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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8화 (158/213)

< 거주양난 >

송산의 대패 소식에 숭정제가 손을 떨고 있고 있을 무렵.

도성에서 파견된 선전관이 금주로 들어섰다.

"전하와 자전께서는 금번 승리를 크게 치하하시었사오이다. 비록 대국의 군대와 싸운 것이나 난신, 간신이 군사로써 조선을 겁박하는 것을 막아내었으니 그 공이 견줄데가 없다고요."

선전관이 말을 이었다.

"하여, 조정에서는 대감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를 가자(加資)하자는 논의가 있사온데 도원수 대감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대광보국숭록대부란 조선에서 가장 높은 품계이다.

산계(散階)로는 정1품의 상계에 해당하니 신하로서 이보다 높이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자원은 사양했다.

"아직 간신의 뿌리를 뽑지 못하였으니 받을 수 없네."

아들 안세를 부마로 삼겠다는 것도 그렇고, 자신에게 높은 품계를 주는 것도 그렇고 모두 군권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적당히 공을 세웠으면 모르되 신하로서 나라의 군권을 모조리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지만 이자원은 부마 이야기나 지금의 제안 모두 전쟁이 끝나면 보자는 식으로 미루어두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장에 나선 몸으로 집안일을 논할 수도 없고, 품계를 탐하지도 않는 모범적인 장수의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자원은 선전관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도성에는 별일이 없는가?"

이자원은 명을 내려 요서에서 요동까지, 그가 관할하고 있는 전 지역에서 적비를 잡아들이라 명령했다.

그러나 적비의 움직임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이미 조선으로 들어갔거나 명으로 갔거나 둘 중 하나일 터.

하지만 선전관은 고개를 저었다.

"원정이 길어지며 조정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는 있사오나 왕실은 편안하오이다. 도원수 대감의 집안에서도 별다른 탈은 없다 들었사오이다."

"그러한가."

이자원은 어사주(御賜酒)를 받아들고 선전관을 물렸다.

그러고보니 적비와 같은 날 탈출했으되 이미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자가 있었다.

이자원은 그를 불렀다.

"이대로 북경까지 진격할 작정이시오이까?"

끌려온 임경업은 이자원을 노려보며 외쳤다.

"안될 것 있는가? 남은 곳은 산해관 뿐이니."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이자, 영원성이 넘어간 지금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

청이 요서를 모두 병탄하고도 산해관을 넘기가 쉽지 않았듯이, 조선군도 이곳을 단시일 내에 넘을 수 있을지 명확하진 않았다.

'조선 내부의 피로가 심해지고 있다.'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오히려 타격을 받는 것은 조선일 터.

"칙사가 죽은 것은 불행한 사고였으나, 간신들이 어리석은 황제의 눈을 가린 까닭에 오늘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끝장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자원은 당장이라도 산해관을 넘을듯이 말했다.

"??산해관은 높고 두터운 곳. 감히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천조가 산해관에 의지해 국세를 회복하고, 다시 요서로 나아온다면 어찌하겠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국과 화의를 도모함이 옳소."

비슷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지만 명의 영토는 끝없이 축소되어가기만 할 뿐, '국세를 회복해 강토를 수복'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자원은 그를 비웃는 대신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다 말했다.

"허면 그대가 화약(和約)을 주선해보겠는가?"

"화약을 말이오?"

"조선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충심의 소산. 간신들이 제거되고 나라를 추스릴 재물만 하사받는다면 구태여 산해관을 넘을 필요는 없겠지."

요컨대 숭정제가 요식행위로 신하 몇 날려버리고 세폐를 바치면 이대로 군사를 물릴 용의가 있다는 뜻이었다.

임경업의 눈이 반짝였다.

"도원수가 이제라도 그런 마음을 먹었으니 다행한 일이오. 나를 보내주면 황제의 앞에 간뇌를 쏟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국이 화의를 맺도록 하겠소."

"정말 이대로 군을 거두어 돌아가실 것이오이까?"

임경업이 나가고 나자 유림이 걱정스레 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천하를 뒤엎지 않으면 안된다.

말 그대로 숭정제를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임경업의 말처럼 언제 명의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

이자원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칼자루를 어루어만졌다.

그때였다.

수크사하가 뛰쳐들어와 소리쳤다.

"장군!"

"무슨 일인가?"

잠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른 수크사하가 고했다.

"수니트 좌익의 텡기스(騰機思)가 그 아우 텡기트(騰機特)와 함께 난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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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의 정세는 몹시 어지러웠다.

우선 그 원인은 도르곤이 응창을 점령하고 명목상 몽골의 대칸이었던 에제이를 끌고 간데다, 주력을 이끌던 호거마저 4오이라트연합에 패하여 사라진데 있었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그 근거지가 저 멀리 천산에 있었고, 아직까지는 말 그대로 '연합'이었던 탓에 이러한 공백지에 합심하여 영향력을 투사하기란 난망했다.

역사적으로도 준가르가 두르부드나 호쇼드, 토르고드 등의 세력을 누르고 명실상부한 오이라트의 패자로 등극하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남은 것이다.

반면 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르곤은 병사한 에제이 대신 그 동생 아부나이를 내세워 몽골을 통솔하려 했지만 그 본인이 이자원에게 패해 처형당했고 청은 아예 멸망해버리면서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그 계획을 이어받은 것은 청을 점령한 이자원이었다.

아부나이의 왕작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오보이와 소닌 등에게 상당수의 만주인과 몽골인 호구를 딸려 보내주었다.

이정도면 붕 떠버린 동몽골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며, 방파제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와자(瓦刺, 오이라트)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사오이다."

이자원 역시 동감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텡기스는 본래 차하르의 릭단 칸 휘하에 있다가 할하에 귀순했던 자.

그러다 이내 몽골에서 독립한 호거 밑에 들어갔고, 도르곤이 쳐들어오자 청에 투항했으니 지금의 혼란을 틈타 깃발을 바꿔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보이와 소닌은 각자 용맹과 지략으로 이름났으니 충분히 통솔할 수 있으리라 여겼거늘."

"능력과 상관없이 그들은 만주인입니다. 텡기스 같은 자가 쉬이 따르려 들지 않겠지요."

이자원은 잠시 고민했다.

오이라트가 몽골을 모조리 차지한다면 일껏 차지한 요동마저 위험하다.

텡기스와 텡기트의 반란은 더 확대되기 전에 지금 억눌러야 했다.

"다르한 조리그투."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수크사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자는 어떤 자인가?"

"다르한 부의 수장이기는 하나 그 세력이 크게 융성한 것도 아니고, 그저 외번몽고의 일익을 담당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시류를 읽는 능력은 좋겠지요."

홍타이지가 죽은 정축년 이후 숱한 반란과 전투, 부족 간의 이합집산이 잇따랐던 몽골이다.

거기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못해도 보통은 한다는 뜻.

"송산에서 이탈했지만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사람을 보내보라."

조리그투는 송산 전투가 끝나자 제 부족을 이끌고 북쪽으로 물러났다.

기껏 의탁했던 명이 요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니 이젠 몽골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터.

"조리그투와 손을 잡는 정도로 되겠사오이까?"

수크사하가 물었다.

"요동의 병력은 대부분 이리로 빠져있습니다. 저 텡기스나 그를 후원하는 오이라트 놈들이 묵던을 직공하기라도 한다면??."

팔기는 대개 전멸했고, 한인 병력들도 죄다 대명 전쟁에 종군했다.

수크사하의 말에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

심양 황궁.

강덕제(康德帝), 아니 지금에 이르러 폐제(廢帝)가 된 아이신기오로 쇼서는 여전히 황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 조선군 장수 김준룡과 그를 보좌하는 이암이란 자가 모든 정무를 도맡을 뿐, 쇼서는 어디까지나 망국의 군주로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하기야 명색이 당당한 청의 황제로 군림할 때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이가 없었거늘, 하물며 남의 포로가 된 신세임에야 오죽할까.

그렇게 서책으로 소일하던 쇼서를 은밀히 찾아든 이가 있었다.

"지금 한창 수니트 좌기에서 반란이 일어나 어지럽고, 이곳의 조선군 병력도 상당히 그리로 몰려갈 예정이라 하옵니다. 이때 한께서 분연히 일어나 묵던을 장악하신다면 능히 대청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사위 보르진은 많은 자손을 두었는데, 지금 쇼서를 찾아온 이는 그 손자 마친과 증손 캉칼아였다.

청 멸망 후 종친과 장수들은 엄격한 견제를 받았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전공을 세운 적이 없어 감시가 덜했다.

그렇기에 핑계를 틈타 입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쇼서는 내심 입맛이 썼다.

'대청의 뭇 장수들은 어디 가고 이런 자들만 남았단 말인가.'

그간 청의 숱한 숙장, 명장들은 병자호란과 내분, 조선의 북벌을 거치며 전부 쓸려나갔다.

마친과 캉칼아는 아직 나이가 젊어 혈기가 왕성했지만 믿고 의지하기에는 부족했다.

쇼서의 대답이 없자 그들은 급히 말을 이었다.

"두두의 아들 두르후는 건방지게도 조만간 자신이 건주공에 봉해져 아이신기오로의 종주(宗主)가 될 것이라 떠들고 다니고 있사옵니다."

"저들이 정녕 두르후를 통하여 대청의 맥을 잇도록 마음먹었다면, 한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습니다. 이대로 조선의 도성으로 끌려가시면 더는 손쓸 수가 없게 되니, 부디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쇼서는 앞선 두 명의 한,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처럼 전사형 군주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서책과 문리에 밝았다.

두 섭정왕이 그리로 몰아간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쇼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쉬웠더라면 어째서 강유가 다시 계한을 일으키지 못했겠소? 대세가 결정난지 오래이니 함부로 나서지 말고 그대들의 목숨과 집안이나 잘 보존하도록 하시오."

쇼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마친과 캉칼아의 의기는 가상했지만 따라줄 수는 없었다.

이미 두르후가 종친들을 통솔하고 있었고, 금 황실의 후예를 자칭하는 울라부의 몇몇 인간들은 아예 성도 김씨로 갈았다 들었다.

이제 와서 난을 일으켜보았자 누가 따라주겠는가.

'그래, 이거면 된거다.'

듣자하니 저자의 무지렁이 백성들조차 그 연원을 조사하여 고려나 조선인 조상이 있으면 조선인으로 인정해준다고 하였다.

그럼 만주인이라고 조선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옛 신하들이야 기겁하겠지만, 그자들은 애초에 도르곤이나 호거의 신하였을 뿐 자신의 신하는 아니었다.

'만주와 조선은 본래 하나, 만주와 조선은 하나??.'

쇼서는 끝없이 되뇌였다.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조부로부터 내려오는 대업을 망친 자신의 죄도 희석되는 것 같았기에.

마친과 캉칼아는 실망을 품고 물러났지만, 쇼서의 표정은 오히려 결연해졌다.

그는 궁에서 숙위하던 조선군을 불러 말했다.

"도원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해다오. 같은 형제로서, 우리 만주인들도 반란을 진압하는데에 한 손을 거들게 해달라고."

< 거주양난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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