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산 전투 (4) >
홍승주(洪承疇)는 원숭환이 죽은 지금 명실상부한 명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다.
고영상과 이자성을 잡아죽이고, 장헌충을 대파해 파촉으로 쫓겨가게 만든 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의 경력은 모두 산해관 너머 중원에서 쌓인 것.
병부상서와 5성 총독 대신 계요총독(?遼總督)의 인수를 받아 나아온 홍승주는 명군의 동요에 내심 당황했다.
여아하를 건너 북쪽으로 우회, 금주를 직공하려던 명군을 막아선 것은 이자원이 이끄는 '요동 의군'이었다.
그리고 그 선봉으로 나온 소년은??.
"나는 전 병부상서 원숭환 대인의 아들 원문필이다!"
원문필이 나서서 소리치자 명군이 술렁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홍승주의 휘하에는 요서를 지키던 병력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옛날 원숭환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자들.
진작 원문필에 대한 소문은 한번 돌았던 바가 있지만, 그 장본인이 전장에 나오자 명군들은 크게 놀랐다.
"아버님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다면 나와서 비교해보라! 부풍모습(父風母習)이라 하였으니 분명 알아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소관이 확인해볼까요?"
원문필의 외침에 홍승주의 부장이 무심코 나서려 했다.
홍승주는 그를 찌릿 째려보며 일축했다.
"쓸데없는 소리."
홍승주가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저자가 원숭환의 아들이란게 사실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동요를 막으려면 있는 사실도 덮어야 할 판인데 말이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어떻게 원 상서의 아들이 오랑캐 땅에 있단 말이냐? 이를 믿어 군심을 흩는 자는 참하겠다."
홍승주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원문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제 옆의 간신들이 국사를 농단하고 충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느냐? 조선은 명의 제일번국이고, 나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원 상서의 아들이다. 우리는 간신을 몰아내기 위해 손을 잡았으니 너희는 목숨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어서 항복하라!"
원문필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재차 명군이 흔들렸다.
이미 임경업이 퍼뜨려댄 이야기로 출진 명분조차 의심하게 된 상황이다.
거기에 원숭환의 아들이 나서서 설득하자 명군들의 전의는 꺾이기 시작했다.
'조선놈들이 잔꾀를 부리는구나.'
홍승주는 이것이 모두 조선군이 펼친 계략임을 확신했다.
'돌아가면 임경업부터 목을 베겠다!'
그러나 우선은 눈 앞의 조선군부터 맞서야했다.
"임금의 은혜는 바다처럼 깊고(君恩深似海), 신하의 절개는 산처럼 무겁다(臣節重如山)! 조선군의 요설에 동요하지 마라! 우리는 한번 싸워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 모두 진격하라!"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다.
눈 앞의 적군을 물리치고 금주를 함락하든, 아니면 적에게 목숨을 내맡기든.
선택지는 그 둘 뿐이었다.
===
왕뢰(王磊)는 팔기의 노예병, 즉 쿠툴러였다.
병자년의 조선 원정에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그 전으로도 후로도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는 여러번 치러보았다.
처음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청의 국세가 흥성할 때는 그같은 말단 쿠툴러에게도 제법 짭짤하게 보수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라의 사정이 기울며 모든 약탈품은 국고나 높으신 분들의 수장고에나 들어갈 뿐, 그의 수중에는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있던 정마저 떨어질 무렵 조선이 청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점령했다.
왕뢰는 옆에서 방패를 치켜들고 있는 친구 이사(李四)를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조선인으로 종족을 바꾸니 좋은가?"
"안좋을 것 있나. 조상이 조선인이라 하니 그래도 조선놈들 시선이 좀 달라지던걸."
이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이사나 자신이나 족보없는 놈들이다.
원칙상으론 조상 중 고려인이나 조선인이 있어야 호적을 바꾸어주지만, '관'에서는 크게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생판 연관없으면서 스스로 조선인이 된 자들이 부지기수였고, 이사도 그중 하나일 뿐.
다만 왕뢰는 예외였다.
자신의 성인 왕씨가 조선에서는 옛 왕조의 성씨라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로보나 과장된 소문이었지만, 왕뢰는 어쨌든 찜찜했기에 한족으로 남는 편을 선택했다.
"차라리 성을 갈지 그러나?"
"에잇, 개놈의 팔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건 성씨 하나 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버리란 말인가?"
왕뢰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이번 싸움이 끝나면 한인이고 조선인이고 전부 차등없이 전리품을 나누어주고, 전공을 셈해주겠다지 않던가."
이자원은 요동 의군을 끌어모으며 먼저 그것부터 약속했다.
명나라가 요동 사람들 다 죽이러 온다는데 한인이고 조선인이고 무슨 상관인가.
거기다 전리품도 평등히 나눠준다니 참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새 나라를 위해 싸울 뿐일세."
어차피 그간 자신들의 상전은 만주인이었고, 그것이 만주인에서 조선인으로 바뀌었을 뿐.
이 정도면 충분히 평등한 대우였다.
"적이 온다!"
그렇기에 왕뢰는 눈 앞의 명군을 보고서도 스스럼없이 그리 내뱉었다.
명은 애초에 처음부터 그의 나라가 아니었기에.
===
"화포도 없고, 총기도 부족하다."
홍승주군은 여아하와 소릉하를 건너기 위해 무장이 가벼웠지만, 그것은 이자원이 이끌고 있는 요동 의군 역시 마찬가지.
오로지 믿을 것은 이들 '의군'의 기량 뿐이었다.
"청이 일세의 장기로 삼은 것은 오로지 팔기였으나, 쿠툴러와 녹영의 전력도 만만찮았소이다."
원문필이 대답했다.
그 말처럼 청이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숱한 전장에 나섰던 의군이다.
조선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무척이나 잘 싸워나가고 있었다.
-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비명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요동 의군이 된 녹영과 명군 모두 척계광에게서 비롯된 삼수병제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이미 조선 중앙군에서는 상당히 도태된 전법이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그것조차 패널티는 되지 못한다.
양군 살수들이 서로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죽어라, 이 명나라의 개들아!"
"오랑캐의 노비 놈들이!"
이쪽이나 저쪽이나 한어(漢語)로 악다구니를 썼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달랐다.
서로를 개나 노비로 비하하며 흥분과 증오에 사로잡혀 살육을 벌인다.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홍승주가 외쳤다.
"달단 마병을 출격시켜라!"
이때를 위해서 본대에도 주지 않고 데려왔던 몽골 기병이다.
다르한 조리그투를 비롯한 몽골 기병들이 의군을 향해 부닥쳐갔다.
"장군, 적들이 옵니다!"
이자원은 냉정히 적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명나라 기병은 아닌 듯하고, 몽골병인가.'
"마병들은 모두 나서라!"
이자원은 직접 말에 올라탔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적을 맞으려는 심산이었다.
이자원이 이끄는 의군 기병이 도원수의 군기를 들고 몽골 기병을 향해 달려갔다.
"저것은!"
다르한 조리그투 역시 그 깃발을 보았다.
아무리 초원의 교육이 생존과 전투 위주로 이루어진다 하나, 조리그투 역시 저정도 글자는 읽을 수 있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자원??."
그러나 뭐라 할 틈도 없이, 몽골 기병과 요동 기병이 맞부딪쳤다.
충돌과 동시에 뻐그적하며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기량으로는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군.'
이자원은 천지검으로 적의 허리를 베어들어가며 혀를 찼다.
녹영 출신 기병들도 팔기를 따라다니며 제법 싸움을 많이 겪어보았다 하나, 진짜 유목민 출신인 몽골 기병들을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적 기마의 수가 이쪽보다는 적다는 것.
그리고 주장(主將)이 바로 이자원이라는 사실이었다.
- 촤악!
이자원의 칼이 춤췄다.
단숨에 몽골인 하나를 사선으로 베어낸 그는 멈추지 않고 옆에서 창을 내미는 적의 손목을 잘랐다.
피가 푸슉 튐과 동시에, 손목을 잃은 기병은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이자원의 칼에 목이 뚫렸다.
아군과 적을 막론하고 그 빼어난 검무(劍舞)에 찰나 넋을 잃었다.
'저자들이 적장인가.'
척 보기에도 후방에서 지휘하는 위치를 잡고 있는 중년의 남자 둘이 보였다.
이자원은 말을 달려 단숨에 그리로 치달았다.
몽골 기병들은 그 앞을 가로막으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자원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를 뿜으며 쓰러진 시체만 남았다.
"대어가 제발로 굴어들어왔구나! 이번 전쟁 최고의 공신은 바로 내가 될??."
호기롭게 칼을 뽑아 맞서던 지휘관은 다음 순간 천지검에 의해 칼이 양단된 뒤, 목이 날아갔다.
이자원이 이어서 옆에 있던 자의 목을 치려 할 때였다.
"자, 잠깐!"
다르한 조리그투가 소리쳤다.
"장군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오?"
이자원의 시선이 조리그투의 얼굴을 훑을 때 그가 이어서 설명했다.
"정축년 싸움에서 조선의 왕제(王弟)를 구출한 자가 바로 나요!"
그 말에 이자원이 멈칫했다.
청천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능원대군 이보를 확보했던 외번몽고군 장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반응에 조리그투는 간신히 숨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몽골로 돌아갔다가 시세가 불운하여 잠시 명나라에 의탁을 한 것이오!"
"그런데?"
잠시 칼날을 뗐던 이자원이 다시 그의 목에 바싹 붙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옛 인연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조리그투는 눈알을 미친듯이 굴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는 조선과 원수진 일도 없는 바, 그냥 보내준다면 이대로 말머리를 돌리겠소!"
"이번에는 명나라를 배신하겠다는건가?"
이자원이 묻자 조리그투는 코웃음을 쳤다.
"명이든 청이든 우리 몽골인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다르한 조리그투는 이미 한번 궁지에 몰리자 청을 배신해본 경험이 있는 자 아닌가.
다르한 부가 이탈하자 한 축이 무너져내린 전세는 금방 의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무리의 몽골병들이 외쳤다.
"이놈, 비겁자야! 어째서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느냐?"
"네놈이 그러고도 몽골의 사내이냐!"
그러나 조리그투는 대답조차 않고 말머리를 돌렸고, 이미 한번 파탄나기 시작한 전세가 뒤집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자원과 의군은 마구 적을 쳐죽이기 시작했다.
"우리군 두명이 오랑캐 한 놈을 상대하라!"
이자원의 명령에 의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공조하여 적을 쓰러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몽골병들 역시 그 기세가 대단했다.
창칼을 놓친 자들도 맨손으로 육박전을 벌이고, 더러는 이쪽의 무장을 빼앗아 싸우기도 하였는데, 이자원의 무용과 조리그투의 이탈에도 그들의 투지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몽골병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명에 대한 충절인가.'
이미 이 전장에서 종족이나 민족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인은 조선군 편에서 명군을 죽이고, 몽골인은 명군의 편에서 조선군을 죽인다.
===
홍승주는 역시나 명장이었다.
요동 의군은 녹영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라 결코 실력이 뒤떨어지지 않음에도, 지휘관의 역량 차이로 인해 조금씩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좌익이 무너지고 있소!"
원문필이 이솔태에게 외쳤다.
홍승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보병을 밀어붙였다.
이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전군이 붕괴될 터였다.
"적들을 죽여라!"
어느쪽의 조직력이 더 탄탄한지, 그리고 어느쪽의 경험이 더 많은지를 겨루는 싸움이다.
결국 홍승주는 여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좋다, 이 싸움만 이기면 금주를 떨어뜨릴 수 있다! 더욱 밀어붙여라!"
홍승주가 외쳤다.
그리고 그때, 이자원의 기병이 홍승주군을 덮쳤다.
< 송산 전투 (4) > 끝
ⓒ 핏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