 복수를 하려······?"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가 하나 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 나라는 폐허에서 세워졌다. 수십년을 남의 노예로 살다가, 겨우 해방된 뒤에는 웬 도적 두목이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나마 남은 전답마저 모두 타버렸다. 마치 왜란 직후의 조선처럼 말이지."
그러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도 온 백성이 합십한 덕에 수십년만에 그 상흔을 극복하고 제법 부강해졌지. 아마 귀관이 보면 그 백성 하나하나가 작금의 거부인 역관 장씨 집안보다 부유해보일 것이다. 어떤가,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결말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지가 못했다."
이자원은 천천히 말했다.
박철균의 눈빛이 혼란스러웠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도원수, 대감의 말씀대로라면, 조선이, 그리될 것이라는 뜻이오이까? 왜가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 보시는지요?"
박철균으로서는 조선에 빗대어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자원은 구태여 그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실상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역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드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이자원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마침 번역이 완료되어 그에게 보내진 책 한권이 있었다.
- 로마사 논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이자원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나라를 기반으로, 조국을 재건한다.
몇백년이 걸리더라도.
설사 자신이 그 결과물을 보지 못한다 해도.
그렇게 재건된 대한민국이 결코 자신의 기억과 같지 않은 형태라 해도.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을 따진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새롭게 만들어질 나라를 위해서.'
현 시대의 중국이나 일본에 별다른 유감은 없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역사에서, 그들은 새로이 재건될 나라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았다.
"난세가 끝났다고 믿는 자들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테니까.
이자원은 이 시대의 평화를 바라지 않았다.
조선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국체를 송두리째 바꾸어야 했다.
재건될 조국의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
중국을 찢고, 일본을 토막내고, 유럽을 눌러버리고, 미국을 소멸시키고, 러시아를 짓밟고.
그 어떤 나라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한 패권을 확립해야만 한다.
"박 별장."
이자원이 박철균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도원수 대감."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박철균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역모 진압이라는 대의를 위해 두 형을 죽였다.
이자원은 박철균을 측근이라 여겼지만, 그렇기 위해 이때까지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나이까."
"조정의 간신들은 나를 쳐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
이자원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북벌을 성공시키고 천조인 명의 군대까지 격파하며 그의 권위는 어린 임금을 뛰어넘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정의 중신들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닐 터.
그가 도성에 돌아가면 비정상적으로 휘두르고 있는 군권부터 거둬들이기 위해 움직이리라.
대비는 높은 관직과 함께 어린 왕을 보위할 만큼의 군권만 쥐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끝난다.
조선 조정은 결코 난세를 다시 불러올 생각이 없을 터이니.
이자원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정과 대비의 생각을 거스르지는 못하리라.
임금의 친정이 시작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고.
그말인즉슨, 이자원이 뜻을 이룰 수 있는 시점은 지금 밖에 없었다.
"때가 오면 나를 위해 움직일 수 있겠는가?"
< 칼날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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