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4화 (154/213)

< 송산 전투 (2) >

"대패, 대패란 말인가?"

홍승주는 조변교를 노려보며 물었다.

조변교와 그 옆의 다르한 조리그투는 할말이 없어 머리를 푹 숙였다.

'비록 대명(大明) 군대가 허수아비와 같아진지 오래라 하나 이자들이 이끌고 있던 마병은 실로 정예였거늘.'

그나마 군대꼴을 갖춘 명군 기병과, 명에 의탁한 몽골 기병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4만.

그런데 이정도의 패배라니.

겨우 1만도 안될 적병을 맞아 절반 넘게 잃고 돌아왔다.

"죽여주십시오, 총독! 적들의 기량이 상상 이상이었나이다. 금나라 오랑캐들마저 조선군에 가담하여 우리군을 찔러대니 차마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조변교가 눈물을 흘리며 대죄하자 홍승주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여진인들이 적군에 섞여 있었다고?"

청이 망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진인들이 조선군의 앞잡이가 되어 명군을 친단 말인가.

'조선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고.'

명이 요동을 점령했다면 당연히 만주족을 전부 쓸어놓고 흩어버려 흔적도 없게 할 터였다.

그간 당한 분풀이도 분풀이거니와, 만주족이 뭉쳐있으면 언제 다시 재기하여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처음부터 여진과 내통이라도 한 것인가?'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잠시 할 정도로, 홍승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선과 여진이 단단히 결합했다면, 황상의 우려도 기우가 아니다.'

이자원이 벌인 공작의 대개는 모르는 홍승주였지만, 작금의 패전으로 대충 그 결과만큼은 눈치챈 것이다.

'금주만 되찾는다고 답이 있을까? 이미 여진이 조선 손에 넘어간 마당에 화친을 맺어보았자 저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그러나 방법이 없다.

정말 저 눈 앞의 군대를 연거푸 싸워 이겨 요동까지 되찾고, 압록강을 넘어서 조선 도성을 함락해야 하는가.

"대인, 어찌해야합니까."

상념에 잠겨있던 홍승주는 옆에서 조대수가 부르는 소리도 채 듣지 못했다.

"총독 대인!"

그제서야 홍승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군령을 내려주십시오. 적들이 송산 코앞까지 다다랐으니 빨리 맞아 싸울 계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실로 옳소."

앞으로의 과제는 과제고, 우선은 당면한 일부터 처리해야했다.

"송산과 금주는 소릉하를 끼고 마주보고 있으니, 적을 맞아 싸우는 일은 어렵지 않소."

"허면 송산을 굳게 지키는 쪽으로 선회하시겠습니까?"

금주를 치러 왔더니 송산에 눌러앉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홍승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낮에 기병을 보냈더니 연거푸 패한 판이 아닌가.

"적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오. 우리군이 대군임을 이용해 점차 밀어내는 수밖에."

명의 후방 사정도 좋지 않다.

그럼에도 지구전이라는 결단을 내린 홍승주였지만, 그 계획은 다음 순간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총독 대인! 적들이 필가산을 쳤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달려온 군졸의 말에 홍승주는 벌떡 일어섰다.

"뭐라?"

명은 필가산에 대부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다.

그것을 빼앗기 위해 조선군이 나섰다는 보고에 명 장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미 낮에 수 차례 승리를 거뒀음에도 적들은 쉬지도 않고 필가산마저 점령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필가산이 넘어간다면??.

"당장 필가산을 구원하라!"

누구에게 명하는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홍승주의 군령에 꾸지람을 듣고 있던 조변교와 다르한 조리그투가 잽싸게 튀어나갔다.

===

오삼계는 가도군을 이끌고 소릉하의 하구를 건너 필가산으로 향했다.

송산을 무시하고 이리로 직공할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인지, 필가산의 명군 진영은 조용했다.

"적들은 눈치채지 못했는가?"

"우리 본군은 한참 위쪽에 있는데다, 오늘도 송산과 금주 일대에서만 싸움을 벌였으니 이쪽은 안심이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한심한 놈들이로군."

설마 첫날부터 우회를 할지는 몰랐던 명군이었으나, 정공법으로 대군을 상대할 마음이 없었던 이자원은 망설임없이 오삼계를 보냈다.

그리고 그 방심에는 참혹한 대가가 따를 예정이었다.

"부총병 대인, 헌데 이미 적의 굴혈을 빠져나왔으니 차라리 다시 홍승주 대인께 투항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

오삼계는 한심한 표정으로 부하를 쳐다보았다.

부하는 그 시선에 움찔해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조선군과 같이 싸우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인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오삼계는 대신 물었다.

"화포는 준비가 다 되었는가?"

"예, 부총병 대인."

"그럼 방포하라!"

야습을 위해 신속히 움직였으니, 화포는 사람 힘으로 옮길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불랑기(佛狼機) 정도만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정도 크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성곽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가져온 것은 아니기에.

- 퍼펑!

밤공기를 화포의 폭음이 갈랐다.

이윽고 날아간 포탄은 적진에 도달함과 거의 동시에 도화선이 타들어가며, 사방에 강력한 열기를 폭발시켰다.

- 화르륵!

필가산 이곳저곳에서 불이 치솟았다.

사주경계는 맡았으되 적당히 늘어져있던 명군들은, 난데없는 화기와 폭음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적진이 흔들립니다!"

"지금이다!"

부하가 저편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오삼계는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필가산에 꾸린 명군의 진영은 과거부터 진수(鎭守)해오던 곳인지라 성곽이 제법 남아있고, 모자란 곳은 목책과 녹각을 빽빽이 세워 꾸려 놓았다.

그러나 갑작스레 치솟은 불길로 당황한 틈에 가도군이 몰려오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필가산의 명군들이 군량에 옮겨붙을까봐 황급히 진화에 나서는 가운데, 오삼계가 칼을 들고 목책의 어귀에 이르니 그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목책을 열어라!"

간이식으로 만든 사다리를 걸치고 목책을 뛰어넘은 가도군들은 곧 문을 열어젖혀 동료들을 들여보냈다.

"와아아아!"

사방에서 가도군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나 여태껏 적의 조직적인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필가산을 지키는 장수들은 곤히 곯아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저들도 정신을 차릴 터이니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바로 들이쳐야 합니다."

"알겠다."

설명을 들은 오삼계는 바로 비탈을 타고 올라 적들을 치며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 움직였다.

필가산을 지키는 명군이 수천이나 된다 하나 잘 밤에 불이 치솟았으니 혼란이 가중되어 막아서는 이는 실로 소수였다.

"꺄아악!"

"적장은 어디 있느냐!"

척 보기에도 본영으로 보이는 곳에 쳐들어가니 적장은 사라지고 웬 여인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제기랄, 전쟁통에 잘들 노는 모양이로군."

오삼계는 혀를 끌끌 찼다.

작금 명의 장졸들이 여염집의 백성을 겁탈하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필가산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을 정도면 지위도 제법 될 터이니, 이런 재미 없이 뭘로 장수 노릇을 하겠는가.

아마 인근에서 잡아온 여자이리라.

나름 측은했지만 한시가 급하니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적장은 어디로 갔느냐?"

오삼계가 놀라 자빠진 여인에게 윽박지르자 그녀는 벌벌 떨며 열린 문을 가리켰다.

"적장이 군사를 수습하면 큰일이 난다! 어서 놈을 찾아라!"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황급히 뒤를 쫓아갔다.

"저기 누군가 도망갑니다!"

어둠이 깔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허둥지둥 뛰어가는 인영(人影)이 보였다.

그는 길도 아닌 곳으로 구르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활을 다오."

오삼계는 활에 화살을 쟀다.

장수로서 여러가지 무예에 능한 그였지만, 그 중에서도 나름 열심히 갈고 닦은 무예가 이 궁술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놓이는 순간, 적장이 픽하고 고꾸라졌다.

"적장을 잡았다! 적장을 잡았다!"

병사들의 우렁찬 외침을 뒤로 하며 오삼계는 땀을 훔쳐냈다.

필가산의 점령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수월했다.

'그래, 이런 놈들이랑 같이 싸우느니 조선군이 낫지.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항상 이겼다.

===

조변교가 이끌고 간 병력들은 필가산에 도달하기 전, 매복에 걸려 참패했다.

야음을 틈타 소릉하를 건넌 것은 가도군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총병 조변교를 죽이고 명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장군."

이자원은 수크사하를 쳐다보았다.

"대승을 거두었다고?"

"그렇습니다."

수크사하는 이자원에게 항복한 뒤로 잠시 근신하던 와중, 이번 전쟁에서 다시 기용되었다.

심양 회전에서 살아남은, 얼마 남지 않은 팔기들을 통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자원의 명령을 받들어 송산에서 필가산을 구원하러 오는 명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길목을 끊고 적을 들이쳐 크게 승리했다.

"전부 장군의 지략 덕분입니다."

수크사하는 진중한 얼굴과 맞지 않게 이자원에게 입발린 말을 건넸다.

"그 함에 담긴 것이 조변교의 목인가?"

"예, 장군."

수크사하가 공손히 함을 바쳤다.

이자원은 그것을 슬쩍 들추어보았다가, 다시 가지고 나가게 했다.

"수고했다."

"조변교는 용맹하고 전공이 많아 신망받는 장수였습니다. 이자의 수급을 취한 것은 대공이라 할만합니다."

유림의 말에 오삼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정작 필가산을 얻은 것은 자신이건만, 조변교의 목으로 인해 수크사하가 더 부각이 된 것이 아닌가.

"그보다 더욱 다행인 것은 필가산을 취했다는 것이다. 적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이자원의 말에 오삼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이자원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굳이 들추지는 않았다.

"필가산 정도 되는 요지를 이리 허무하게 빼앗기다니. 명군이 이리 허술할 줄 몰랐사오이다."

"진작 필가산의 중요성을 고한 오 부총병의 공이 크오."

이자원은 오삼계의 공을 거푸 치하했다.

필가산을 얻음으로써, 적의 군량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행산과 통하는 길도 끊었다.

적들은 이제 조선군의 포위망에 갇혀버린 것이다.

'적은 이제 사면초가(四面楚歌)다.'

송산에 보관하는 군량은 14만 대군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터.

예봉이 꺾인데다 군량마저 털렸으니, 홍승주가 전황을 뒤집으려면 결전에 나설 수밖에 없다.

"도망친 임경업의 흔적은 발견하였소?"

이자원이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완이 의문부호를 띄우며 답했다.

"아무래도 강을 건너 송산으로 향한 것 같사오이다. 하오나 장군의 부하였던 적비라는 자는 그 자치가 묘연하오이다."

"그렇소?"

이자원은 턱을 쓰다듬었다.

적비의 행방은 잠시 제쳐두고, 임경업의 경우 홍승주에게 무사히 건너가는 편이 좋았다.

홍승주는 조선군 장수의 투항에 쌍수 벌려 환호하겠지만, 이내 그 입이 재앙의 문이라는 것을 깨달으리라.

===

그리고 같은 시각.

송산의 명군 진영에 도착한 임경업은 홍승주와 조대수에게 그간의 진상을 털어놓고 있었다.

"칙사 대인은 우리 조선군의 손에 죽지 않았사오이다."

조선에서 제법 이름 있는 장수인데다가, 명군들 가운데서도 그를 알고 있는 이가 많기에 융숭히 대접했다.

필가산까지 잃은 이 시점에서 무언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러나 이런 소리나 늘어놓고 있으니 홍승주는 답답했다.

"조선군은 당연히 그리 말하겠지!"

"소관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칙사께서는 분명 오랑캐의 손에 참변을 당하셨습니다."

임경업의 말에 막사에 모여있던 명의 장수들이 동요했다.

조선이 칙사를 죽였다는 이유로 요서까지 와서 전쟁을 하고 있는 중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적진 한복판에서 그 전제를 부정하고 있었다.

"소관은 대명에 대한 충심으로 조선 군영을 탈출하여 여기에 왔사오이다. 부디 대국에서는 소관의 말을 믿으시어 오해를 풀고 번국과의 우의를 회복??."

홍승주는 잠깐 이 임경업이라는 자가 이자원이 보낸 간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홍승주가 지금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

"저자를 끌어내라! 저런 요사스런 말은 더 들을 필요가 없다!"

"대, 대인, 잠시만 소장의 이야기를??!"

홍승주의 명령에 임경업은 명군의 손에 끌려 나갔다.

그러나 동요하는 분위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당연히 거짓말??이겠지요."

조대수가 슬며시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물론이오. 저자는 우리를 흔들기 위한 간자. 저런 헛소리를 믿고 동요하는 자는 목을 베겠소."

홍승주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나 임경업 쯤 되는 고관을 고작 심리전 따위에 이용하기 위해 보낼 수 있을까.

그 역시 그런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송산 전투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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