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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50화 (150/213)

< 각자의 준비 >

숭정제의 명을 받아 물러나온 홍승주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한창 반란을 토벌하다 올라왔더니, 답도 나오지 않는 황명이 떨어졌다.

보아하니 좌도독 조대수 또한 마찬가지 눈치였다.

"금주가 조선군 손 안에 있으니 영원도 안전하지 않기는 합니다. 어디까지나 정말 조선이 반역했을 때의 일이겠으나······."

"칙사가 죽은 것은 정말 사고일수도 있거늘."

홍승주와 조대수는 그 부분에 대해선 의견이 일치했다.

청은 망했다.

조선은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전 국경 지대를 손바닥처럼 관리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얼마든지 제3의 세력이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숭정제는 편집증적으로 조선의 소행이라 확신했다.

"조선을 징벌하기는 해야겠지. 허나 지금은 아니오."

홍승주라고 해서 조선이 청을 꺾고 요동을 삼킨 것에 대해 아무런 섬뜩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지금 조선과 맞부딪히는 것은 피해야 했다.

청군을 파죽지세로 공파한 조선군을 어떻게 뚫고 나아간단 말인가.

"차라리 수성전이라면 상황이 나으련만."

지금은 요동을 수복할 수도 없고, 설사 수복했다 치더라도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징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홍무제 주원장조차 조선과 일본만은 침공하지 말라고 유시하였거늘, 이미 꺾일대로 꺾인 명나라가 어떻게 조선을 징치한단 말인가.

'황제께선 황친 하나를 조선왕으로 세워 그 땅을 다스리겠다 하시지만,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는가.'

확실히 명의 사정은 원래 역사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대의 적이었던 청나라도 사라졌고, 그간 반란 진압에 군병을 돌릴 수 있었던 덕에 이자성마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채 죽었다.

그나마 일본과의 교역이 끊긴 나비효과로 인하여 정지룡이 난을 일으켰지만, 정지룡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수적.

복건의 해안가에서나 돌아다닐뿐, 딱히 내륙으로 손을 뻗으려는 의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승주는 확신이 없었다.

조대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상서 대인, 이미 떨어진 황명입니다. 받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이 맞소."

최측근인 낙양성마저 숭정제를 만류하다 동창에 끌려갔다.

제아무리 홍승주나 조대수라 한들 황제의 뜻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군량은 남아있소?"

"······영원까지 행군하는 동안 먹을 군량만 거둬들이면 될 것입니다."

그나마 최전선인 영원과 금주에는 수년 먹을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금주는 조선군 수중에 들어가있으니 제외하더라도, 영원의 군량을 헐면 10만 대군을 먹일 정도는 나오리라.

하지만 남부 전역에 흩어져있는 진압군을 거둬들여, 요서에 도착할 때까지는 백성들에게서 채량(寨糧)할 수밖에 없다.

"또 얼마나 많은 도적들이 다시 튀어나올지."

홍승주가 혀를 찼다.

그렇게 양식을 빼앗긴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반란군에 합류하리라.

어느쪽이든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때 마침 생각났다는 듯 홍승주가 조대수에게 물었다.

"그대의 조카가 지금 조선군에 억류되어 있지 않소?"

가도군은 조선군의 지휘하에 있었고, 오삼계는 그 가도군의 장수다.

아직까지 소식은 없지만 조선군이 반역한 것이 사실일 경우 최소 구금, 어쩌면 이미 시체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자 조대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수로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마 삼계도 당당하게 처신하였을 것입니다. 외숙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원수를 갚아주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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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황성(皇城)에서는 충용한 번국인 조선을 모략하고, 칙사를 지키지 못한 죄로 가도군을 전부 처벌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오삼계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나 이는 간신과 난적들이 황상의 총기를 흐리고, 눈과 귀를 막아 벌어진 일. 천자의 충용한 신하로서 어찌 순순히 적도들의 농간에 넘어갈쏘냐! 나 부총병 오삼계는 총병 대인의 충심을 믿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 하는데 너희들은 어찌하겠느냐?"

오삼계의 앞에 도열한 가도군이 술렁였다.

그들의 인적 구성은 대부분 한인이었지만, 지난 수년간 조선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고, 조선군과 동고동락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조선군의 강력함은 수없이 보았다.

당장 칼 끝을 돌려 조선과 싸우라 해도 머뭇거릴 지경이거늘, 아예 자신들까지 벌하려든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자신들을 이끄는 부총병이 저리 말하니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부총병 대인의 말씀이 옳나이다!"

"대인을 따르겠습니다!"

병사들이 엎드려 그렇게 외치자 오삼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군영 한쪽에 버티고 선 박철균에게로 가있었다.

오삼계는 남 몰래 식은땀을 훔쳐냈다.

'역시나 지금 와서 명군(明軍)이 되어보세, 해봤자 답이 없었겠구나.'

이자원은 조선의 지원으로 재건된 가도군을 조선의 소유로 여겼다.

아마 그때 즉각 머리를 박지 않았으면 칙사와 함께 목없는 귀신이 되었으리라.

'빌어먹을.'

오삼계는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일이 어떻게 이리 된 것일까.

분명 청을 멸망시키고 공신이 되어 대명에서 승승장구하는 일만 남았거늘, 멱살이 틀어잡혀 반란군으로 전락해버리다니.

명나라의 충신으로 죽느니 차라리 살아남는 쪽을 택한 오삼계였지만 마음은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잘한 일이다, 잘한 일이야······.'

오삼계는 애써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위했다.

명이 군사를 일으켜서 징치하기 위해 쳐들어온다 한들,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역으로 천명이 뒤집어질 수도 있는 일.

그리되면 지금의 명나라에서는 오를 수 없는, 더 높은 자리에 갈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오삼계의 눈이 번득였다.

"명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아마 아버님도 종군하실 것이다."

영원 총병에 제법 인정받는 장수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필묵을 대령하라."

제 숙소로 돌아온 오삼계는 그리 명령했다.

잠시 뒤 오삼계는 떨리는 손으로 한자한자 서찰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왕 배신을 마음먹었으니 확실히 공을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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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이 벌인 광범위한 여론전은 비단 가도군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솔태를 포함한 '요양의 여섯 선비'는 요동을 돌아다니며 떠들어댔다.

"듣자하니 경사(京師) 내의 의론이 요동 사람을 죄 죽여 화근을 없애겠다 한다는데, 소위 평요군(平遼軍)이라는 이름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칙사가 불행한 사고를 당했음을 핑계삼아 요동 사람들을 모조리 도살하겠다는 뜻이니 황제의 성정이 바로 이러하다!"

홍승주와 조대수가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소식은 요동에 채 전해지지도 않았지만, 숭정제가 조만간 토벌군을 보낼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

때문에 이자원은 먼저 선수를 쳐서 이런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명백한 선동이었지만 그 명망 높은 이솔태 일가가 나서서 이런 이야기를 퍼뜨리니 민심은 급격히 반명(反明) 기조로 돌아섰다.

"각지에서 유사시 군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의병이 조직되고 있다는데 이를 뜯어말려야 하지 않겠사오이까?"

"놔두어라. 변경에 마적떼가 들끓으니 자경을 위해서라도 그정도는 갖춰야하지 않겠는가?"

이자원이 이끄는 조선 군정은 이 사실을 알고도 치안을 위한다는 핑계로 묵인했다.

아니, 오히려 그 뒤로는 조선군이 나서서 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실상 말이 의병이지 사실상 청이 관리하던 녹영병을 해체해서 조선군의 보조 부대로 재조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항복한 이솔태나 상지신, 경계무 등이 그대로 그 자리에 앉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만하면 삼남군이 빠진 자리는 확실히 대신할 수 있겠군."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나름 화기는 충실히 갖추었던 삼남군에 비해 조금 부족하였으나, 그마저도 청 전역에서 남김없이 거둬들이니 어느 정도 숫자는 맞춰졌다.

"영고탑에도 파발을 띄워라."

닝구타는 동만주 전역에 조선의 영향력을 끼치는 거점으로서, 조선 관리들이 상주하며 직할 통치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팔도'에 속하는 지역은 아니었으나, 이자원이 나라의 군권을 온통 틀어쥐고 있는 판이니 마적떼를 때려잡기 위해 동해여진의 병력을 소집하라는 명 정도는 충분히 받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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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팔참 지역에 정착해있던 키리시탄들에게도 비슷한 공작이 자행되었다.

"명나라가 요동을 병탄하면, 옛날 막부와 같이 신앙을 탄압할 것이라더라!"

이 소문에 키리시탄들의 여론은 몹시 들끓었다.

실상 명나라 조정은 북경에서 예수회의 포교를 허용하는 등, 딱히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지만 평생을 규슈에 살다가 변방 동팔참에 넘어온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한번 퍼지기 시작한 거짓 정보는 걷잡을 수 없었다.

"중국의 교인들은 이미 아기까지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고, 배교하여 스스로 성상을 모욕한 자만 살아남았다더라."

"관에서는 교인을 죽여다가 공자를 위한 제물로 바친다더라."

그들에게 조금의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면 대부분 쉽게 소문을 믿고 쉽게 휩쓸리는 백성들.

그 얼마 안되는 식자층마저 명에 대한 정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던데다, 그간 봐온 막부의 탄압과 청나라의 침입이 혼재되어 악소문은 더욱 부풀려졌다.

이미 신앙을 탄압한다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역만리까지 건너온 키리시탄들이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로 칼을 집어 나섰다.

"다시 고향을 잃을 수는 없소!"

키리시탄의 대표격인 아마쿠사 시로가 외쳤다.

그에게는 성스러운 사명이 있었다.

쇼군이자 성자인 이자원을 설득해서, 규슈로 십자군을 이끌고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 말이다.

그러나 저 이교도 황제의 공격에 조선이 무너지고, 이곳에 세운 교인들의 터전이 박살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간악한 적그리스도가 이 동방의 예루살렘을 무너뜨리려 들고 있소. 그리되면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 터. 싸울 수 없는 노인과 어린아이를 빼놓고는 모두 칼을 쥐시오! 더는 누구도 성스러운 이 땅을 침범할 수가 없소!"

시로의 말에 키리시탄들은 호응해, 카타나와 장창을 높이 쳐들었다.

요동 전역이 명나라에 대한 적의로 달아오르는 사이, 조선 조정은 연이어 들어오는 소식에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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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은 처음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한 것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신기하고 영험히 여기는 반응이 주류였다.

"고구려가 비록 천명을 거슬러 망했다고는 하나, 호태왕의 무용은 삼한 으뜸이었으니 청을 물리칠 때도 천복을 내려주었음이 틀림없사옵니다. 도원수가 비에 제사 지냈다 하니 전하께오서도 평양부에 향축(香祝)을 내리시어 제사를 행하라 명하소서."

조선은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조상이라 하여 그 시조의 사당을 평양과 광주(廣州), 경주에 세웠다.

평양에는 단군묘가 있어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을 모두 모시고 있었으니 이런 의견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좀 더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비의 교지를 받은 이자원은 교통이 불편하고 아직 정세가 불안하여 순차적으로 철군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삼남군은 진작 철군하고 있었고, 도성에 앉은 대비와 신하들이야 사정을 잘 모르니 그러려니 하고 있던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칙사가, 죽었단 말이냐?"

대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자원과 임경업의 장계에는 청나라의 잔병, 혹은 달단이 벌인 짓으로 적혀있었으나 명의 입장은 달랐다.

"예, 마마. 천조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탓이라 하며, 그간의 철군 논의도 모두 천자를 속이기 위한 수작이라 꾸짖었나이다."

"무슨 말도 안되는······!"

대비가 뒷목을 부여잡았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두통이 몰려왔다.

"빨리 경사에 사람을 보내 해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비가 신하들을 보며 외쳤다.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리 꼬일 수 있단 말인가.

이제야 겨우 파란이 잦아드는가 하였거늘.

"신이 자전께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그때 우승지 송시열이 나섰다.

< 각자의 준비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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