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원의 패자 (3) >
사절을 물린 뒤에도 갑론을박은 계속되었다.
이제까지 오이라트인들 중에서 칸(Khan)을 칭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바투르의 장인인 호쇼드의 구시만 해도 칸이라는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구시 칸은 티베트의 겔룩파를 구원하고 달라이라마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그 칭호에 대한 정통성을 획득했다.
그는 천산으로 귀환하는 대신 많은 일족을 거느리고 아예 티베트의 코코노르로 이주했고, 그 조카인 오치르투와 아블라이만이 일부 호쇼드와 함께 남았다.
그러나 대칸(Khagan)은 그 의미가 달랐다.
말 그대로 초원의 황제나 다름없는 지고한 자리.
'오이라트의 대칸'을 바로 황금씨족이 직접 추인해준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이곳에 모인 군주들을 유혹했다.
'저 젠체하던 동몽골이 옥새를 둘로 나누어 바치기로 했단 말인가.'
하기야 보르지긴 씨는 릭단 사후 그야말로 영락(零落)해버린지 오래.
항상 그 혈통에 열등감을 느껴오던 오이라트인들은 이 제안을 사실상의 승리이자 크나큰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보관(寶冠)을 누가 차지하느냐였지만.
"응당 이런 높은 자리에는 존귀한 혈통이 앉아야하는 법. 바이바가스 칸의 후예인 나나 우리 형님이 대칸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아블라이는 집요했다.
오이라트 군주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그렇게 주장했다.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대칸을 인정해준다면, 달라이라마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못할 것이 없다.'
숙부인 구시를 넘어 대칸을 칭할 수가 있는 것.
아블라이 역시 웅심(雄心) 품은 효웅인만큼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한편 오치르투는 동생의 주장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실상 제 야망을 채우려 꺼낸 말이면서, 자신까지 거론하며 끌어들이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으랴.
"어리석은 소리. 작금의 성세로 따지면 어느 누가 우리 형님께 댈 수가 있겠는가. 바투르 홍타이지야말로 대칸에 적합하시네."
이미 바투르와 이야기가 다 되어있었던 추후르가 나서서 아블라이를 꾸짖었지만, 아블라이는 태연하게 외쳤다.
"타이지는 오늘만 하더라도 크게 패해 몸만 건져 돌아왔으면서 무슨 언성을 그리 높이는 것이오?"
아블라이의 비난에 추후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천산으로 돌아가겠소!"
그 말을 남긴 뒤 아블라이는 휙 자리를 빠져나가버렸다.
바투르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그는 어쩔줄 몰라하는 오치르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보게, 사위. 자네 동생은 몹시 생각이 짧네. 저런 자가 오이라트의 칸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동생이라 하나 이복동생이요, 같은 호쇼드라 하나 거느리고 있는 세력도 제각각이었다.
수년 뒤에는 아예 내전까지 벌일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던만큼 아예 아블라이를 배제한 채로 오치르투를 포섭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자네가 나를 옹립한다면 충분히 보상할 용의가 있네. 자네가 원한다면 호복 사르도 내어주지."
호복 사르는 바투르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근거지였으니, 이는 자신의 기반을 통째로 내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장인께선 그럼 어디 가서 잠을 주무신다는 말이오?"
"내가 대칸이 되면 몽골로 아예 근거지를 옮길 작정이네."
오치르투는 바투르의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그 자신이 직접 대칸이 되지 않더라도, 호복사르를 기반으로 잘만 관리하면 능히 동생을 제압하고 호쇼드를 일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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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먼저 숙소로 돌아간 아블라이는 이런 사정을 모두 전해듣고 있었다.
"오치르투, 이놈! 결국은 일족을 배신하고 준가르의 개가 되기로 작정했구나."
애초에 서로간의 신뢰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복형이지만 우선 이렇게 내뱉고 보는 아블라이였다.
"준가르와 오치르투 타이지가 손을 잡으면 오이라트는 두 파벌로 갈리는 셈이오. 어찌해야겠소?"
두르베드의 수령 달라이 다이친이 물었다.
그는 아블라이와 은밀히 연대하고 있었던지라, 이런 소식을 듣자마자 아블라이에게 이를 전하러 온 것이다.
"어찌하기는. 준가르를 순순히 우리 상전으로 올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아블라이도 다이친도 그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어차피 나는 대칸 자리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 역시 이쯤되면 바투르 홍타이지가 대칸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터."
다이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많은 사람과 물자를 노획했으니 이만 돌아가 카자흐와 키르기즈나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몽골 원정을 계획한 것도 바투르 아니오?"
"그럼 누구도 대칸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자는 말이오?"
아블라이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묻자 다이친은 바깥에서 사람 하나를 불러들였다.
"오늘 싸움에서 은밀히 섞여 들어온 자요."
다이친의 소개가 끝나자 남자는 아블라이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말했다.
"소인은 조선의 장군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타이시께 은밀히 제안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몽골에 새로 대칸을 내세웠다는 조선의 장군.
그 이름을 듣자 아블라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윽고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아블라이는 무릎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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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음날이 되도록 결론은 나지 않았다.
오치르투와 손잡은 바투르는 아블라이와 다른 부족들을 앉혀다가 대칸을 추대하려 했지만,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어두었던 것이다.
"적들이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으음."
바투르는 화약을 맺고자 해놓고 바로 치고 들어오는 조몽 연합군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우리가 빨리 비답을 주지 않은 탓일까요."
추후르의 물음에 바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결론이 나려면 응당 며칠의 시간은 주어야지. 애초부터 이럴 작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투 양상은 전날과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서로 말 위에 올라타 출진한 병사들이 맞붙고, 조선측과 포격을 주고 받았다.
"확실히 놈들의 대포가 우리것보다 낫구나. 우리도 부지런히 화포를 갖추어야겠다."
준가르 역시 러시아와의 교역으로 얻은 일부 대포가 있기는 하였으나, 여기에 맞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거리도 정확도도 떨어지는데다 수량마저 모자랐던 것이다.
- 퍼퍼펑!
개중에는 심지가 타들어가면 폭발하는 물건도 있어, 사방에 불길이 번졌다.
그렇지 않아도 건조한 기후에서 건초와 식량에 불이 옮겨붙자 오이라트군은 당황했다.
"당황하지 마라! 모래를 뿌려 끄도록 해라!"
추후르가 호령했다.
그나마 백병전에서만큼은 오이라트가 밀리지 않았기에 전황이 그리 불리하지 않았지만······.
"어, 어?"
추후르의 눈이 커졌다.
한창 흙먼지를 일으키며 싸우던 아군의 한축이 어느 순간 무너져내린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고 패퇴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치열하게 맞서싸우고 있던 준가르의 전사들은 동료들이 일거에 빠져나가자 채 저항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고 학살당했다.
"혀, 형님!"
"뭐냐?"
추후르의 다급한 외침에 바투르가 일어서서 물었다.
그 역시 유목민답게 시력 하나는 좋았다.
멀리 내다보니 역시나 아군을 물리친 적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바투르는 노련한 장수답게 이상한 점을 눈치챘지만 그보다 시급한 일이 있었다.
"적이 몰려온다! 막아내라!"
바투르가 소리치자 모두들 예의 낙타 장벽에 붙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예까지 도달하려면 한참 걸릴 것이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적군은 호쇼드군이 지키고 있는 좌익을 지나쳐 곧장 중앙의 준가르군을 들이쳤다.
- 타타탕!
화살보다 먼 거리에서 총탄이 빗발쳤다.
오랜 시간 마상 권총 사격을 연습해온 조선군에게 화망을 구성하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
융단을 뚫고 들어간 총탄에 낙타들은 피를 흘리며 기우뚱 쓰러졌고, 그 틈을 타 팔기와 몽골군이 돌입했다.
"전부 죽여라!"
창칼과 궁시가 준가르군을 덮쳤다.
"이, 이게 무슨!"
바투르는 호쇼드군 쪽을 쳐다보며 외쳤다.
설마하니 저들이 배신한 것인가!
"어리석은! 내가 대칸이 되고자 한다고 이런 배신을 자행했단 말이냐?"
아블라이가 음흉한 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 아닌가.
바투르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 싸움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맹주의 자격으로 전 오이라트를 몰아 놈을 토벌하리라.
"퇴각하라, 퇴각!"
결국 바투르의 입에서 그 말이 울려 퍼졌다.
조금 뒤로 물러나 군을 재정비해 놈들에게 맞서면 된다.
그러나 바투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오이라트군은 멀찍이 물러나고 있었다.
준가르가 공격을 받는 틈을 타 두르바드가 제멋대로 군사를 물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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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끈질기게 준가르군만을 공격할 뿐, 호쇼드와 두르바드 등 다른 오이라트 부족은 쫓지 않았다.
주장인 이자원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준가르에게 다대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
"준가르만, 말입니까?"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블라이와의 밀약이 아니더라도 준가르의 이름 아래에 오이라트가 전부 통합되는 역사를 생각한다면, 역시 그러는 것이 맞았다.
준가르가 주저앉더라도 다른 부족의 누군가가 나타나서 오이라트를 하나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자원이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역사의 지식을 떼어놓고 보아도 현재로서는 준가르가 가장 유력한 세력이니 그들을 집중적으로 치는 것이 맞기도 했고 말이다.
"바투르는 목을 내놓아라!"
이자원의 명을 받은 오보이는 마구 창을 휘두르며 퍼떡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준가르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 뒤로 직접 칭상인 지르갈랑이 군을 지휘하며 몰아쳤다.
그는 몽골에도 여러 차례 원정하여 이곳에서의 싸움법에 익숙했으므로, 지르갈랑의 지휘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한번 기세에서 밀리기 시작한 오이라트는 쉬이 반전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조선군의 포격과 총격에 정신이 없는 것도 모자라, 미친듯이 몰아쳐대는 기병들의 대열에 준가르군은 거진 무너져가고 있었다.
"준가르 놈들을 쓸어버려라!"
"우리는 준가르만 친다! 다른 놈들은 놓아주겠다!"
몽골어와 오이라트어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알아듣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현대에도 몽골과 중국 등지에서는 오이라트어를 몽골어의 방언으로 간주할 뿐이다.
따라서 몽골인 병사들이 뛰어다니면서 외치는 내용은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박혀들었다.
"준가르만 친다고?"
의문을 가지고 관찰한 사람들은 확실히 중앙의 준가르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곤란에 처한 이웃을 돕기보다는 제 잇속부터 챙기려 들었다.
"이 틈에 퇴각해라, 빨리!"
호이드의 수령 솔톤이 외쳤다.
그들은 오이라트라는 느슨한 연합으로 묶여있되, 본질적으로는 상이한 이익집단이다.
적이 준가르만을 공격한다는데 쓸데없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서 죽음을 재촉하거나, 혹은 퇴각할 시간을 빼앗기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 결과 가장 먼저 퇴각한 호쇼드와 두르베드에 이어, 토르고드와 호이드 역시 줄줄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사위인 오치르투 타이지가 이끄는 부족이 가장 늦게 물러났지만, 바투르에게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동맹의 어려움을 못본체하고 빠져나가려는 그 모습에 바투르는 가슴을 쳤다.
"이, 이런 간악한 자들을 보았나!"
물론 자신이라 해도 그랬을 것이다.
한 부족이 약해지면 다른 부족은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볼 것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연합이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에 바투르는 노기를 참지 못했다.
'내가 이런 자들의 임금이 되려했던가!'
"맞서 싸워라!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다!"
칼을 뽑아들어 그리 외쳤지만 이미 멀찍이 떨어진 부족들에게 그 목소리가 닿을리가 없었다.
"형님, 어서 피해야 합니다!"
추후르가 황급히 형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미 대세는 확연히 기울어버렸다.
"그래, 그래야지······."
오이라트 통일의 꿈, 아울러 대칸의 꿈은 한순간에 스러져버렸다.
오늘의 패전으로 그간 복속시켜놓은 몽골의 부족들도 대거 이탈하리라.
아마 그들은 자연스레 꼭두각시 대칸 아부나이의 밑으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바투르는 장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오이라트의 대업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구나!"
그 역시 준가르의 발 아래 오이라트를 흡수할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지만, 그렇기에 다른 군주들이라 한들 그의 '대업'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바투르는 강력한 배신감을 느꼈다.
동생의 손에 이끌려 말에 올라타면서도 그는 동맹들을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642년.
준가르의 날개는 제대로 펼쳐지기도 전에 몽골의 초원에서 꺾이고 말았다.
< 초원의 패자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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