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61화 (161/213)

< 임오화약 >

명 조정에서 온 사신은 직방낭중 마소유(馬紹愉)라는 자였다.

"사신께서 온 것을 보니 이 사람이 보낸 장수가 잘 도착한 모양이구려."

마소유는 이자원의 말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 말처럼 차마 제 입으로 화친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숭정제는 임경업이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다다르자 그를 친견했다.

숭정제를 만난 임경업은 오체투지하여 대죄했다.

'신은 조선인이나 명나라의 신하입니다. 그간 조선은 대국의 은의를 소중히 여겨왔사오나 지금에 이르러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양국간의 불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작금 무부들의 강경함은 바위처럼 굳으나 신이 몹시 설득하여 화친의 주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모쪼록 황상께서 사람을 보내어 이에 응하여 주십시오.'

임경업이 허리를 크게 숙이고 나서야 숭정제는 '조선이 이리 나오니 말을 들어봄이 가하다'며 화친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소유는 이자원에게 길게 읍하며 말했다.

"우선 칙사를 죽인 것은 조선이 아니라 여진 잔병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사실이야 어쨌든 지금은 명으로서도 그렇게 공언할 수밖에 없었다.

마소유는 이어서 말했다.

"다만 이것이 조선의 소행임을 주장하며 성상의 판단을 흐리고 함부로 출병케 하여 환란을 초래한 자들이 있었으나, 이미 모두 주살되었습니다."

도성의 병사(兵事)를 맡아보던 위조덕(魏藻德) 같은 자는 숭정제에게 부화뇌동하던 자로서, 금주 출병에도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로 돌아와 숭정제가 냉큼 그의 목을 잘라버렸으니 억울함이 컸으리라.

"황상께서 간신을 처단하셨다니 다행이오."

전쟁을 일으킨 주체는 숭정제임이 뻔했으나, 이자원은 그 점을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옆에 서있던 김육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부절을 쥐고 군사를 이끄는 장수일 뿐, 이러한 일은 모두 문신이 맡아야 할 것이오. 마침 호조판서 김육이 우리 전하의 뜻을 받들어 왔으니 감계(勘界)와 협상은 모두 이 사람과 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마소유는 김육과 맞절을 나누었다.

"번국도 성심으로 상국을 받들 뿐입니다."

김육이 허리를 숙여 마소유를 맞았다.

그 공손한 태도에 마소유의 얼굴은 조금 풀어졌다.

임경업이 몹시 저자세로 나오기에 조선 역시 사정이 좋지 않은줄 알고 있었으나, 조선군은 언제라도 산해관을 넘을 듯이 강맹했고, 조련 역시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가던 조선군들의 태도도 전쟁 전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이 거칠었으니 마소유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을 뿐 적잖이 상했던 것이다.

"우선 국계부터 논하지요."

"그게 좋겠소이다."

김육은 지도를 펼쳤다.

"원래는 영원과 쌍수보로 귀국의 경계를 삼고, 탑산으로 아국의 경계를 삼으려 하였으나, 이미 영원성이 우리의 다스림을 받길 청하였소. 기왕 이리된 마당이니 그저 깔끔하게 관동(關東)으로는 모두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함이 옳을 것이오."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니외까?"

마소유는 이리 항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송산 싸움으로 요서 전역이 무너지고, 영원을 지키던 오양마저 항복했다.

명은 수복을 위해 보낼 병력도 없었으니 산해관 이동으로는 모두 조선의 손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싸움에 져서 그리된 마당이니 마소유로서는 속을 앓으며 이를 인정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요동을 반환하라던 요구 탓에 이리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실로 혹떼려다 혹붙인 셈이었다.

"아울러 가도의 무역을 재개하는 한편, 금주에서 호시를 열어 인삼과 초피, 말 따위를 교역함이 가하오."

만주를 손에 넣은 조선은 이러한 물건들을 얼마든지 공급해줄 수 있었다.

그 대가로는 은이나 전략물자인 초석, 그리고 중계무역에 필요한 생사와 도자기 등을 가져올 수 있으니 한층 재정이 충실해질 것이었다.

"받아들이겠소이다."

이런 호시에서는 명이 손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김육이 열거한 품목은 명으로서도 필요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소유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김육은 표정에 미동 하나 없는 상태로 입을 열었다.

"또한 번방이 청을 멸하느라 소요된 군비가 매우 많고, 작황이 좋지 않아 백성은 유랑하는 판이니 우리 충문왕(忠文王, 인조)의 제사조차 변변히 지내기가 힘든 판이오.

귀국은 예의가 시작된 나라로,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토록 충절을 지켜 순사한 신하가 없으니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마땅히 대국이 이런 사정을 살펴 매년 은 백만 냥 정도만 제사비로 내려 주시오."

"배, 백만 냥?"

마소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나라 재정은 갈수록 악화일로를 걸었다.

숭정 초년만 살펴보아도 세입이 390만 냥인데 반해 세출은 520만 냥으로서 재정적자가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즉위한 숭정제는 전세를 더 거두어들이고, 생원에게 면제되던 요역을 부활시켜 추가로 세량을 부과함으로써 극복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예기에 이르기를 제사는 풍년이라 하더라도 사치하지 아니하며, 흉년이라고 해서 검박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소. 제아무리 충문왕이라 하여도 제사를 치르는데 은 백만 냥은 너무 과하오."

명목이 제사비이지 실은 조선에 바치는 세폐나 다름이 없다.

이를 모를리가 없는 마소유였지만, 어려운 사정을 직접 털어놓을 수가 없으니 이리 우회적으로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알아서 정하는 것이지, 너희가 왈가왈부할 바가 아니다. 가가례(家家禮)라 하였거늘 어찌 남의 소용에 참견한단 말인가?"

그러자 이자원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며 외쳤다.

간섭하지 않겠다던 그가 나서자 마소유는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하, 하오나 대국의 사정도 헤아려 주십시오. 중원에 기근이 든지 오래인데 은 백만 냥은 너무합니다."

마소유는 숫제 내세우던 자존심마저 버리고 애걸했다.

그러자 다시 김육이 나섰다.

이자원과는 달리, 사람좋아 봬는 푸근한 얼굴로 김육은 마소유를 달랬다.

"내 듣자하니 천조의 세출은 거의가 군향(軍餉, 군비)에서 비롯한다 들었소. 헌데 이미 오랑캐가 무너지고 우리와는 화약(和約)을 맺어 변방의 근심이 없어졌거늘 군비를 그만하게 쓸 필요가 무엇 있겠소?

그대는 황제께 상신하여 군사는 흩어서 논밭으로 돌려보내고 창칼은 녹여 괭이와 쇠스랑을 만드시오. 그리하면 자연 소출이 늘고 세입도 안정될 터."

김육의 말에 마소유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다.

그러나 김육은 내친김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섰다.

"내 듣기로 만력 말년의 군향은 280만 냥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즈음에는 그 서너배가 훌쩍 넘는다 하니 그것만 줄여도 천조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 것이오. 어찌 은 백만 냥 따위가 무겁다 하겠소?"

"그런!"

마소유가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이자가 명나라의 세입과 세출을 어찌 안단 말인가.

김육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 북경에 있을 적 고관들과 교유하며 명의 제도와 실상을 낱낱이 보고 들었소. 배울 것은 배우고, 귀담아 들을 것은 깊이 기억해두었으니 이만한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소."

그는 명에 갔을 적 '예악을 묻고, 문학을 논평하고, 의문도 풀고, 못 듣던 말도 들을 것'을 다짐했으며, 또한 운하를 통한 조운이나 물자의 통행 등도 깊이 살폈다.

그 과정에서 명의 세출입을 주워들은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천조를 대신하여 청을 정벌하였고, 누대의 치욕을 모두 갚았소. 대국이 간신의 참소에 휘둘려 조선을 친 것조차 옛 정을 살펴 너그러이 넘어간 것은 우리가 모두 예의를 아는 나라이기 때문이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로움에 밝은 법이니(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황제께서는 곧 천하 모든 사대부의 우두머리이시오. 군자 중의 군자이며 천하의 이치를 살피는 분이니, 군비를 조금 줄이는 것이 두려워 화의를 파토내지는 않을 것이라 믿소."

"영명하신 황상께서 그러할 리는 없으니,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필경 여전히 간신이 눈을 가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즉시 군사를 휘몰아 산해관을 넘어서 황상을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이자원이 김육의 말에 덧붙이니 마소유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말 산해관을 넘을 작정이구나!'

설마 산해관이 그리 쉽게 떨어질까 싶었으나 조선은 청과 명을 상대로 연거푸 이겼다.

저들의 공성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모르니 마소유로서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반드시 황상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런 말은 거두어 주십시오."

결국 마소유는 조선측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자원은 물러나는 마소유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정 명나라의 환란이 계속되거든, 우리가 군사를 내어 천조의 도적들을 토벌하여 줄 수도 있다. 이를 황상께 전하여라."

이자원의 말에 마소유는 멈칫했지만 이내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그, 그것 또한 조정에 돌아가 고해보겠소이다."

===

"명이 이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줄은 몰랐소이다."

김육이 말했다.

그토록 몰아친 장본인이 그였지만 김육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은 백만 냥.

아예 명의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릴 제안이었지만, 마소유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정말 산해관을 깨트릴지도 모른다 믿었기 때문일 것이오."

산해관은 천혜의 요새다.

그러나 조선군의 공성 능력 역시 저들이 보기엔 한없이 미지수인 상태.

그렇기에 조선이 숙여줌을 구실로 하여 평화를 사들였을 것이다.

불과 수년짜리 평화일테지만.

'몇년 내로 화력을 보강하여 다시 이곳에 올 것이다.'

명이 은 백만 냥을 대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정말 군대를 상당수 해체하고 조선에 계속 세폐를 바치며 살아가든, 아니면 재정 파탄을 각오하고 군대를 기르며 조선과의 일전을 다시금 준비하든.

어느쪽이든지 간에 명나라의 미래는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조선은 한계에 달한 재정을 회복하고 다시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렇게 명이 폭발사산하기까지 돈을 우려내면서 준비하다, 산해관이 스스로 열릴 때 들어갈 것이다.

"호판께서 군사를 줄이라는 말을 한 덕에 일이 조금 쉬워지게 됐소."

그 말을 들은 이상 숭정제는 결코 군비를 축소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파멸에 이를 때까지 소모하리라.

그러나 김육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진심이었소."

그의 심정은 굳었다.

어차피 군비로 전용된다 하나 상당수는 탐욕스러운 명나라 조신들이며 관리들의 입에 들어갈 터.

차라리 이렇게 군비를 줄이는 것이 명나라의 민(民)으로서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조선은 충량함을 다할 것이고, 오랑캐마저 무너진 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이까. 무신불립이라 하였으니, 반드시 버려야 한다면 군대를 가장 먼저 버려야 하겠지요."

"그러하오?"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결국 김육이 군사를 흩고 쇠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라 하던 말은 조선 또한 염두에 두고 한 말이리라.

"이제 화약이 맺어졌으니 도원수께서도 철군을 준비하시오. 귀한 아내와 어여쁜 자식들을 보러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김육의 은근한 독촉에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될 말이외다."

"······어째서요?"

김육은 이자원을 보고 물었다.

"와자가 달단을 병합하고 요동을 노리고 있소."

오이라트의 바투르 홍타이지가 텡기스를 돕기 위해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그는 이제 그를 토벌하러 이동해야 했다.

아직까지 조선에 있어 군축은 아니될 말.

이자원은 전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임오화약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