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여드는 세력 >
북방에서 싸움이 계속될 동안 조정도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량이야 원정군 나름대로 충원하는 분량이 있었으나, 극심한 화약의 소모는 후방에서 보급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에는 호조판서 김육만한 이가 없어, 그가 기존의 호조 업무에 더하여 북벌의 일마저 떠안았으니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터.
그런 그가 이 먼 요동까지 왔다는 것은 보통 신호가 아니었다.
"어쩐 일로 호조판서께서 직접 오시었소?"
도원수 이자원의 물음에 김육은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도원수께 본국의 사정을 설명드리려 왔소."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완전히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돌아가고 있는 국내의 사정, 도성 부민들로부터 원납전을 거두고 그간 쌓아둔 이익으로 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이대로라면 끝이다.
"기민을 구제하기는커녕 추가로 세수를 걷어야 할 판이올시다."
"본국은 물론이고 북변에까지 마령서가 널리 퍼졌으니 백성들이 당장 끼니 거를 염려는 없을 터요. 아직 목적을 달성치 못했으니 어찌 군대를 물리겠소?"
이자원의 말에 김육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이미 송산과 금주에서 적군을 대파하였는데 어찌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겠소?"
"이미 처음 칙사가 죽은 건으로 대국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황제의 눈을 가린 간신을 모두 처단하기로 맹서(盟誓)하였소. 이는 도성에 계신 주상 전하와 자전의 허락을 받은 일. 어찌하여 호판꼐서 왈가왈부하시오?"
"산해관을 넘겠다는 말씀이시오?"
"요서가 모두 조선의 손에 들어왔으니 불가한 일은 아닐 것이오."
"이곳 금주까지 보급을 대는데도 많은 민력이 소모되고 있소이다."
김육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만 군대를 거두는 것이 옳소."
"어리석은 소리!"
그렇게 외치고 나선 것은 오삼계였다.
이미 명을 반역하고 이쪽에 붙었는데, 끝장을 보지 않는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그였다.
"명에 화친 의사를 타진해보아야 하겠소이다. 본관은 그 명을 받들어 이곳에 왔소."
김육의 말에 장수들이 반발했다.
이자원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이것은 호판의 뜻이오, 그렇지 않으면 전하의 뜻이오?"
"자전께서 수렴하시니 자전의 뜻이외다. 다만 내가 자전께 간하기는 하였소."
이자원은 김육을 쏘아보았다.
김육은 묵묵히 그 시선을 맞받았다.
설령 이 흉신악살이 자신을 칼로 쳐죽인다 하여도 뜻을 꺾지는 않을듯한, 결연한 표정이었다.
"좋소."
한참 그를 노려보던 이자원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장수된 몸으로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소. 이곳에 머무르며 교섭하여 보시오. 누가 호판 대감을 모셔드려라."
김육이 물러가자 이자원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곁에 붙어있던 박철균이 물었다.
"정말 이대로 화평 교섭을 하실 작정이시오이까? 애초에 내세운 대의는??."
"그런 것을 믿었는가?"
이자원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깝소이다. 명군을 만나는 족족 쳐부수었으니 이대로 산해관으로 군사를 몰아간다 하더라도 능히 함락할 수 있을 터인데."
이자원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산해관은 이때까지 맞닥뜨렸던 명의 관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반신불수가 된 말기의 명나라조차 최후의 최후까지 쥐고 있었던 곳이 아닌가.
원래 역사의 청 역시 송금대전 이후 산해관까지 명을 밀어냈지만, 끝내 싸워서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미 임경업을 보내어 저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이자원은 딱딱하게 말했다.
상당히 과한 조건이었으나, 명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김육은 생각보다 후한 제안에 어리둥절할테지.
"그것은 소관도 들었소이다. 허나 명이 그만한 돈을 대어줄 수 있을지."
"어렵겠지."
한두번 정도라면 몰라도, 명은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수년 뒤쯤이면 명은 완전히 시체가 되어있을테니 그것을 구실로 산해관을 넘으면 그만이다.
'그때가면 화친을 주장한 자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터. 그건 그렇고,'
이자원은 박철균을 보며 물었다.
"등기사(텡기스)가 상당히 기세를 올리고 있다 들었다. 그쪽의 상황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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텡기트는 황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황궁이라 하나 옛날 호거가 응창을 재건할 때 꼭두각시인 에제이의 몫으로 지어준 것.
때문에 그리 크거나 웅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칸을 칭할 자격도 되지 않는 그들 형제가 황궁을 차지한 것 자체가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
그러나 형인 텡기스는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대전 중앙의 옥좌에 앉아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형님!"
"무슨 일이냐?"
한창 열락에 빠져있던 그는 동생을 보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지금 지르갈랑이 아부나이를 옹립하여 응창으로 진격중이고, 다르한 부의 조리그투는 몽골 제부족들에게 격문을 돌리는 중이랍니다! 우리 형제가 대칸에 맞서는 조적이니 토벌해야 한다구요!"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지르갈랑은 망한 청나라의 친왕이고, 조리그투는 초원에서 근거지를 잃고 쫓겨난 자였다.
전혀 접점이 없어보이는 그들이 갑자기 황금씨족 혈통 하나를 얻어 자신들을 치러온다니?
"개고 뭣이고 간에 사실입니다. 형님, 어찌해야겠습니까?"
텡기스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렸다.
청은 망했고, 그 자리를 차지한 조선이 복속할 것을 강요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논밭이나 파먹는 농군들.
이참에 오이라트와 결맹하여-실상 귀부를 요청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텡기스는 이렇게 생각했다-동몽골의 패자로 우뚝 설 작정이었거늘.
"그 숫자는 얼마쯤 되더냐?"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5천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5천이라.
응창을 함락하고 기세를 올렸다 하나 그들 형제가 단독으로 상대하기엔 심히 부담스러운 병력이었다.
"맹주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
텡기스가 급히 물었다.
그는 반기를 들기 전, 4오이라트연합에 이런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바투르는 선선히 지원을 결정했으나 호거의 잔당을 소탕하느라 아직 막북 어드메서 머무르고 있었다.
지르갈랑과 조리그투. 둘 모두를 움직인 것은 아마 조선일 터.
조선이 이리 신속하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텡기스였다.
"제기, 저놈들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곳 몽골까지 욕심을 낸단 말인가?"
텡기스가 한탄했다.
"만주를 얻더니 제놈들도 청나라나 다름없어진 것인가!"
"형님, 우선 군사를 거두어 서쪽으로 피하시지요."
텡기트가 간했다.
오보이와 소닌 정도라면 그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싸워 격퇴할 수 있었지만,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어지면 감당할 수 없다.
텡기스는 입맛을 다시며 황궁을 나섰다.
비록 꼭두각시라 하나 대칸이 머무르던 궁궐.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머지 않아 다시 돌아오마.'
텡기스는 그렇게 되뇌이며 소리쳤다.
"군사를 거두어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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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역사의 오이라트는 이 시기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와 키르기즈를 향해 군사력을 투사했다.
카자흐 군주 양기르(Yanggir), 우즈벡의 아미르 얄란투쉬(Am?r Yalantush), 그리고 알라타우 키르기즈(Alatau Kirgiz)가 모두 이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의 뒤틀림은 그들에게 새로운 몽골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게 했다.
몽골의 타이시를 자칭하던 호거를 토벌하고 많은 부족을 복속했던 오이라트 연합이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고 재차 몽골의 통일을 이뤄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텡기스가 전해온 귀부의 요청은 실로 바라마지 않던 바였다.
텡기스는 텡기스대로 오이라트의 힘을 빌려 동몽골을 차지하려 했지만, 4오이라트 연합의 맹주 바투르 홍타이지는 그를 단지 새로 귀속한 하부세력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텡기스의 지원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밑사람의 무능함에 혀를 찼다.
"고작 패망한 여진의 떨거지와 흩어진 부족 몇을 당해내지 못해 물러났단 말이냐?"
준가르의 성세는 이 바투르 홍타이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사후 잠시 주춤했다가 아들 셍게의 치세를 거쳐, 또다른 아들 갈단이 즉위하는 때가 되면 오이라트는 모두 준가르의 이름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만큼 바투르는 실로 효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자.
텡기스를 한심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텡기스의 말로는 배후에 조선이 있는 것 같다 합니다."
"조선?"
천산 산맥을 근거지로 삼았던 그로서는 동방 끄트머리에 있는, 이름이나 겨우 들어보았을 법한 소국이었다.
"그런 놈들이 뒤를 봐주면 얼마나 봐준단 말이냐?"
조선을 업신여기는 바투르에게, 부하가 청나라마저 멸망시킨 나라라고 부연했으나 별 감흥은 없었다.
"그래보았자 명나라의 곁가지일 뿐."
바투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이미 한 갈래 군사를 보내 감숙을 대대적으로 약탈케 했다.
감숙을 지키던 명군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니, 조선 역시 그정도 수준이 아니겠는가.
"청을 멸망시켰다 하나 여진 놈들이 강하면 얼마나 강했겠는가? 나와 직접 맞붙었다면 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죄 멸족(滅族)당하였을 것이다."
"맞습니다, 형님."
바투르의 말에 동생인 추후르가 맞장구를 쳤다.
바투르는 텡기스가 보낸 부하에게 말했다.
"우리군은 조만간 오르곤에 다다른다. 텡기스더러 그리로 합류하라 일러라."
오르곤은 응창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400리쯤 되는 곳이다.
멀다면 먼 거리이나, 이들은 모두 유목민이고 중간에는 너른 초원이니 금방 합류할 수 있으리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맹주."
맹주라는 말에 바투르는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4오이라트 연합에서 맹주 노릇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연합이 모두 진심으로 자신을 떠받드는 것은 아니었다.
'호쇼드 놈들은 숫제 내 교역선까지 은근히 탐하고 있지 않은가.
준가르는 가축과 모피, 중국에서 사들인(혹은 약탈한) 차와 옷감, 담배 등을 토볼스크, 타라, 톰스크 등 시베리아의 러시아 도시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다.
근거지인 호복 사르에 석성까지 건설하여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
하지만 자신의 사위인 오치트르와 그 동생 아블라이는 준가르를 제쳐놓고 거기에 한 다리 걸쳐보려는 꿍꿍이를 숨기지 않았다.
'더 많은 전공을 세워서 이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어야 한다.'
몽골 전역을 모두 손에 넣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터.
그리고 그리된다면??.
'오랜 꿈을 이룰 수 있겠지.'
대칸.
일개 홍타이지로 불리는 그에게 그보다 달콤한 울림을 주는 말은 없었다.
황금씨족은 아니었으나 몽골과 오이라트를 통할하면 누가 그에게 반발할 수 있으랴.
언젠가 이 준가르가 오이라트를 전부 흡수하고, 몽골을 손에 넣으며, 중국을 정복하고 저 서쪽의 초원까지 질타할 날을 그리며 바투르는 말고삐를 움켜잡았다.
"자, 이제 충분히 쉬었으면 움직여라! 조선에 붙은 여진과 몽골 패잔병들을 분쇄하러 가자!"
"예!"
바투르의 외침에 전사들이 호응했다.
원래 역사에서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후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오이라트는, 지금 날아오르기 위해 기지개를 폈다.
< 모여드는 세력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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