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원의 패자 (1) >
오이라트란, 적어도 조선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이름이었다.
에센 타이시가 정통제를 사로잡은 토목의 변이 일어난 것이 2백 년 전.
그가 손잡은 대칸 토크토부카의 이름으로 세종에게 국서를 보낸 것도 그정도쯤 되었다.
그러한 사정이었으니 저 멀리 와자(瓦刺)라는 종족이 살고 있는 것은 알지언정 그들의 세력이 얼마 정도인지, 혹은 어디까지 그 손을 뻗쳐왔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헌데 그들이 다시 굴기(?起)하여 요동까지 노리고 있단 말이오?"
뜻밖의 이름에 김육의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그렇소이다. 가만 놔두었다간 와자 놈들이 요동의 무주공산을 차고 앉아 호랑이처럼 웅크리며 우리 도성을 노릴 것이외다."
이자원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했다.
오이라트가 원래 역사와 달리 동쪽으로 나아온 것은 사실이나, 요동까지 탐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에서 그의 말을 대놓고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실.
'게다가, 실제로 오이라트가 입관이라도 한다면.'
오이라트, 직접적으로 말하면 준가르가 본격적으로 흥기하는 것은 이보다 한 세대쯤 뒤의 일.
그러나 이미 크게 뒤틀리기 시작한 역사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없는 짓이 될 터였다.
중앙아시아 대신 몽골로 확장을 감행해 단숨에 호거를 쳐부순 바투르 홍타이지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 분명하였으니.
그의 차남인 갈단이 아니라 본인이 준가르 제국을 세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호판께서 더욱 수고를 해주셔야겠소."
이자원은 막사를 나서며 그리 말했다.
포로 문제와 군사와 관련한 화약의 내용은 그가 처리하고 떠날 작정이었으나, 나머지는 김육이 맡아야 할 터였다.
김육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조선이 은혜에 신속하고 의로움에 복종했으므로 군대를 거두고, 열토와 은자를 갈라주어 충성에 보답한다'는 숭정제의 칙서가 도성으로 날아들 무렵.
이자원은 몽골을 향해 출병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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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병한 조선군은 주로 마병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으나, 이자원은 말과 수레를 이용해 화포도 여러문 운반하게 했다.
이리하여 구성된 조선-여진-몽골의 대오이라트 연합 전선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대칸 아부나이가 있었다.
형인 에제이에 이어 다시금 꼭두각시로 옹립된 그는, 그 자체로는 별 능력도 인망도 없었으나 황금씨족의 후예로서 그 릭단 칸의 아들이었으니 상징으로서는 더할 나위없었다.
이자원은 릭단 사후로 청나라 황실의 손에 들어갔던 대원 시절의 제고지보(制誥之寶)를 다시 돌려줌으로써 그의 정통성을 더욱 굳건히 받쳤다.
"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상국이 나라와 위호를 회복하여준 은혜는 세세이 내려 잊지 않겠나이다."
아부나이를 대신하여 타이시인 다르한 조리그투가 복배(伏拜)하며 말했다.
그는 차하르와 할하의 부족들을 끌어모으는 한편으로, 청에서 다시 귀부해온 팔기 출신 몽골인들을 받아들이며 세력을 불렸다.
지르갈랑보다는 그 세력이 미약하였으되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몽골인의 것.
아부나이의 신임이나 여러 몽골인의 지지 역시 그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지르갈랑이 지니게 된 칭상(丞相)이란 직위 역시 독특햇다.
칭상은 승상의 몽골어로, 한족의 승상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달랐으니 실질적으로 이 아부나이 정권을 유지하는 제일의 대군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 휘하로 오보이와 소닌도 제각기 일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도원수 이자원이 직접 휘하의 군사를 몰아 나아왔다.
"제군(諸軍)의 장졸은 들으라!"
이자원이 외쳤다.
"옛날 야선(也先)은 와자를 모두 복속시키고 달단마저 쥐고 흔들었으매, 제 힘을 믿고 자못 천하에 난장을 피움이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영종 황제(英宗皇帝, 주기진)마저 오랑캐의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 와자의 흉포함이 이와 같다!
지금의 명나라는 그 시절보다 못하고, 적의 기세는 야선에 못지 않으니 조선이라 한들 어찌 기사년의 변을 다시 겪지 않으리라 장담하겠느냐?
이참에 와자를 토평하여 만세에 이르도록 우리 땅을 안전케 할 것이니 너희는 깊이 듣고 나의 명을 따르라!"
이자원의 말에 병사들은 모두 창칼을 꺼내 들면서 호응했다.
조선군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이 점령한 요동을 떠나 새로이 몽골에서 터전을 찾으려는 만주인, 혹은 오랜 난세에 지쳐있던 몽골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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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다시 오게 될줄은 몰랐구나!"
지르갈랑은 오묘한 감정에 잠겨 말했다.
그는 몽골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차하르의 릭단에 맞서 코르친을 돕기 위해 출병했던 적도 있었고, 할하와 차하르를 치러 온 적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았다.
청의 국세는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었고, 콧대 높은 황금씨족조차 그들 아이신기오로 일족에게 고개를 숙였으니.
그러나 이제는 옛날에 정복했던 자의 후손을 옹립하여 여기에 뿌리를 박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이제 승상이니 나라의 전권이 쥐었다 할 것이다. 잘 다스려보도록 하라."
이자원이 말했다.
그를 임명한 것은 대칸 아부나이지만, 이자원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다.
지르갈랑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사지에서 죽을 뻔한 것을 살려주시고 이제 다시 날개까지 달아주셨으니 어찌 은혜를 잊으리까. 상국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몽골을 잘 통제하겠습니다."
지르갈랑은 눈치가 빨랐다.
이자원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챈 것이다.
그는 태생이 만주인이니 결코 몽골 대칸의 자리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굴러온 돌이 감히 그 자리를 취하는 것을 두고 볼 몽골인은 없을 터이므로.
지르갈랑도 그것을 알고 있을테니 오로지 '칭상'으로서 실권을 쥐고 흔드는데만 전념하리라.
이자원은 이 대칸 아부나이와 칭상 지르갈랑의 미묘한 알력을 이용해 계속해서 몽골을 통제할 작정이었다.
적어도 조선이, 이곳을 흡수할 역량을 갖출 때까지는.
그때 앞서가던 오보이군에서 병사 하나가 말을 달려왔다.
"텡기스의 깃발이 보입니다!"
응창을 비우고 떠난 텡기스는 끝없이 북서쪽으로 향했다.
아마 제 주인인 오이라트군과 합류하기 위해서이리라.
한창 추격하던 텡기스의 꼬리를 잡았으니, 이제 박살낼 차례였다.
이자원은 말의 배를 걷어찼다.
한편 그즈음하여 오이라트 역시 텡기스의 깃발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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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이라."
조선 도원수의 군기를 발견한 부하들이 앞다퉈 바투르에게 보고하자, 그는 중얼거렸다.
"여진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놈들이 아닌가? 생각보다 일찍 만나게 되는군."
논밭이나 매는 놈들 주제에 초원까지 나아온 용기는 칭찬할만하다.
바투르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또다른 보고가 들려왔다.
"선봉에 선 장수 하나가 한번 붙어보자며 외치고 있는데, 어찌 해야하겠습니까?"
바투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서 맞서보겠는가?"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소인의 아들인 추즈킨을 보내주십시오. 기껏 상대하는 자들이 여진과 고려 놈들이라면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선 자는 호이드의 솔톤 타이시였다.
호이드는 오이라트 연합의 일원이긴 하였으나, 가장 강대한 네 부족-준가르, 두르부드, 호쇼드, 토르고드-보다는 약간 처지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워 입지를 다져보려 하는 것이다.
"좋소. 타이시의 아들이라면 분명 대단한 맹장(猛將)일 터. 단숨에 적장의 목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싸움에 앞서 선봉장의 목을 얻는다면 기세부터 압도할 수 있다.
이곳에 모인 오이라트의 족장들은 이 초전(初戰)에서 질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처음부터 엇나가고 말았다.
"내가 호이드의 용장 추즈킨이다!"
준마에 올라타고 오보이를 치러 나간 솔톤의 아들 추즈킨은 적장과 격돌했다.
- 챙!
기세 좋게 일합을 겨룬 추즈킨은 다시금 적장을 향해 창날을 뻗으려 했으나, 그보다 적의 움직임이 빨랐다.
- 퓻
추즈킨의 목에서 핏줄기가 터져나왔다.
"이, 이런!"
오이라트 족장들이 혀를 차는 가운데 수급을 들어올린 적장, 구왈기야 오보이가 외쳤다.
"너희 오이라트 놈들의 무용이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 이런 실력의 어린애는 우리 만주에는 수도 없이 많다!"
이는 과장이 있는 표현이었다.
어디까지나 청 태종에게서 만주제일용사라는 칭호를 받았던 오보이였기에 손쉽게 적을 쓰러트렸을 뿐.
그러나 오이라트의 군주들은 감히 그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굉장한 용력이군!"
바투르는 혀를 찼다.
내심 상대를 얕보고 있던 자신의 생각이 깨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맹주께서 호거를 상대하실 적 그 휘하에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다 조선에 붙어 몽골에 온갖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필히 처치하는 것이 옳습니다."
바투르는 텡기스의 말에 다시금 오보이를 해치울 자를 보내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때 저편에서 오보이가 외쳤다.
"나는 청나라 태종 황제께 친히 전사 중의 전사라 칭찬을 들었던 자다! 나를 꺾으려면 너희 임금이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오보이의 외침에 바투르는 헛웃음을 흘렸다.
군주의 역량이라는 것은 일신의 힘으로만 결정나는 것은 아니다.
군재(軍材)나 내정을 다스리는 능력, 그리고 섬세한 정치력 등이 어우러져 완성되는 것일뿐.
그들 같은 유목민이라 하여 예외는 아니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전사의 자질 역시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는 것.
"저리 말하는데 홍타이지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은 어떠하오?"
호토고이드의 옴보 에르데니가 포문을 열었다.
"맹주 역시 뛰어난 전사 아니십니까. 적장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 친히 저 오만한 입을 꺾어주시지요."
호쇼드의 아블라이는 숫제 빙글빙글 웃으며 조롱하듯 말했다.
바투르는 그들의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에르데니나 아블라이 등도 바투르가 친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걸 안다.
그럼에도 이렇게 추동하는 것은 오로지 바투르를 깎아내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4오이라트 연합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뭉친 연합.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가 서로의 우위에 서려고 하는 수작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연합을 이끄는 그의 자리를 탐하는 자들임에야.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연합의 주장(主將)인 바투르에게 직접 나설 것을 권하는게 아닌가.
바투르는 구태여 대꾸하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추후르, 너는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당장 적들을 쳐라. 가능하면 저놈의 목을 따오거라."
동생인 추후르에게 대신 그리 명하는 바투르였다.
'역시 이놈들은 오래 놔두어서는 안되겠다.'
오이라트의 맹주 따위가 아니라, 준가르의 대칸으로서 이 경쟁자들을 모조리 발 아래 놓는 상상을 하며 바투르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 초원의 패자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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