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9화 (159/213)

< 포석 >

지르갈랑은 신미도에 들어온 이래 하릴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기주인 지르갈랑이 그러했으니 그를 따라들어온 양람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하가 대란한데 우리 기주께서는 무얼 하고 계시는건지."

"몽골에서는 숙친왕이 무너졌고 묵던 조정도 망했다던데."

내전에서 참패하고 이곳 신미도까지 밀려들어온지도 어언 수년.

조선은 그들에게 피할 장소는 내어주었으되, 딱히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주위 섬의 약탈은 엄금하고 물자를 따로이 대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양람기의 전사들은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야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찌어찌 해내가고는 있었지만 차라리 이럴 바에야 아민에게 붙는 것이 낫지 않았냐는 푸념이 공공연히 퍼져나갔다.

지르갈랑도 그런 불만을 모를리가 없기에 술만 퍼마시며 끓는 속을 달랬다.

"정친왕 전하??."

이날도 불콰하게 취하여 있던 지르갈랑에게 아우인 구사어전 퍙우가 찾아왔다.

동생의 말을 들은 지르갈랑이 픽 웃으며 자조했다.

"이 조그마한 섬에서 허도세월(虛度歲月)하고 있는데 왕은 무슨 놈의 왕이란 말이냐?"

지르갈랑은 퍙우를 핏발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비록 쫓겨온 몸이되, 순순히 놈들에게 이용당하지는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호거가 다시 돌아와 도르곤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불러들일 때까지 은연자중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호거는 묵던으로 회군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보다는 몽골에 눌러붙는 편을 택했고, 그나마도 오이라트에게 패망했다.

'정녕 이 섬에서 최후를 마쳐야 하는가?'

조선은 그에게 아무런 모욕도 위압도 가하지 않았으나 이미 그의 마음은 꺾여있었다.

난세의 군웅으로서 작은 섬에서 세월만 보내다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

'조선이 나를 써주기라도 했으면 좋겠구나.'

조선이 북벌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은근히 한 손 거들겠다며 이자원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지르갈랑은 그 뒤로 숫제 폐인처럼 지냈다.

섬에서 난동을 부려봤자 비참하게 진압당하고 끝날 운명이니 감히 반기를 들지도 못했다.

그때 지르갈랑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역시 축 처져지내던 퍙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이자원이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무슨 말이냐?"

의례적인 서신 교환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관심을 끊은 이자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라니.

"이자원이 형님을 몽골의 칭상(丞相, 승상)으로 추천하였다고 합니다. 차하르 친왕 아부나이가 이를 받아들였으니, 생각이 있다면 북으로 올라와 응창을 옹위하고 역도를 쓸어내라고??."

"그, 그게 정말이냐?"

지르갈랑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부나이의 제안이라 하나 그는 조선의 꼭두각시.

이것은 이자원의 뜻이리라.

조선이 드디어 그를 이 좁은 새장에서 풀어줄 작정임이 틀림없었다.

'몽골의 칭상이라.'

요동은 직할할 의도이니 지르갈랑 같은 군벌을 그대로 둘 수는 없고, 몽골로 보내어 오이라트를 막는 방패로 쓸 작정일 것이다.

그러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냐, 다시 일어나주마. 이 지르갈랑의 삶을 하잘것없이 좁은 땅에서 끝내야 되겠는가.'

지르갈랑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다시금 기회가 찾아왔다.

비록 고향인 만주가 아니라 몽골이긴 하지만, 아부나이를 내세워 타이시로서 실권을 잡고 점차 세력을 통할(統轄)해간다면??.

지르갈랑의 입에 웃음이 맺혔다.

"아울러 이런 서찰이 동봉되어왔습니다."

지르갈랑의 행복한 상상을 퍙우가 끊었다.

어리둥절해 그것을 뜯어보니, 단 네 글자만이 쓰여있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하."

지르갈랑이 헛웃음을 뱉었다.

분수를 지키면 욕되지 아니한다는 뜻이니, 지르갈랑이 몽골로 간다 해서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되면 신미도에서 허송한 보람도 없이 패망하게 될 것이라고.

"감히 조선에 반항할 뜻을 품지 말라는 것이로구나."

지르갈랑은 이자원의 심계에 혀를 내둘렀다.

늑대를 길들이는 법은 간단하다.

잔뜩 굶겼다가 고기 한 점만 떨어트려주는 것이다.

그리되면 야성은 수그러들고 매번 주인의 손만 쳐다보게 되니, 늑대가 아니라 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르갈랑으로선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고작 4년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 세월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기에.

"이자원에게 전하라. 우려하시는 일은 없으리라고."

지르갈랑은 이자원의 서찰을 움켜쥐었으나, 차마 찢지는 못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흉흉하던 늑대는 이젠 대놓고 목줄을 채워도 반항하지 못했다.

단지 넓은 땅으로 나아가, 자신의 야성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뿐.

지르갈랑의 양람기는 텡기스 토벌을 위해 움직였다.

===

한편 요서에 머물던 다르한 조리그투도 이자원이 보낸 사람을 맞아 들이고 있었다.

"나를 타이시에 봉하겠다고?"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조리그투는 눈을 크게 떴다.

대칸의 위호(位號)를 아직 회복치는 못하였으나 조선은 아부나이를 내세워 동몽골을 통솔할 작정임이 분명해보였다.

어리고 힘없는 아부나이가 직접 세력을 이끌수는 없었으니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하필 자신을 점찍었다니.

"나처럼 세력도 보잘것없고 초원에서 쫓겨난 이에게 이런 관직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이오?"

조리그투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 수크사하에게 은근히 물었다.

수크사하는 가볍게 웃으며 일축했다.

"확실히 속민의 수로 따지면 보잘것없기는 하지요."

"헌데???"

조리그투는 화도 내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그러나 작금 몽골에서 귀공보다 눈에 띄게 큰 세력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릭단 칸의 몰락과 청의 정복, 호거의 할거와 오이라트의 침공이 이어지는 동안 동몽골의 여러 세력은 산산히 분쇄되었다.

그나마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텡기스와 텡기트는 아예 반란을 일으켰으니 논외였고.

"그러나 귀공께서 친왕을 받들어 몽골 부활의 기치를 올린다면 그렇게 흩어진 이들이 귀공에게 호응할 터. 당장 세력이 없는 것 정도야 문제가 아니지요."

수크사하의 설명을 듣고도 조리그투는 여전히 의심을 떨쳐버리지 않았다.

"굳이 나인 이유는 뭐요?"

"살아남았지 않습니까."

그 마경인 몽골에서 목숨이라도 건져온 것이 어디냐.

이번 송산 전투에서도 눈치껏 빠져나간 것도 능력이었다.

"도원수께서는 귀공이 시류를 잘 읽는 점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줄타기 실력이 주효했다는 뜻이다.

거기다 조선군의 강함도 뼈저리게 겪어보았으니 함부로 맞서지 못할거란 계산과 함께.

"옛 청나라 정친왕 지르갈랑이 칭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고, 그 밑의 양람기도 만만찮으니 아마 몽골의 일익은 그가 담당하겠지요."

"나머지는 내가 맡으라? 여진인의 득세에 반발하는 노얀들을 끌어모아서?"

조리그투는 눈치가 빨랐다.

호거에 이어 지르갈랑이 꼭두각시 대칸을 내세우면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조리그투 같은 자가 서서 세력을 모아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르갈랑이 기껏 재건한 아부나이 정권을 홀랑 삼키는 것만큼 뼈저린 일은 없다.

그리고 몽골계와 여진계의 분열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 바였다.

어디까지나 동몽골은 오이라트 주도의 통일을 막고, 요동과 요서의 안전을 보장하는 완충지대로 남아야 했으니까.

수크사하가 꺼낸 것은 조리그투가 적당히 그 역할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결국 조선의 뜻대로 움직여라??."

"싫다면 거절해도 된다는 것이, 도원수의 말씀이었습니다."

조리그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갈 곳도 없고, 부족도 크게 꺾인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데 어찌 거절하겠소. 내 금주에 계신 주인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리다."

얼마 후.

아부나이가 대칸으로 옹립됨과 동시에 지르갈랑이 칭상, 조리그투가 타이시에 올랐다는 소식이 몽골 전역에 퍼졌다.

텡기스는 뒷배인 오이라트에 이를 고하는 한편, 직접 휘하의 부족을 이끌고 싸움에 나서니 초원에는 다시금 피가 흩뿌려졌다.

===

북경 자금성.

"계요총독 홍승주가 전사했다고 들었다."

숭정제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하들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여진과 내통한 어느 장수와 달리 진정한 충신이로다. 황성 밖에 사당을 짓고 짐이 조만간 친히 제사를 지내겠다. 채비를 하도록 하라."

그러면서 이어 말하는 숭정제다.

"요서가 모조리 함몰되었고, 이제 산해관만이 외로이 서있을 뿐인데 어찌해야하는가? 제신들은 의견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보라."

서로 눈치만 보느라 나서지 않던 그때, 중윤 이명예가 나서서 말했다.

"조선군은 삽시간에 금나라를 멸한데 이어 요서까지 차지했으니 정강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형세 또한 몹시 시급합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잠시 파천(播遷)하심이 어떠한지요?"

이것은 숭정제와 미리 교감이 있었던 내용이었다.

"민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문왕과 공자묘에 순례하는 척하여 곡부에 이르면 20여 일 안에 회안까지 다다를 수 있나이다. 금방 남도(南都)로 옮겨 나라를 일으킬 수 있으니 부디 성단을 내려 따라주십시오."

전날 은밀히 논했던 이명예의 헌책이 그대로 대전에 튀어나왔다.

숭정제는 슬쩍 신하들이 동조할 것을 기대했지만 이내 격렬한 반대가 터져나왔다.

"아직 산해관이 남아있는데 어찌 도읍을 버리겠나이까?"

"적들은 먼길을 와 고단하니 쉽게 성벽을 넘지 못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소서!"

숭정제는 반대가 심하자 냉큼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여러 신하의 말처럼 국군(國君)은 사직을 지키며 죽는 것이 떳떳하다. 중윤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안면몰수하고 그리 대답한 숭정제였지만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싸우는 것도 안된다, 도망치는 것도 안된다, 화친하는 것도 안된다.

서로 말이 다르고 발목만 붙잡기 바쁘니 어찌 자신이 정사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짐은 계요총독의 제사를 주관할 터이니 조당은 대책을 논하여 상신토록 하라."

그러면서 대전을 떠나버린 숭정제였다.

졸지에 황제 대신 대책을 논의하게 된 신하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홍승주와 조대수가 야전군을 모조리 말아먹은 판에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산해관을 지키면 지키는거고, 아니면 화친하는 수밖에 없거늘.

그러나 황제의 측근인 낙양성마저 전쟁을 반대하다 동창에 끌려간 마당이니, 신하들은 숭정제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조신들이 그리하여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성지(聖旨, 임금의 뜻)는 화친에 있는듯하오."

병부상서 진신갑이 제 도당 몇에게 속삭였다.

"아니, 그렇게 전쟁을 밀어붙이시던 분이???"

"그러니 직접 말은 꺼내놓지 못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겠소이까."

진신갑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럼 누가 나서서 고해야겠는가.

"상서께서 고하시지요. 군무는 병부의 소관이 아닙니까."

그러자 진신갑이 펄쩍 뛰었다.

"아니, 엄연히 번국인 조선과의 관계이니 예부가 나서야지요. 애초에 칙사가 죽은 사소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일이니 말이오."

여러 도당의 대립.

그리고 황제가 벌인 수없는 숙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하들은 책임 떠넘기기와 정쟁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숭정제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니, 명나라 조정이 돌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 대개 이 모양이었다.

'화친을 제안했다 일이 잘못되면 어찌되나.'

황제는 자신이 주도한 일이라도 신하에게 덮어씌워 숙청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임경업이 북경에 들어섰다.

< 포석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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