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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2화 (152/213)

< 내부의 적 >

명나라의 요서 방어선은 금주(錦州)-송산(松山)-행산(杏山)-탑산(塔山)으로 이어지는 네 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 뒤로 영원성이 있지만 이 네 성이 실질적으로 산해관의 외성 역할을 하니, 이 성들이 넘어가면 그야말로 산해관 하나만으로 동쪽의 침입을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하고, 또 견고한 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맨 동쪽에 있는 금주성이다.

때문에 홍승주와 조대수는 금주의 수복을 실질적인 목표로 잡았다.

"요동을 되찾고, 나아가 압록강을 넘어 황친을 조선왕으로 삼는 것은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오."

"소관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숭정제는 옛날 영락제가 안남을 정벌했을 때의 일을 본받고자 했다.

구 왕조의 진(陳) 씨를 쫓아내고 새로 왕조를 연 호씨가 명나라 사절단을 살해하자, 영락제는 군대를 보내 베트남을 점령하고 포정사사(布政使司)를 설치, 직접 통치했다.

그 예를 따라 원래는 조선을 직할하려 했으나 실상 명나라의 사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황친을 조선왕으로 내세우겠다 선언한 것이다.

듣기로 황제의 사촌동생 복왕 주유숭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던가.

하지만 홍승주는 그것이 망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요동을 점령해보았자 지금으로선 지킬 수도 없고, 조선과 계속 전쟁을 벌일수도 없소. 금주를 회복하여 요서만 재차 단단히 굳히는 것이 상수요."

금주를 탈환한 뒤 버티기만 하면 황제가 펄펄 뛸지도 모르지만, 홍승주로서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황상께서 노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조대수 또한 그 점을 지적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것이 옳소."

조선이 정말 칙사를 죽인 점 없고, 결백하다면 조선군을 깨뜨리고 금주에 입성하는 것만으로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협상하러 나설 것이다.

그럼 황제도 지금의 망상을 그만두고 좀 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군이 적의 세배에 달하니 그정도는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대수의 말에 홍승주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끌고 있는 병력은 명 최후의 야전군.

이기더라도 뒷일을 생각한다면 피해는 적어야만 했다.

"송산이 보인다!"

누군가의 외침에 홍승주는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이윽고 조선군 역시 금주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양군의 거리는 수십리도 되지 않았다.

===

"역시 금주는 든든한 요새올시다. 이곳을 손에 넣지 않았다면 싸움이 훨씬 힘들어졌겠사오이다."

명나라의 방어 역량은 금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원래 역사의 청군조차 1년이나 포위하고 나서야 겨우 취할 수 있었던 곳이었으니, 고작 세치 혀로 이 금주를 명에게서 '인수'해버린 조선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

'설마 도원수께서는 이것까지 생각하고?'

박철균은 고개를 저었다.

이자원이 제아무리 담이 큰 인간이라 한들 그때부터 명과 싸울 생각을 했겠는가.

"아이고, 도원수 대감!"

부총병 심기원은 도성에 있을 때보다, 그리고 가도에 있을 때보다 더 비대해진 모습이었다.

금주는 요서의 최전방으로 몽골과 길이 가까워 녹용과 사향, 초피 등의 교역이 흥성했다. 심기원은 역시 여기서도 물자를 사고 팔며 돈놀이에 열중했던 것이 뻔했다.

그 뚱뚱한 남자가 이자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자 그는 조용히 그 손을 쳐냈다.

"도원수 대감께서 오시니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소이다!"

청을 점령할 때도 금주군은 동원하지 않았기에 싸울 일이 없었던 심기원이다.

그러다 이제 명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저절로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던 터인데, 이자원이 5만 대군을 몰아오자 드디어 안심한 것이다.

"이제 내가 왔으니 걱정은 거두도록 하라."

이자원의 5만 대군은 잠시 금주에 머물렀다.

금주는 요서의 대읍(大邑)이며, 또 청을 막기 위해 수년 먹을 양식을 비축하고 있었다.

상당수는 조대수가 대동을 수복하러 가며 빼갔지만.

'남은 군량미도 빼돌리진 않은 것 같군.'

금주의 상황을 점고한 이자원이 생각했다.

제아무리 심기원이라 할지라도 군량미를 팔아먹을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지휘권을 나에게 넘기고 그대는 가도로 돌아가 전선들을 정비하라."

이자원이 명령했다.

이 먼 곳까지 나와 금주를 지킨지도 수년. 심기원의 정치력은 제법 빛을 발했다.

요서의 금주군과 가도군 사이를 중재하며 몽골과의 밀무역으로 돈을 벌어 뿌렸다.

청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더라도, 금주가 그 이상으로 흔들렸다면 분명히 이곳을 침공했으리라.

그러나 이미 심기원의 소임은 다했다. 명과의 전쟁을 결의한 마당에 그가 굳이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심기원은 이자원의 명령에 오히려 반색했다..

비록 도성으로 돌아가는 것만은 못하지만, 가도도 후방이 아닌가.

그는 희희낙락하며 인사를 올린 뒤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대의 아비에게서는 답서가 없는가?"

이자원이 묻자 오삼계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님께서도 장군의 대의에 공감하고 계시나, 혈육의 정리(情理) 탓에 쉬이 투탁해오지 못하시는 듯 합니다. 좌도독께서 바로 소관의 외숙이며 아버님의 처남이 아니십니까."

눈치껏 조대수 핑계를 대는 오삼계였다.

"홍승주, 조대수······."

원숭환이 죽은 후에도 명장은 남아있었다.

지금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오는 홍승주와 조대수도 그들 중 하나였다.

허나 끝내 명에 충절을 지켜 죽지는 못하였으니, 어찌 보면 지금도 방법은 생길 것 같았다.

"기왕 군대를 끌고 요서로 나아왔으니 송산, 탑산, 행산까지는 취하여야겠다."

이곳에 쌓인 성들은 심기원의 관할이 아니었다.

병력들이 적어 취하자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겠으나, 그보다 먼저 홍승주의 명군이 도달했다.

이자원이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초관 하나가 뛰어들어와 말했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사라졌사오이다."

===

원문필은 북벌에 협력한 후, 가도군 유격(遊擊) 직을 제수받았다.

증오해마지않는 명나라의 관직이었지만, 실상 명군이라기보다는 조선군이나 다름없었으니 거부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러다 명에 맞선 요동의 '의군' - 실상 녹영이 조선군 밑에서 부활한 것일 뿐이지만 - 한 부대를 맡아 따라왔다.

이만하면 아직 소년에 불과한 그로서는 상당히 빠른 출세라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요즘 들어 제법 위엄이 붙었던 터.

금주성이 크다 하나 건물의 방 하나를 통째로 쓰는 것도 그 덕이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돌아온 곳에는 선객 하나가 들어와있었다.

"??무슨 일이오?"

원문필은 적비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귀신 같은 사람이다.

조선에서 발을 디뎠을 때부터 악연을 맺은데다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까지 받고 있으니, 자연 그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잠시 그런 원문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적비가 입을 열었다.

"너는 빨리 이곳을 떠나라."

"그게 무슨 말이오?"

나름 태어난 조국이었던 청을 멸망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요하를 건넜다.

그 대가로 제법 출세를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조선군을 떠나라니.

"애초에 북벌에 협력하라고 설득한 것은 당신이 아니오? 이제 와 나를 팽하려는 것이오?"

"도원수는 너를 이용하려는 것 뿐이다."

"당신은 장군의 측근이 아니오?"

원문필이 보기에는 그랬다.

적비는 그간 이자원의 명을 받들어 움직였다.

하지만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꺼내자 원문필은 황당해져 되물었다.

"나는 금의위다. 명나라에 도움이 되기에 그를 도왔을 뿐이다."

적비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하지만 도원수는 이제 명과 맞서려 하고 있다. 나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적비는 이자원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가 명에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숭정제의 의심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런 기대를 배신하고 폭주했다.

적비는 확신했다.

칙사를 죽인 것은 이자원이다.

처음부터 그에게 명을 위한다는 마음 따위는 한 조각도 없었으니까.

자신에게서 캐낸 낙양성의 약점을 이용해 그를 실각시켜 버리고, 명의 침공을 유도했다.

이제야 그림이 명확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도원수를 막을 것이다."

"하."

원문필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당신만큼 장군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가 적어도 당금 천하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는 명장이란 사실은 아오. 당신이 그를 막을 수 있겠소?"

"등을 찌를 수 있는 비수는 하나 갖고 있다."

적비의 말에 원문필이 물었다.

"내가 이를 장군에게 고한다면?"

그를 고변해 잡아넣는 것이 자신의 앞길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원문필은 칼을 집어들어 적비를 겨누었다.

그러자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아마 내가 일을 결행하면 너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떠나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약점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렇다."

적비의 말에 원문필의 눈이 흔들렸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것은."

적비는 망설였다.

동생에게 진실을 말해주어도 될까.

'이제 와서.'

적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으리라.

"??네 아버님과 관계 있는 사람이라고만 해두마."

적비는 단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원문필은 눈을 좁혔다.

"어찌 할테냐."

적비가 대답을 재촉하자 원문필은 허, 하고 공기를 토했다.

그는 겨누었던 칼을 갈무리해서 넣었다.

"두번이나 나라를 배신하면 내가 갈 데가 어디에 있겠소? 게다가 명나라는 아버님의 원수요. 아버님의 연자(緣者)라 하니 고변은 하지 않겠소만, 내가 떠날 이유는 없는 것 같소."

적비는 잠시 원문필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하냐."

그는 뒤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그럼 부디, 보중하거라."

그 말을 남긴 뒤 적비는 훌쩍 창문 위로 올라서더니, 유려하게 몸을 뺐다.

원문필은 나가버린 그를 보며 침묵했다.

임경업과 함께 적비가 사라진 것은 그날 밤이었다.

===

"도원수 대감."

박철균이 이자원에게 달려왔다.

"임경업에 이어 적비 역시 사라졌사오이다."

"아마 그자가 빼냈겠지."

숭정제는 증오하나,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진짜다.

명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무언가 손을 쓰려 드는 것이겠지.

적비를 감시하는 인원도 붙여두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진작 없애버렸어야 했는가.'

명나라의 동태를 접하기엔 적비만한 정보원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유용하게 이용했으나, 원문필이라는 인질이 있는데도 몸을 도망칠줄은 몰랐다.

문제는 적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것.

"박철균."

"예, 도원수 대감."

이자원이 부르자 박철균이 즉각 대답했다.

"적비에게 박승길의 조사를 맡긴 적이 있었다."

그가 깊게 파헤치기 전에 그 명을 거두고, 대신 박철균을 보내 폐주를 처리했지만.

아마 적비는 그때 이상함을 느꼈으리라.

만약 적비가 자신이 모르는 루트로 비밀을 알아냈다면.

"소관이 찾아내 죽이겠사오이다."

박철균이 말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싸움이 임박했다."

박철균은 정초군을 지휘해야 했다.

사람을 풀어 적비와 임경업을 찾게 한 이자원은 저 멀리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조금 더 뛸 시간이 필요했다.

"금주에서 충분히 쉬었다. 송산으로 움직인다."

이자원이 말했다.

< 내부의 적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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