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3화 (153/213)

< 송산 전투 (1) >

"적장 홍승주가 십여 만 대군을 거느리고 송산에 진을 치고 있사오이다!"

척후의 보고에 이자원은 제장들을 불러모았다.

"적이 이미 송산을 차지하였고, 전봉(前鋒)으로 명의 장수와 마병 한무리가 나와있으니 우선 저들을 모조리 쳐부수어야겠다. 누가 나서겠는가?"

이자원이 묻자 박철균이 대답했다.

"소관이 정초군의 별장이니 맡겨주십시오."

"좋다. 훈국과 어영청 마병, 그리고 여진 기병까지 모두 그대가 통솔하여 한번 적을 깨뜨려라."

기병과 기병의 싸움.

조선군은 연합군이라 복잡다단한 전략 전술을 펼치기엔 힘든 측면이 있었지만, 이자원은 조선군의 기량을 믿고 있었다.

'순전히 힘싸움을 벌이더라도 이길 수 있겠지.'

"적은 오로지 숫자가 많음을 믿고 포위하려 들 것이다. 그 점을 주의하며 싸우도록 하라."

"예, 대감."

박철균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

홍승주 역시 조선군의 진격 소식을 들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휘하에 여덟 총병을 거느리고 송산을 근간으로 진을 친 그는 4만에 달하는 기병을 쪼개어 전위를 맡겼다.

"조 총병, 그대가 나가서 한번 싸워보라."

"예, 총독 대인."

총병 조변교(曹變蛟)가 나서서 말했다.

그는 대동(大同) 출신으로, 변경에서 나고자라 기사(騎射)에 능했다.

'조선군은 청을 무너뜨린 자들이니 얕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적은 수효가 적고, 대부분이 보병. 이 참에 적의 예봉을 꺾어두어야겠다.'

홍승주의 명을 받든 조변교가 기병을 거느리고 나가자 맞은편에서도 한무리의 조선군이 몰려왔다.

"긴장하지 마라! 적은 한 무리다!"

척 보기에도 수만에 달하는 이쪽 기병에 비해 적은 간신히 1만이나 채웠을까 하는 숫자였다.

청의 철기가 상대라면 모르겠으나, 이만하면 해볼만하다.

"모두 전투 태세를 갖추어라!"

조변교가 명하자 명군 기병들은 창칼을 꺼내들었다.

그때 누군가 나서서 말했다.

"총병, 신중해야 하오. 조선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오."

명은 비록 쇠했다 하지만 엄연한 제국이다.

송산에 모인 병력은 천하 각지에서 모여든 장졸들이요, 본래 한인은 아니나 명의 번장(藩將) 노릇하는 몽골인도 제법 있었다.

지금 말을 꺼낸 두르번 커오커트 부족의 수장 다르한 조리그투 같은 이가 대표적이었다.

"나는 병자년에 한번 조선군과 싸워보았소. 그러나 그 시절에도 저들은 정예하지 않을지언정 꾀를 잘내고 싸울때 물러서지 않았으니, 청을 멸망시킨 지금은 더할 것이오."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를 따라 외번몽고군으로 종군했다가 청천강에서 이자원에게 항복, 다시 몽골로 되돌아갔던 그다.

그 뒤 호거가 에제이를 옹립했을 때 거기에 잠시 가담했으나, 끝내 호거가 몰락하자 이번에는 휘하 부족들을 거느리고 명에 투항했던 터였다.

'여기에서 그자와 다시 싸우게 되다니.'

얄궂은 운명이었다.

요서에서 다름아닌 이자원과 다시 한번 맞닥뜨리다니.

다르한 조리그투의 근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변교는 그런 조리그투의 말을 일축했다.

"조선군이 오랑캐를 무너뜨렸음은 안다. 허니 생각 이상으로 정강하겠지. 그러나 이미 내 총독의 군령을 받들어 싸우러 나왔거늘 적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우리군의 기병이 수만에 달하는데 부하들을 잘 독려해 싸움에 나서야 할 것 아닌가?"

전투는 기세다.

그런데 싸움에 나선 장수부터 적을 두려워해서 되겠는가.

조변교는 조리그투를 그렇게 꾸짖은 뒤 말고삐를 잡았다.

"군을 세갈래로 나눈다.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라!"

조변교의 명령에 따라 명 기병들은 크게 갈라져 조선군의 중앙과 좌·우익을 각각 노렸다.

===

"적들이 과연 우리를 포위하려 드는 모양이구나!"

수적 우위를 믿고 군대를 운용하리란 이자원의 예측이 맞아 떨어졌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겠소?"

소소쿠가 물었다.

그는 이자원의 명을 받아 동해여진 기병들을 이끌고 넘어온 터였다.

"병력을 나누어 대응해봤자 적들의 뜻대로 될 뿐이오. 오로지 정면을 똑바로 뚫어내야하오."

박철균의 말에 소소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만한 대병(大兵)을 본 적이 없었기에 기가 질렸다.

청군과는 같이 싸우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처음 맞닥뜨린 명군은 병력 자체의 규모가 달랐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청이 건재하던 시절 명나라는 제대로 청을 이겨본 적도 없지 않소? 우리는 바로 그 청을 무찌른 군대이니 겁먹을 것 없소."

아주 쉬운 공식이 아닌가.

"크흠, 겁을 먹은 것은 아니고??."

소소쿠가 항변했지만 박철균은 그것을 귀담아 들을 시간이 없었다.

적은 벌써 쇄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돌격하라!"

박철균이 말 배를 걷어찼다.

그 뒤로 조선인과 여진인을 가릴 것없이 끌어모은 기병들이 따랐다.

한참을 달려가다 양군의 윤곽이 제대로 보일때쯤, 박철균이 외쳤다.

"훈국군, 방포하라!"

선두에서 달려가던 훈국군이 피스톨로 뺴어들고 앞을 향해 쏘아댔다.

- 타탕!

훅, 하며 초연이 형성되었지만 후속부대가 일으키는 바람에 밀려 곧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조준도 무엇도 필요없다.

적당히 적을 겨냥해 닥치는대로 쏘아댈 뿐이지만, 확실히 적은 하나둘 떨어져나갔다.

정작 본래 그들의 지휘관인 황익은 슬쩍 빠져 뒤쪽에서 쫓아오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크게 상관없으리라.

- 두두두두

양군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지축이 흔들린다.

조선군 중에서도 단연 앞서나가고 있던 훈국 마병 안익신이 소리쳤다.

"20보!"

"활을 쏘아라!"

박철균이 외쳤다.

- 휘리릭!

그와 동시에 명군에서도 화살이 날아왔다.

궁기병의 사거리는 생각보다 짧다. 이렇게 서로를 향해 돌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고받는 화살이리라.

"끄악!"

"흐으윽??!"

그러나 명군 기병의 숫자가 조선 측보다 훨씬 많음에도, 정작 날아간 궁시의 수는 조선군이 훨씬 많았다.

궁기병의 비율과 역량 차이 때문이다.

"으아악!"

화살에 눈을 맞고 낙마한 명군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런 전장에서 그런 낙오자 하나까지 신경쓸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채 고개를 돌려 쓰러진 아군을 쳐다보기도 전에 적과 격돌한다.

"나는 대명(大明)의??!"

"나는 조선국 훈련도감의 안익신이다!"

안익신이 큰 칼로 상대의 허리를 베어나갔다.

총탄과 궁시의 유린 뒤에 벌어진 백병전이다.

방금 전까지 활이나 권총, 둘 중 어느쪽을 꺼냈든 간에 지금 손에 쥔 것은 날카롭거나 둔탁한 병장기.

그 선봉에 선 박철균은 눈을 크게 치켜뜨며 외쳤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 퍽!

서로가 바람처럼 달려온 탓에, 어마어마하게 가해진 운동에너지가 명군의 두부(頭部)를 쪼갰다.

수박처럼 머리통이 퍽석 깨져 뒤로 자빠진 적을 무시하고, 박철균은 연거푸 편곤을 휘둘렀다.

"돌격하라! 여기에 돈좌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야 포위당해 사냥될 뿐.

우직하게 적을 뚫고 나가야만 활로가 트인다.

박철균은 채 돌아볼 틈도 없이 소리쳤다.

"다들 따라오고 있는가?"

"예!"

수만의 인간과 수만의 짐승이 얽혀 절규하는 아비규환이다.

말이 죽어나자빠지거나, 그 주인이 창칼에 목숨을 거두거나.

어느쪽이 되었든, 다른 한 쪽도 살아나갈 수 없다.

마(馬)와 병(兵)은 전장에서 운명공동체나 마찬가지.

박철균은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고 피를 뒤집어쓴 채로 달렸다.

피와 쇠의 비린내가, 땀과 오줌의 역한 냄새가 사방에 자욱하더니, 어느틈에 그 쿰쿰한 공기가 사라졌다. 시원한 바람에 코가 훅 뚫린다.

창칼과 인마에 가려있던 시야가 넓게 트였다.

적군을 돌파한 것이다.

그제야 뒤돌아보니, 조선군 기병들이 따라붙으며 명군을 잘근잘근 분쇄하는 광경이 보였다.

- 후.

박철균은 잔심(殘心)하며 숨을 훅 내쉬었다.

이제 다시, 저 지옥도로 들어가야 한다.

다행인 것은 두번째는 더 쉬울 것이라는 것.

박철균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반전하라! 적을 분쇄한다!"

"예!"

박철균은 돌아서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명군 기병의 어깨를 편곤으로 내리쳤다.

- 뿌직

관절이 탈골되는, 아니 뼈 그 자체가 내려앉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내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에 묻혀 버렸다.

어느새 따라붙은 소소쿠가 외쳤다.

"이제 반쯤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저 한인(漢人) 만노들을 모조리 패퇴시키고 노예로 부리자!"

흔히 여진족을 유목민이라 생각하나, 실상은 반농반목에 가깝다.

그들 대신 농사를 짓고 많은 식량을 바칠 노예가 필요했기에, 이자원의 소집에 순순히 응한 것이다.

소소쿠의 외침에 여진 기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명군에게 뛰쳐들었다.

그 야만스런 함성에 명군 기병들은 지레 겁에 질려 하나둘 패주하기 시작했다.

"히, 히익!"

"놈들이 등 뒤에서 온다!"

"무슨 조선군이 저리 흉포하단 말이냐!"

척 보기에도 조선인은 아니었지만 저 멀리 남쪽에서 온 기병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착각을 바로잡을 틈도 없이, 그는 창날에 꿰여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정체를 보다 명확히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다르한 조리그투는 혀를 차며 외쳤다.

"조선군의 역량이 이정도일줄이야!"

저 말 위에서 쏘는 총은 예외로 하더라도, 백병전 실력도 팔기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으나 명군 기병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저 많은 만주 기병이라니.

"조선 놈들이 어떻게 저놈들을 동원했단 말이냐?"

조선이 요동을 얻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청의 잔당들과 싸우면 싸웠지, 그들을 끌어올줄은 몰랐거늘. 대대적으로 옛 팔기와 동해여진 기병들이 참전한 것을 보자 눈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르한 조리그투는 그렇게 황망해져있는 조변교를 잡아 끌었다.

"총병, 이미 저들은 포위망을 뚫어냈소. 오히려 몰리는 것은 우리쪽이니, 서둘러 퇴각해야 하오!"

"이게 무슨??."

조변교가 침음성을 흘렸지만 이미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명군은 점차점차 붕괴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조변교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병력을 수습하라! 퇴각한다!"

===

초전은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이날의 싸움에서 총병 조변교가 이끄는 명군 기병을 대파한 조선군은, 그 뒤로 몇 차례쯤 명군과 교전을 더 벌여 그들을 몰아냈다.

"역시 우리 조선군은 천하제일이오이다!"

마병별장 황익이 기분좋은 말투로 외쳤다.

오랜 싸움에 지쳐있던 장졸들이었으나 역시 명군을 꺾고 나자 다시 흥이 오른듯 보였다.

다만 유림은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헌데 도대체 의주부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지난 세월 동안 서북군을 함께 재건하고 훈련시킨 이가 임경업이었다.

오래 알고 지냈고, 또 그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노인 마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근신을 명했더니 도망친 이유는 무엇이며,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자원의 시선이 잠시 유림에게 와닿았다가, 다시 지도를 향했다.

그는 이 흥겨운 분위기에서도 여느때처럼 무표정했다.

"다음은 어디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는가?"

질문을 받은 오삼계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송산에서 남쪽으로 60리쯤 내려가면 필가산(筆架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십중팔구 그곳에 군량을 쌓아두었을 것입니다. 내친김에 그곳을 취하시지요."

오삼계는 아버지 오양을 따라 요서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자연 이쪽의 사정에도 밝을 수밖에 없었다.

오삼계는 알고 있는 사실을 죄다 털어놓았다.

아버지를 끌어들이는데 실패했으니 이런 공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허면 그대가 가도군을 거느리고 가서 필가산을 취하라."

이자원이 말했다.

"필가산을 떨어트리고 나면, 홍승주의 발에도 불이 붙겠지. 그때가 되면??."

명군을 한번에 섬멸할 수 있으리라.

그는 처음부터 이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 송산 전투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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