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66화 (166/213)

< 칼날 (1) >

"번왕······!"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오삼계였다.

한편 얼굴에 열기(熱氣)가 잔뜩 감도는 오삼계와 달리, 오양과 조대수의 얼굴은 반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승주는,

"이것은 조선의 뜻이오?"

이자원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조선은 이미 명과 화약을 맺었다.

땅과 돈을 왕창 뜯어갔지만 아직 형식상으론 명의 제1번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홍승주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원수, 그대의 의지요?"

시선과 시선이 부딪혔다.

이자원은 홍승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의 뜻과 조선의 뜻."

이자원의 눈길이 항장들의 얼굴로 옮겨갔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둘이 과연 다른 말일 것 같소?"

===

창경궁.

대비는 피곤한 얼굴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북벌이 개시된 이후로 줄곧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였다.

삼정승과 신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좌한다고는 하나, 결국 자신이 아들을 대신해 모든 대소사(大小事)에 대한 결정을 내려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흉년의 대책으로 구휼미를 푸는 대신 기민(飢民)들을 각지의 공사에 동원하자는 건을 윤허한 대비는 이번엔 의금부에서 올라온 건을 살폈다.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기방에서 떠들며 말하기를, '이자원은 한갓 천얼 출신으로 사람됨이 광패하나 일신에 재주 있어 우리 인조, 고종께서 잠시 쓰셨다. 이제 청을 멸하여 그 쓰임이 다하였는데 곧 적당한 곳에 내쳐야만 전조 이의민(李義旼)의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하니 뭇 사람이 놀라 앞다퉈 고변하였사옵니다. 어찌 처결해야 하오리까."

대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대비는 침착하게 말했다.

"도원수는 사직을 구하고 원수를 멸한 일등공신인데 어찌 이런 말을 퍼뜨리는가!

또한 이의민 운운하는 것은 그의 출신을 조롱하기 위함이니 패려(悖戾)하기 이를데없거늘, 어찌하여 의금부는 여태 잡아 가두지 않았는가? 실상 이식은 무후(武侯, 제갈량)를 헐뜯은 이막(李邈) 같은 자이다. 당장 하옥하여 국문토록 하라."

대비의 말에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이에 쉬이 동의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영풍군은 와병한 능원대군의 아들로, 고종께오서도 각별히 이들 형제를 보살피셨나이다. 창녀와 더불어 뱉은 하잘것없는 말로 국문하기는 마땅치 아니하오니 모쪼록 이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형조참판 나만갑이 나서서 그리 반박했지만 대비는 단호했다.

"바깥에 나간 장군을 무함(誣陷)하는 것은 곧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이런 삿된 말은 처음부터 뿌리를 뽑아야 하는 법. 이미 명을 내렸으니 따르도록 하시오."

대비가 이렇게 딱 잘라 말하니 나만갑이라 한들 더 나설 수가 없었다.

정무를 모두 보고 난 대비는 아들을 데리고 정전에서 물러난 뒤, 아버지인 강석기와 마주 앉았다.

"영풍군을 하옥한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렇지 않아도 중외(中外)에 말이 많사온데······."

강석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비가 자기 제부를 욕했다 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그야말로 외척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비 강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지금은 도원수를 자극할 때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수렴 중인 대비가 신하를 두고 이르는 말치고는 지나친 바가 있었다.

강석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원수는 그간 아들을 부마로 삼겠다거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겠다는 것 모두 여러 차례 공손한 말로 사양할 뿐, 명확하게는 응낙하지 않았사옵니다."

북벌은 완수되었다.

이제 이자원은 안으로 들어와 임금의 이모부로서 대비를 도와 왕실을 충실히 보위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청을 멸망시키고 끝났어야할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난데없이 칙사가 죽으면서 명과 전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와자(瓦刺)라는 오랑캐들의 침노를 막으러 떠났다고 한다.

이자원은 계속 북방에 머무르며 회군을 미루고 있었고 대비가 내리는 품계도 받지 않았다.

"아들을 부마로 삼겠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역시 이 말을 너무 빨리 꺼낸 것일까요."

안세가 이자원의 권력을 이어받지 못하게 하면서도, 나름 왕실의 근친으로 대우하여 주는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를 이자원이 꺼려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면, 대비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미 아비의 위엄이 하늘을 찌를 지경인데 그 아들에게까지 세도가 넘어가도록 해서는 아니되지 않겠습니까."

이자원의 공적은 이미 하늘을 뒤덮었다.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해내고, 원수인 청을 멸하였으며, 대국의 침공에도 승리를 거두었다.

"고종대왕께서 살아계셨다면 모르되, 현재의 주상이 도원수를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금상 이백은 열살도 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수렴 중인 대비 역시 그를 제대로 다룰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정녕 피를 보아야 할 터인데······."

대비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석기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의 정승으로서도, 딸들의 아버지로서도 그는 그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강석기가 말했다.

"우선은 잠시 안세를 부마로 삼겠다는 뜻을 거두시고, 철군부터 하게 하시지요. 도원수가 도성에 복귀한 다음 재차 진행해나가도 될 것입니다."

"······역시 그리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은 이자원을 불러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조 소용은 약간 실망하겠지만, 그는 대비 자신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이.

대비는 강석기와 그런 뜻을 논의한 뒤 아버지를 놓아주었다.

"이 사람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대비 앞에서 물러나온 강석기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수라도에 계속 매여있는 것인가.

자신이 쥐게 된 권력이 너무 좋아 제 아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어서인가.

강석기가 본 사위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지금이라면 누구도 상처 입지 않을 수 있네. 부디 순순히 물러나오게."

요동에 있는 사위에게 들릴 턱이 없는 소원이건만, 강석기는 그렇게 빌어보았다.

===

소용 조씨는 손톱을 초조하게 깨물었다.

조씨의 앞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인이 말했다.

"일이 어렵게 되시었습니다."

"대비 마마의 말만 믿고 있을 것이 아니었네. 호언장담을 하시더니 아예 없던 일로 하겠다 하지 않는가."

주상을 대신하여 국사를 모두 청단하는 대비이니, 본래 같으면 그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이 조선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원수의 반응은 명백히 탐탁치 않았고, 대비는 거기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혼사를 물렸다.

'혹 이대로 혼사가 무산되는 것은 아닌가?'

대비 말로는 잠시 뒤로 미루어둘 뿐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리될지는 누가 알겠는가.

허면 적당한 사대부의 장모가 되어 평생을 빌빌거리며 살아야하리라.

조씨는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네."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번쩍였다.

그저 조씨를 옹주의 현숙한 생모 정도로만 알고 있는 내명부 사람들이 보면 놀랄만큼 독한 눈빛이었지만, 앞에 앉은 이 여인만큼은 본래부터 이런 성정을 보아온 이.

"쇤네 같은 천것이 소용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크나큰 광영이지요. 명만 내려주십시오."

여인, 앵무(鸚鵡)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는 예전부터 조씨와 알고 지내던 무당이었다. 한갓 무당이 후궁전에 드나드는 것은 본래라면 경을 칠만한 일이었으나, 대비의 수족이 되어 내명부를 다스리는 조씨로서는 그녀 한명 들이는 것 쯤 문제도 아니었다.

조씨는 은밀히 앵무에게 속삭였다.

===

"요즘 저자에선 온통 도원수의 얘기 뿐이오이다."

"싸울 때마다 이기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북벌의 성공으로 잔뜩 흥분에 달했던 백성들은 명나라마저 격파하고 '제사비'를 받아오자 열광이 극에 달했다.

원정이 길어지며 생겨난 피로함 또한 이제 명에서 들어온다는 은 백만 냥이 싹 씻어버린지 오래였다.

그간 이자원이 쌓은 전공과 무용담이 널리 퍼지고, 흡사 옛 이야기의 영웅처럼 떠받들어졌다.

보잘것없는 하민(下民)들부터 조정의 신료들에게까지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만큼 질시와 경계의 눈초리도 쏟아지는 법이다.

"선대왕 시절에야 월권을 저질러도 전하께서 묵인하고 넘어가셨으나, 작금 유군(幼君)을 모시는 자로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온당하지 아니하오이다."

"옛날처럼 삼사가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탄핵을 받고도 남았겠지요."

은근히 떠보는 듯한 그 비난에 봉림대군은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말했다.

"지금 내 앞에서 조정의 중신을 모함하는 것이오?"

봉림대군의 말에 그들은 찔끔했다.

"내가 듣기로 도원수가 북방에 머물러 있는 것은 와자의 침노를 막기 위함. 나라의 장수로서 당연한 일이오."

"하기야 대감께서는 어영청 도제조셨지요. 어영청도 북벌군에 종군하였으니 대감께서는 소식에 밝으시겠사오이다."

"······."

봉림대군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어영청에서 손을 뗀지 오래요. 대업을 이루러 떠난 이들에게 내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 연통하고 있지는 않소. 어디까지나 건너 듣기로 그렇다는 말이오."

한창 관리들을 피하던 봉림대군이었으나, 역시나 만났더니 바로 이 꼴이다.

'대비 마마의 입김이 닿은 자들은 아닐까.'

한참 관리들을 꾸짖고 돌려보낸 봉림대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어찌 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떠보기 위해 보냈을 수도 있다.

선왕은 자신을 아꼈고, 자연 대비와 자신의 사이도 좋았다.

그러나 형님의 요절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금상이 장성하여 즉위했다면 임금의 근친으로서 조금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봉림대군은 매사에 주의깊게 행동해야 했다.

그나마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는 동복동생이자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인평대군 정도일까.

"형님."

마침 인평대군이 찾아와 말했다.

"무슨 일이냐."

봉림대군은 아우를 반갑게 맞았지만, 인평대군의 안색은 어두웠다.

"오늘 영풍군이 도원수를 욕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잡혀갔사오이다."

"영풍군이?"

영풍군은 능원대군 이보의 서장자로, 그 아비를 닮았는지 자못 행실이 좋지 않아 봉림대군은 이 사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영풍군을 잡아가두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정말 도원수를 욕했다는 이유로 하옥되었다 하더냐?"

"그렇습니다. 수천리 밖에 있는데도 이렇게 기세가 등등한데, 이자원이 돌아와 나라의 권병을 잡는다면 옛날 윤원형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나이까."

인평대군의 말에 봉림대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생각에도 이 이상 이자원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대비는 과연 그를 억제할 계획은 있는 것인가?

혹여 정말 이자원이 대비와 합심하여 종친들을 죄 잡아가두고 강씨 세도를 열어젖힌다면?

"너는 어디 가서 이런 소리를 함부로 꺼내지 마라."

봉림대군은 우선 아우에게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자원은 복수를 위해 형님이 벼린 검이다.

그 검은 주인이 죽고 나서도 한번 휘둘러져 청을 멸했지만, 그 아들마저 주인으로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린 임금이 이 칼을 다룰 수가 있을까.

민심마저 모여들고 있는 이자원을.

봉림대군은 멍하니 내뱉었다.

"전하. 어찌해야하겠나이까."

그가 말하는 전하는 어린 조카가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난 고종을 말하는 것이었다.

형이 남긴 유조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북벌은 끝났다.

이자원은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니 형님의 말이 맞다면, 순순히 권력을 포기하고 물러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과연 왕실의 종친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 칼날 (1)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