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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65화 (16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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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대승이오!"

지르갈랑이 외쳤다.

인명 피해는 대부분 준가르의 몫이었지만, 뒤늦게 퇴각한 호이드와 토르고드 역시 제대로 물자를 챙기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그 뒤를 들이친 연합군은 그대로 말 3만 마리와 낙타 2만 마리,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식량과 재물을 노획했다.

가축이야말로 유목민의 기반.

그간 오이라트가 몽골을 헤집고 다니며 쓸어모은 많은 가축들을 모두 얻은 것이나 진배없었으니 지르갈랑의 표정은 밝았다.

이것을 미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몽골 부족들을 복속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이 도와주신 덕분에 쉬이 나라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지르갈랑은 배려심 좋게 마유주 대신 청주를 권하며 말했다.

이자원은 사양하지 않고 훌쩍 들이켰다.

"숙친왕의 행방은 찾지 못하였는가?"

도르곤에게 근거지를 잃고 오이라트군에게 패하자 호거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보이와 소닌 역시 그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약간 수소문은 해보았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진 세력을 모두 다 잃은 판에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지르갈랑의 말투는 옛 상관을 가리키는 것치고는 상당히 불손했다.

자신을 버리고 몽골로 독립한데다, 이미 지르갈랑 자신이 현 정권 내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그보다 못할 것이 없어서일까.

지르갈랑은 더이상 호거 따위에겐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때 대칸 아부나이가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

아직 홍안(紅顔)을 띈 소년이었지만 말투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장군 덕에 적도를 대파하고 선조의 기업(基業)을 재차 잇게 되었습니다. 상국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청에 복속당했다가, 호거에게 꼭두각시로 쥐흔들리다, 끝내 오이라트에게 망할 뻔한 것을 구해준 이자원이다.

아부나이의 이런 인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자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한(可汗)은 어엿한 일국의 임금이니 나라와 백성의 명운이 모두 그대에게 달렸소. 충량한 신하들을 한 손에 쥐고 잘 부려서 성세를 이루도록 하시오."

아부나이가 직접 나와 이자원에게 인사할 때부터 미묘해졌던 지르갈랑의 표정이 일변했다.

이자원은 그런 그의 반응을 모른체했다.

권력 투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자원은 그것을 조금 조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

허서리 소닌은 노얀 자리를 하나 꿰차고 아부나이 정권의 실무를 담당하는 중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순치제를 보필했으며, 강희제의 보정대신이었던 자인만큼 일처리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이라트는 근시일 내에는 다시 뭉쳐서 침노해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준가르가 가장 많은 피를 보았으니 말입니다."

소닌이 말했다.

비록 바투르를 죽이거나 생포하지는 못했으나, 그는 원정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 물러났으니 기세가 크게 꺾였을 터.

그는 자신을 버린 동맹들에게 복수하고 싶겠지만, 이대로라면 연합의 맹주 자리도 위태로우리라.

어쩌면 4오이라트 연합에서 탈락하고, 부수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호이드가 그 자리에 올라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그는 남은 평생을 흔들린 입지를 복구하는데 써야할 것이다.

바투르가 죽고 난 뒤 아들 셍게가 받았던 수많은 도전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로써 초원 역시 평정된 셈이다."

준가르의 빈틈을 놓고 오이라트는 상잔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재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아부나이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는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오이라트가 쉽게 몰아내지 못하게끔 단단히 자리를 굳히리라.

소닌은 이자원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힌채 말했다.

"하오나 오이라트에 대칸의 칭호를 허락하신 것은 실책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이나 만주인의 힘을 빌렸다며 고깝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 판에, 지고한 대칸 자리마저 넘겨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누가 그런 말을 했는가?"

소닌은 이자원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분명 적의 분열을 유도하려 사람을 보내 대칸을 칭할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적들은 분열이 되었지."

덤덤하게 말하는 이자원에게 소닌은 당황스러웠다.

"허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그런 제안을 전달한 것은 사실이나, 정작 성사된 것은 다른 협상이다."

오이라트의 숙원은 혈통의 약점을 극복하고 몽골로부터 우위를 차지하는 것.

적들의 분열을 위하여 대칸이라는 큰 미끼를 던진 것 뿐이지, 실제로 그들의 소원을 이뤄줄 이유 따윈 없었다.

"아블라이에게는 칸을 던져주었다."

그의 숙부인 구시도 칭한 것이 칸이다.

그것만 하더라도 당장 오이라트 내에서는 칸의 위망을 따라잡을 자가 없을 것이니, 충분한 대가가 되리라.

"아블라이는 준가르의 교역권을 노리고 있더군. 그것을 빼앗아 실리를 챙기고, 칸이라는 위세까지 더해질 기회를 걷어차진 않았다."

맹주 노릇하던 준가르가 쭈그러들었으니 아블라이의 기세는 더욱 치솟으리라.

그때 이자원이 소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찌할 작정인가?"

"어찌하다니요."

소닌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자원은 말했다.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니 내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겠지. 어느쪽에 붙는 것이 유리할지지도."

이자원은 은근히 지르갈랑에 맞서 아부나이를 밀어주거나, 조리그투가 휘하에 몽골인들을 모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의 의도를 소닌 역시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헌데 이자원이 먼저 그것을 언급하다니.

"내 손을 잡아라."

"조선을 위해, 일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소닌이 물었다.

"이제 응창에서는 정쟁이 시작될 것이다."

지르갈랑과 아부나이는 서로를 견제하며 조선의 지원을 얻기 위해 매달릴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소닌이 이자원과의 끈 하나를 만들어둔다면······.

"칭상께서 이미 일족의 정을 내세워 포섭하려 하셨습니다. 소관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옳은듯하고 말입니다."

"그럴 수 있겠지."

당장이야 지르갈랑 휘하의 양람기가 최대의 세력이었지만 장차 차하르와 할하가 모두 복속되고 나면, 정권 내의 구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만주인들끼리 똘똘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자원은 그것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앗줄을 하나 더 잡고 있어도 상관은 없지 않겠는가?"

몽골 내의 동향을 낱낱이 고하고, 조선의 이익에 따라 움직여줄 이가 필요했다.

소닌 정도라면 딱 적당한 위치에 있었으니, 서로가 이득인 거래.

소닌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잔잔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장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나이다."

===

"으아! 드디어 요동으로 복귀하는군!"

"요동 뿐이겠는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병졸들은 앞다퉈 소리를 질렀다.

북벌 때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고 내려가는 길.

중간중간 휴식은 제법 주어졌다지만 거듭된 원정에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잇, 어차피 도성도 아니고 고향 땅도 아니라 심양 아닌가. 뭘 그리 좋아하나?"

"놓고 온 처자라도 있나보지 뭐."

병사들이 떠들썩하게 심양성에 입성했다.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만세를 불렀다.

실상 제후국인 조선의 격에는 맞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이자원은 여독을 풀지 않고 이암을 불러들였다.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는가?"

물밑에서 꿈틀대는 불온분자들을 이르는 것이다.

어느 나라를 정복하든 이런 자들은 있기 마련.

특히 조선군은 청을 멸한 작후 요서며 몽골 등으로 자주 출병했기 때문에 그 빈틈을 노리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청주의 협조가 긴요했습니다. 실제로 크게 벌어진 일은 없나이다."

이암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진인 마심(마친), 강객라(캉칼아) 등이 청주를 추동했으나 현명하게도 이에 따르지 않았지요. 그 두 사람은 이미 제거하였습니다."

그간 심양을 통제한 것은 그였다.

그와 함께 있던 김준룡은 경상 감사를 지내긴 하였으나 엄연히 무관 출신. 행정도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밑사람들에게 알아서 맡기는 편이었다.

그러했으니 이암이 대개의 일을 관장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군의 계책대로 저들은 화합하지 못하며, 더러는 스스로 조선인이 되거나 정 불만이 팽배한 자들은 아예 승상 제이합랑(濟爾哈朗)을 따라 달단으로 향했지요."

옛 청의 영토에서는 조선에 저항할만한 자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있었다.

동해여진은 닝구타를 거점으로 단단히 통제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력에서 청의 중심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심에서는 한인과 조선인-대개 연원을 따져 종족을 회복한 자들이다-들이 대부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니 저들은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난을 일으켜 심양을 장악해봤자 누가 호응하겠는가.

이대로 계속 조선에서 인구가 유입되고 나면 어렵지 않게 동화시킬 수 있으리라.

한편 이암이 이어서 말했다.

"총독 홍승주가 장군을 뵙기를 청합니다."

===

명나라와 맺은 임오화약에는 송산에서 잡힌 포로에 관한 부분도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죽은 자들을 제외한 포로들이 일부 석방되었고, 나중에 차차 명이 '제사비'를 납부하는대로 돌려보내기로 약정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외된 것이 바로 항장(降將)에 관한 문제였다

홍승주와 조대수, 오양 등을 비롯한 장수들은 돌려보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황제가 간신들을 처형했지만 단지 보여주기일 뿐, 우리가 돌아간다면 처참히 죽임당할 것이 분명하외다."

오양이 그리 말했다.

영원성을 통째로 들어바친 그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조대수 역시 체념한 표정이었다.

"죽이지 않는다 한들 국세가 기운 마당에 무리한 싸움이나 강요받을 터. 남아있는 '간신'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어떻게 알겠소?"

홍승주는 동료들의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대의'에 협력하여 칼을 거꾸로 잡았을 것을.

이미 죽은줄 알고 제사까지 지냈던 숭정제는 홍승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자 놀라서 급히 제단을 부수었다고 한다.

홍승주는 그의 표변(豹變)이 두려웠다.

항장들은 결국 명의 요구에 조선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에 이자원을 찾은 것이었다.

오삼계가 이자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장군, 장군은 인의로운 분이요, 저와도 각별한 사이가 아니십니까. 명이 저희를 요구한다면 돌려보낼 작정이십니까?"

아버지인 오양에게 편지를 보내 의형제를 맺었느니 운운하던 오삼계였지만, 이자원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가 본 이자원은 제 뜻을 위해선 눈 하나 깜짝않고 사람도 죽이는 인간이었으니.

"우선 본관 또한 명의 '간신'들이 모두 쓸려났다고 보지는 않소. 우리가 내세운 대의는 유효하오."

숭정제가 책임을 뒤집어씌워 죽인 것은 병부의 신하 몇명에 불과했다.

당장 산해관을 넘기는 어렵고, 후방의 사정 때문에 군사를 거둔 것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말에 항장들의 눈이 커졌다.

"허면."

"또한 포로를 모두 돌려보내는데는 몇년쯤 시간이 걸릴 터."

조선은 명이 제사비를 바칠 때마다 조금씩 포로를 돌려주기로 협약한 상태.

그들의 신병은 언급이 되어있지 않으니 마지막까지 남아있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명이 끝내 무너질 때가 된다면.

"수년 후라면 그 난공불락인 산해관도 꿈은 아닐 것이오."

이자원이 말했다.

명나라는 조선이 꽂은 빨대 때문에라도 무너지게 되어있다.

산해관은 스스로 열리든, 그렇지 않으면 조선이 강제로 뚫고 들어가든 쉽게 떨어지리라.

"그때는 나와 같이 '대의'를 일으켜 세우러 가는 것이 어떻소."

이자원의 선언에 항장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되면 그대들은 명나라의 사직을 다시 일으켜세운 공로로 상상도 못할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오. 예를 들면······."

이자원은 그들에게 쐐기를 박아 넣었다.

"번왕이라든지."

< 뒤처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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