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7화 (157/213)

< 최후의 명장(明將) >

"밀어내라!"

상지신이 외쳤다.

그의 등에선 땀이 쭉 흘러내렸다.

그 강한 조선군과 한편이 되었기에 누워서 떡먹기일줄 알았더니, 이자원은 무슨 생각인지 구 녹영병만 이끌고 이리로 와 홍승주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전황은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길, 이대로 물러나야 하나?'

상지신은 흘끔 뒤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 유혹을 털어냈다.

'사람이 살다보면 피치 못하게 한번은 배신할 수 있다.'

아버지 상가희는 항장답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두번은 안돼. 그리되면 누구도 다시는 받아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말처럼 연산관에서 조선군을 막다가 전사하셨다.

나름 청을 위한 충정을 다 바친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도 그 길을 따르기는 싫었다.

아버지가 한번 명을 배신했듯이 자신도 청을 배신하고 아버지를 죽인 조선군에 붙었다.

재차 명에 가려해봤자 배신자의 오명만 뒤집어쓸 뿐.

이제는 죽기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도망가지 말고 싸워라!"

상지신은 혼비백산에서 이리로 튀어오는 의군들을 모조리 참살했다.

그의 호령에 병사들은 움찔하며 창을 다잡았다.

"젠장할!"

상지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이 요동 의군은 녹영병과 쿠툴러 출신으로 이루어졌기에 해볼만한 싸움이라 생각했거늘, 적의 공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서로가 비슷한 힘으로 맞부딪쳐도 틈은 생기는 법.

홍승주는 명장답게 그 조금의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데 능했다.

그러나 이쪽 장수들도 만만찮게 버텨냈다.

"도망가지 마라! 어차피 이대로 군이 무너지면 다 죽는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도 죄 죽임을 당한단 말이다!"

원문필은 눈빛을 번득이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의 강한 상승 욕구가 죽음의 공포마저 잊어버리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쿠툴러 출신이라더니, 과연.'

상지신은 그 귀기 어린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재차 병사들을 독려했다.

"죽여라!"

그리고 그 무렵 이자원이 이끄는 기병들이 적군의 후방을 향해 들이닥쳤다.

척계광이 정립한 대기병 전법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거병(車兵)의 존재이다.

전차로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그 안에 탄 거병들이 불랑기와 조총을 쏘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저지에 성공하면 그 뒤의 기병과 보병들이 일제히 돌격하여 적을 치게 되니, 참호와 전차를 잘 활용한다면 능히 적을 잘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질려포통(?藜砲筒)을 던져라!"

이자원의 명령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기병들이 무언가에 불을 붙여 던졌다.

질려포통은 원시적 수류탄으로, 한정된 효용성 때문에 상당히 도태되었으나 조선 수군에서는 여전히 명맥을 이어 쓰이고 있다.

이것을 이자원이 소수 가지고 온 것이다.

후대의 수류탄처럼 강력한 살상능력을 갖추진 못했으나 적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훈국 마병들처럼 마상권총을 지니지도 못했고, 훈련받을 시간도 없었던 의군 기병들이었지만 이것만큼은 비교적 많은 훈련없이도 쓸 수 있었다.

- 퍼엉!

"끄아악!"

전차 하나에 굴러들어간 질려포통이 폭발하며 철질려가 사방으로 튀었다.

날카로운 쇳조각이 박혀 들어가자 명군이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자원은 적병에게로 돌입했다.

"화, 화전을 쏘아라!"

"잠깐, 이미 적들이 돌입했는데??."

말릴 틈도 없이 당파 위에 얹어놓은 화전이 일제히 쏘아졌다.

타르와 기름 등에 타오르는 화살이 기병을 향해 날아왔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불길과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며 명군의 혼란만 가중시켰다.

- 우지끈

만주 출신의 육중한 전마는 거병의 저항없는 전차를 치워가며 적을 짓밟았다.

학살극이 잇따랐다.

- 타탕!

"적이 총을 쏜다!"

"겁먹지 마라!"

명군 쪽에서 화승총이 불을 뿜었으나 조선군처럼 격렬한 총화를 퍼붓지는 못했다.

여러번 강을 건너와야 했던만큼, 그만한 화약을 가지고 이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채 개별적으로 쏘아대는 총탄 정도야 두렵지 않다.

적은 기병을 상대로 제법 많은 훈련을 거친 모양이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기병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삽시간에 후방이 어지러워지자 맞서고 있던 요동 의군들도 적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한 쪽은 명군이었다.

"홍승주는 어디 있느냐!"

기병들이 한어로 우렁차게 외쳤다.

"겁쟁이처럼 웅크리지 말고 나와보아라! 흙파먹던 무지렁이들 상대로만 여포 행세를 하느냐!"

"저놈들이!"

홍승주의 부하들이 격분했지만 홍승주는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할 뿐이었다.

'여기에서 끝인가?'

- 척

"오직 사직을 위해 죽을 뿐이로다!"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의 목에 갖다댔다.

부하들의 눈이 커졌지만 홍승주는 바로 목을 그어내리지 않았다.

"??."

그러나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잠시 침묵한 홍승주는 이내 칼을 떼어 앞을 겨누었다.

"자결하느니 한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 제장들은 모두 나와 함께하라!"

===

한참 동안 명군을 들이치며 적을 쳐죽이고 있을 때, 무언가를 발견한 병사가 말했다.

"장군, 저자가 홍승주입니다!"

칼을 뽑아든 여러 명의 장수들이 모여서 호령하는 모습이 보였다.

병사는 그 중 가장 갑주를 잘 갖춰입은 이를 가리켰다.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이자원이 명령했다.

홍승주는 그 자신의 군재도 상당할 뿐더러, 길잡이 노릇도 충실히 할 수 있다.

거기다 숭정제가 신임하던 장수이니 그가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퍼질 충격도 클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여러모로 사로잡는 것이 이득이었다.

이자원의 명령에 기병들이 일제히 달려갔다.

명군의 분투에도 아랑곳않고 몇차례 적을 쳐죽인 그들은 홍승주를 향해 올가미를 던졌다.

"으윽!"

달리는 말 위에서 올가미를 던져 목적을 잡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본래 청군 소속이었고, 수십 명이 둘러싸서 던져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홍승주를 사로잡았다! 홍승주를 사로잡았다!"

시끄러운 외침이 곧 울려퍼지고, 사기가 떨어진 명군은 줄줄이 항복했다.

이와 함께 전투는 끝났다.

===

대승이었다.

송산에서 죽은 명군은 셀 수도 없었다.

조선군과의 역량 차이는 현격했고, 별동대를 금주로 기동시키기 위해 무리한 공세를 펼친 까닭이 컸다.

"조대락(祖大樂), 조대필(祖大弼), 조대청(祖大淸)이라는 자들을 사로잡았는데 모두 투항 의사를 밝히었사오이다."

"모두 외숙의 종형제입니다."

오삼계가 덧붙이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을 보내어 조대수에게 투항을 권해보라. 이미 크게 패하여 사기는 곤두박질쳤고, 양도마저 끊기어 외로운 판국이니 필경 받들 것이다."

"예."

이자원은 조대수가 항복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이미 대릉하성을 지킬 때 청군에 포위되어 큰 곤란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성내의 군량이 다하자 굶어죽는 자가 줄을 이었고, 군민(軍民)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조대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거짓 항복을 했다가 이후 금주성으로 탈출했지만 두번 그런 꼴을 겪기는 싫으리라.

다음으로 끌려온 자는 바로 홍승주였다.

이자원은 그에게 뚜벅뚜벅 다가가 손수 결박을 풀어주었다.

"어찌하여 포로를 죈 오라를 풀어주는가."

홍승주가 물었다.

"대명 계요총독이시니, 가도 총병인 본인의 윗사람이 아니외까. 그런 분을 함부로 묶어둘 수는 없지 않겠소."

그 말에 홍승주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황제께서 성지를 내려 너의 직책을 거두었거늘 그 무슨 망발인가. 나의 환심을 사려 하는 모양인데, 평생토록 명나라의 은혜를 입은 몸이니 헛수고에 불과하다."

이자원은 그런 홍승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 명나라를 배신하라 했소?"

"허면?"

"나는 간신을 척결하고 조선의 누명을 풀겠다는 말만 하였을 뿐 명을 무너뜨리겠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소. 조선은 명의 충용한 번국이거늘 어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소."

이자원이 내세운 명분은 분명 그러했다.

홍승주가 헛소리라 반박할 틈도 없이 이자원은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문필은 원 상서 대인의 친자요. 원 상서는 일세의 명장이었으나 참소를 받아 죽었으니 어찌 골수에 한이 맺히지 않겠소? 간신이 천하를 농단하여 이런 꼴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쇠할 수밖에."

"정말 원 장군의 친자란 말인가?"

홍승주와 같이 사로잡혀 있던 부하들이 그리 소리쳤다.

그들은 원숭환의 휘하에 있던 자들이었으니, 원문필의 얼굴에서 옛 상관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간신의 참소라니. 황제께서는 만기를 친람하시는 분. 설령 경사를 점령해도 너희의 폭거가 인정될 것 같으냐?"

이자원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황제를 갈아치우면 되겠지."

이자원의 폭탄선언에 홍승주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황제를 폐하고 태자나 종실 중 현명한 이를 골라 세우면 되지 않겠소?"

황제는 의심으로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모두가, 심지어 홍승주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황제의 폐위까지 직접 거론하다니.

충격받은 홍승주에게 이자원은 평온한 투로 말했다.

"가담치 않겠다면 풀어줄터이니 명으로 돌아가시오."

"돌아가???"

홍승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둘 필요는 없겠지. 언제든 보내줄 터이니 천천히 생각해보시오."

이자원이 손을 젓자 군졸들이 홍승주와 그 부하들을 끌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박철균이 물었다.

"도원수 대감, 일껏 사로잡은 자이외다. 어째서 풀어주겠다 하시는 것이오이까?"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자원이 딱 잘라 답했다.

명의 마지막 야전군은 이곳에서 끝장났다.

돌아가보았자 숭정제의 분노와 여력이 다한 명나라만 남아있을 뿐.

그럴바에야 차라리 '거사'에 합류하는 것이 백배는 나을 터.

"홍승주는 진정으로 명에 충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을 뿐."

진실로 명나라에 충성했다면 원래 역사에서도 절의를 지켜 죽었겠지만, 홍승주는 그리 하지 않았다.

살길과 함께 적당한 명분마저 쥐여주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얼마든지 조선을 따르리라.

스스로를 할만큼 했다 위안하며.

===

"홍 총독마저 사로잡히셨으니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뜻이구나!"

얼마 후 조대수마저 무릎을 꿇고 나와 조선에 항복했고,

"아버님께서 영원성을 들어바칠 뜻을 밝히셨습니다."

후방에서 지원하던 영원총병 오양은 대세가 기울자 즉각 항복 의사를 전해왔다.

송산성과 영원성이 모두 항복했으니 그 사이의 탑산과 행산 등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리하여 이자원은 요서를 완전히 평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은 쥐어짜낸 최후의 정예군마저 변경에서 소모하고 침몰했다.

사천에서는 장헌충이 중경을 함락하고 이어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성도로 진격했으며, 남쪽에서는 정지룡이 기세를 올렸다.

이렇게 천하에 또 하나의 혼란을 더한 이자원이 다음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 최후의 명장(明將)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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