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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63화 (163/213)

< 초원의 패자 (2) >

오보이는 추후르가 일군을 이끌고 짓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창을 고쳐잡았다.

"팔기들이여!"

정확히 말하면 팔기(八旗)가 아니라 호거가 이끌고 있던 상삼기의 잔당들이었지만.

오보이는 구태여 그것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비록 나라는 망했으나 대청남아의 기개는 살아있다! 이깟 오이라트 놈들에게 밀려서야 되겠느냐?"

추즈킨의 목을 들어올린 그가 외치자 팔기가 호응해 외쳤다.

"아니됩니다!"

"그렇다면 적을 쓸어버려라!"

오보이는 호기롭게 소리치며 말을 달렸다.

그 뒤로 팔기가 뒤따르고, 추후르의 오이라트군과 격돌했다.

오이라트군은 부족마다 무장과 기치가 제각각이었지만, 이미 여러차례 같이 원정에 나서본 덕인지 합을 맞춰 싸우는데 능숙했다.

"차핫!"

오보이의 창날이 적의 목을 꿰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적들의 틈을 파고 들려던 팔기는 생각 이상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일신의 기량도 놈들이 뒤떨어지지 않는군.'

오이라트는 기본적으로 유목민.

팔기에 비해서도 개개인의 전투력이 뒤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런 난전에서도 쉬이 승기를 잡기가 힘들었다.

- 휘이이

설상가상으로 바람 소리마저 바뀌기 시작했다.

오보이의 몸에 온통 소름이 돋았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거센 모랫바람이 팔기 쪽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

"바람이 들이닥친다!"

유목민 사이의 전투는 바람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물론 정주민의 싸움도 그렇긴 하지만, 이처럼 탁 트인 초원에서는 그 효과가 배 넘게 되는 것이다.

이자원은 혀를 찼다.

"전부 웅크려라!"

적의 공세는 오보이 쪽에만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이곳의 본군에도 이어졌다.

- 타타탕!

모랫바람에 모두 쌓아놓은 바리케이드 아래로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적의 돌격을 막기 위한 산발적인 총격만이 이어졌다. 그뿐, 대대적인 반격은 힘든 모양새였다.

반면 등에 바람을 탄 오이라트군은 물만난 고기처럼 펄떡이며 들이쳐왔다.

화살이 수없이 날아와 수레에 훅훅 꽂혔다.

재수없게 빈틈을 통과한 화살에 조선군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적에게 전장을 내어주어야겠사오이다!"

이 바람이 언제 그칠지 모르는 이상, 적에게 손해를 보고서라도 거두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쪽을 도살하기 위해 달려오는 오이라트군의 기세와, 거센 바람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병사들을 고려하면 그편이 맞는 것이 아닌가.

"바람이 매우 심하여 총탄도 궁시도 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외다. 과감히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황익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은 버틸만하다."

적들의 돌격이 몰아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이자원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오이라트군과 조우한 상황에서 그는 나름 튼튼히 장애물을 구축할 것을 명했고,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었다.

오이라트군에 맞서 전열이 붕괴되지 않은 채 교전 중인 것만으로도 전군은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초원의 바람은 금방 바뀝니다! 적들은 그것을 알고 이리 공격해오는 것입니다!"

조리그투의 외침도 그 판단을 뒷받침했다.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보이를 치기 위해 움직였던 오이라트군은 바람이 바뀌자마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어딜보나 유리한 바람을 타기 위해 급히 움직인 모양새.

풍향만 바뀐다면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적들이 들어온다!"

진 바깥에서 깔짝대던 오이라트군이 빈틈을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있는 병력은 높은 목책과 녹각에만 의지해 싸울줄 아는 자들이 아니다.

조선인, 만주인, 몽골인 누구나 할 것 없이 제 병장을 꺼내들었다.

그때, 바람이 다시금 뒤틀렸다.

===

오보이는 미친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창칼도 가리지 않고 집어 싸워대며,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그의 모습은 흡사 악귀나찰 같았다.

'여기에서 꺾일 수는 없다!'

한때는 홍타이지 밑에서 무명(武名)을 크게 떨치고, 나아가 대청의 권신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미 그 청나라는 망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옆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한줌 부하들 밖에 없었다.

"도망가지 마라! 도망갈 곳 따위는 없다!"

조선땅이 된 요동에 남아있어보았자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니, 죽기로 싸워 이곳에서 세력을 넓히는 수밖에 없다.

쇠와 쇠가 부딪히고, 비명이 하늘을 덮은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린 모양인지, 오보이를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창칼을 고쳐쥐고 싸움에 나섰다.

그때였다.

바람의 방향이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 두두두

그와 동시에, 본군 쪽에서 달려오는 한무리의 기병이 보였다.

"지원군이다!"

오보이는 적을 꿰어 쓰러트리며 외쳤다.

적들 역시 그 광경을 본 모양이었다.

저희 말로 무어라 외치며 적장이 병력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이대로 순순히 적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오보이는 허리춤에서 활을 빼어든 뒤, 화살을 재어 적장을 쏘았다.

"큿!"

적장이 몸을 크게 비튼 탓에 노렸던 가슴이 아니라 팔에 맞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다다른 지원군은 순식간에 오이라트군을 휩쓸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탔던 바람은, 이제는 이쪽의 편이었다.

오이라트군은 조선군이 쏜 권총에 맞아 머리에 구멍이 나거나, 만주인의 안모도에 베여 쓰러지거나, 몽골인의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놈들이 퇴각하는구나!"

지원군을 이끌고 온 황익이 시끄럽게 외쳤다.

"이참에 적진까지 들이칩시다!"

오보이는 단지 적을 격퇴한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적이 한순간 돌풍의 힘을 입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처럼, 이쪽도 그리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본군에서도 은은한 포성이 울려 퍼졌다.

역시나 포탄으로 오이라트의 본진을 치려는 속셈이었다.

오보이와 황익은 갑작스레 바뀐 바람과 조선군의 포격으로 허둥지둥하는 오이라트군을 향해 돌격했다.

"끄악!"

"살려줘!"

비명을 내지르는 적군을 무자비하게 찔러 죽인 오보이와 병사들이었지만, 그 뒤로 쌓아놓은 장벽에 더 접근할 수는 없었다.

"적이 낙타 다리를 묶어 장벽을 쌓았나이다!"

"낙타?"

황익이 어리둥절했다.

그는 낙타라는 동물을 들어는 보았으되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치중을 운반하기 위해 낙타를 빈번하게 사용하였으니, 이런 용도로 쓴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낙타를 묶어 그 위에 융단을 덮은 장벽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 기이한 광경에 황익은 잠시 할말을 잊었지만, 이내 조선군 진영에서 날아온 포탄이 그곳을 덮쳐버렸다.

- 꾸에에에!

쇳덩어리에 깔려버린 낙타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황익은 잠시 흠칫했다가, 환도를 들며 소리쳤다.

"돌격하라!"

===

첫 싸움은 조선측의 승리로 끝났다.

조선이 화포를 앞세우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자 오이라트는 피해를 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낙타 장벽이 적의 돌격을 막는데 주효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적들의 화기가 상상 이상이오."

기껏 명나라 수준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은 그 착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 위에서 능숙하게 권총을 쏘아대고, 화포로 정확히 이쪽을 타격하던 모습은 그들이 보아온 러시아군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강맹하다 하나 우리군에 미치지는 못하오. 게다가 조선군은 이 몽골에 영영 머무르지는 못할 터. 곧 돌아갈 자들이니 계산에 넣지 않아도 좋소."

이곳에서 적들을 깨트려 한번에 몽골을 집어삼켜버리고, 자신의 위세도 그만큼 떨친다면 좋겠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사방에서 적과 교전하며 조금씩 집어먹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였다.

그렇게 전략을 조금 수정하려던 바투르 홍타이지에게 사람 하나가 찾아왔다.

적군에서 보낸 사절이었다.

그가 꺼낸 제안은 놀라웠다.

"대칸의 위를 인정해주겠다고?"

바투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대칸, 대칸이라니.

"그렇습니다, 홍타이지. 어차피 우리 몽골과 오이라트가 갈라진지도 오래이니 한 사람의 대칸만 존재할 이유는 없겠지요. 지금의 국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영세토록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저희 대칸의 전언입니다."

바투르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비록 꼭두각시라고는 하지만, 아부나이의 아버지인 릭단은 그 다얀 칸의 후손으로 마지막으로 대칸을 칭할 자격이 있던 자였다.

그 세력은 몽골 전역이 아니라 차하르에만 미치긴 하였으나.

그러니 정식으로 대칸의 위를 인정해주겠다는 아부나이의 제안은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대칸이라.'

물론 전투에 임하기 전 같으면 코웃음을 치고 싸움에 나섰을 것이다.

이런 직위 하나로 몽골을 모조리 병탄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과 싸워 한번 패배를 겪은 상황.

어차피 적들을 한번에 꺾어 정복할 수 없다면, 오이라트 내의 경쟁자들을 누르고 대칸을 칭할 명분을 얻는 것도 나쁘진 않아보였다.

'어차피 아부나이야 꼭두각시. 오이라트부터 확실히 휘어잡은 뒤 천천히 복속해나가도 될 일이다.'

바투르는 주위의 군주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문제는 이들이다.

감히 대칸을 자칭한다 하여 칼을 들이민다면, 칭하지 않는 것만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바투르는 입을 열었다.

"옛날 에센 타이시는 황금씨족이 아니면서도 대칸을 칭했다가 몰락하였으니, 오히려 우리에게 앙화(殃禍)를 안겨다 주려는 것이 아닌가?"

짐짓 그렇게 말하자 사절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오로지 이것은 몽골과 오이라트, 두 나라의 화의를 다지기 위함이지 결코 그런 뜻이 없습니다. 홍타이지께서 이 제안을 어렵게 여기신다면 다른 군주를 내세워도 좋다고 하셨나이다."

그 말에 오이라트 군주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준가르의 바투르가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고는 하나, 그 말대로라면 자신들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미 두 나라가 갈라진지 오래이니 대칸을 새로 옹립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말이오. 나는 이 제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덥석 그 제안을 문 것은 아블라이였다.

은근히 바투르에게 반기를 들던 그였으니, 흉중의 야망 역시 바투르 못지 않은 자이리라.

'이놈이.'

바투르 역시 그의 욕심을 눈치채자 화가 불끈 솟았다.

기왕 대칸을 뽑아야 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할 터.

다른 군주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블라이가 먼저 선수를 치게 생긴 것이 아닌가.

"이것은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는 일. 여러 군주들이 상의한 뒤 답변을 주도록 하겠소."

바투르는 그리 말한 뒤 사절을 물렸다.

그리고는 동생인 추후르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서로의 우위에 서려는 군주들의 욕심이 넘실거렸다.

===

오이라트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누구 하나가 대칸을 칭하는 것을 인정하고 저들에게 몽골의 반을 내어주겠다는 제안이라면, 충분히 혹하리라.

바로 그 '누구'를 정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싸움이 펼쳐질테지만 말이다.

이자원은 그리하여 아부나이의 이름으로 사절을 보냈다.

적어도 이곳에는 감히 그에게 딴지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이 충분히 단결되어 있고 현명하다면 단칼에 거절하겠지만, 과연 원래 역사에서 얼마 후 내전까지 벌일 오이라트가 그러할까.

"대칸이라."

그 이름을 갖기 위해 다투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아니, 유목의 시대 자체가 이 시점을 끝으로 종언을 고한다.

'너희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어떤 꿈을 꾸고 있든지 간에,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자원은 스스로의 비원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있었으니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자원은 몽골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았다.

이런 광경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다 같이······.

이자원은 생각을 멈추었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는 막사로 돌아갔다.

===

그 시각.

적비 역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초원의 패자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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