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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49화 (149/213)

< 피습 >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인근에서 피살되며 여몽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일설에는 동하의 포선만노가 저지른 짓이라고 하나, 몽골은 고려가 저지른 짓이라 판단해 침공을 결정했다.

명이라고 다르진 않으리라.

오히려 그 의심암귀에 사로잡힌 숭정제라면 단숨에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내부 사정이 어떻든 간에, 조선을 징치하지 않고는 명이라는 나라는 존속할 수 없을테니까.

칙사가 심양에 머무르며 무언가 트집거리가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동안, 이자원은 북쪽으로 한 장의 편지를 보냈다.

===

"호태왕의 비를 발견해서 제사를 지내? 노추를 멋대로 사면하고 그 일족을 건주공에 봉하겠다 운운했단 말인가? 총병은 제정신이 아니로군!"

원래라면 좀 더 느긋하게 머무르며 조선의 철군을 압박하려 했던 칙사지만, 심양에서 주워들은 소문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칙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빨리 황상께 이를 고해야 한다. 조선은 숫제 요동을 집어삼키려는 속셈이 아닌가 말이야!"

아직 청 멸망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았다면서 호위병을 더 붙여주겠다는 조선군의 만류도 거절하고, 칙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빠져나왔다.

"서둘러라!"

명백히 수상한 정황에 칙사는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찼다.

칙사 일행은 흙먼지를 마구 일으키며 금주 일대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것을 언덕 위에서 지켜보는 한 무리의 군대가 있었다.

제대로 쉬고 먹지 못해 지칠대로 지쳐, 도적떼에 가까운 무리였지만 아직까지 눈빛은 살아있었다.

당연하다.

그들은 본래 청의 정예 팔기, 그 중에서도 상삼기(上三旗) 소속의 전사들이었으니 말이다.

"늦지 않게 따라잡았군."

오보이는 극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는 잠시 옆에 선 소닌을 보고 물었다.

"이자원을 믿을 수 있겠소?"

"우리에겐 그 외의 길은 없지 않소."

오보이와 달리 소닌은 초연했다.

달관한 표정이라 해야할까, 애초에 더 물러설 곳도 없지 않은가.

"대청이 이미 멸망하고, 조선이 요동을 병탄하다니."

그들이 묵던 조정에 재차 귀부하기 위해 조양 쯤으로 군대를 몰아왔을 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심양이 함락당했고 청이 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지만 오보이는 납득했다.

이자원이라면 그럴만했다.

만주 제일의 용사라 불리던 그와도 호각으로 겨루고, 지략으론 도르곤과 견주던 상대가 아니던가.

어찌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던 오보이와 소닌에게 이자원이 제안 하나를 전해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자, 그럼 움직여봅시다."

오보이가 말 배를 찼다.

이왕 결정된 일, 더 고민해보아야 소용도 없다.

- 히히힝!

몽골마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달려나갔다.

오보이를 따라 수많은 만주 용사들이 칙사를 향해 쏟아져내려갔다.

"저, 저놈들은 뭐냐?"

칙사가 놀라 외쳤지만 호위병들이라고 딱히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다, 달단이나 여진 오랑캐의 잔병인 것 같습니다!"

"그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국경 일대의 치안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저정도 규모의 군대가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조선군이 호위를 붙여주겠다고 할 때 순순히 따랐어야 했다 후회한 칙사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칙사는 수레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와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인간의 발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말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는 법.

금방 추격해온 팔기의 칼날이 칙사의 등을 죽 그어 내려가고, 이어서 오보이가 쏜 화살이 그 목을 꿰뚫었다.

"커헉!"

칙사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 이것이 도대체······.'

칙사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1642년의 초입.

명나라 칙사 일행은 금주 일원에서 피습당해 전멸했다.

범인은 불명이었다.

===

"칙사께서 변을 당하셨다고!"

임경업은 한사코 호위를 뿌리치고 떠난 칙사가 걱정되었다. 비록 금주에 심기원의 가도군이 주둔해있다고는 하나, 사방을 관리하기는 힘들터이니 말이다.

해서 뒤늦게 병력을 이끌고 따라갔지만 그는 간신히 칙사의 시신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흔적을 보니 달단이나 여진 놈들이 틀림없사오이다. 하오나 이리되면 천조에서 어찌 나올지······."

임경업은 핏기가 빠져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의 죄를 어찌 갚는단 말이오이까. 잘되어도 칙사를 지키지 못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요, 자칫 대국이 오해라도 한다면 큰 재앙이 될 것이온데."

"호위를 거절한 것은 칙사이고, 사절단을 습격한 것은 오랑캐요. 우리가 이토록 떳떳한데 죄를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소?"

이자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국이 오해를 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오이까!"

"진정 황상께서 현명하시다면 이 사고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 조선에게 죄 물으시지는 않을 것이오."

이자원이 날카롭게 임경업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은 채로, 간신의 참언만 믿고 번방을 징벌하겠다며 쳐들어온다면."

그는 좌중의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단 한마디라도 놓치지 말라는 듯이.

"군사를 일으켜 맞서싸울 뿐이오."

그 말에 임경업이 반발하여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황제의 신하인데 어찌!"

"청북방어사, 우리는 조선의 신하이외다!"

김충선이 임경업을 보며 외쳤다.

조선왕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이니 조선의 신하들 또한 명 황제의 신하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명나라의 황제여야만 한다.

모화주의자인 임경업의 사고방식은 이러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조선 장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죽을 고생을 넘겨가며 청을 멸망시킨 그들이다.

황제가 조선군을 치하하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의심해 다 죽으라고 군사를 보내면 맞서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의 시선을 읽은 임경업은 별안간 칼을 뽑아들었다.

- 스릉!

칼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임경업이 칼을 뽑는 그 순간, 그의 목에 박철균과 오삼계의 칼이 와닿은 것이다.

"······부총병도 도원수의 사람이었을줄은 몰랐구려."

아무리 그래도 원래 명나라 장수였던 오삼계는 자신의 편을 들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임경업은 황당했지만 오삼계는 그의 눈을 슬쩍 피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이자원에게 위해를 가하려 칼을 뽑은 것은 아니었다.

"도원수!"

임경업이 거꾸로 칼을 내밀며 외쳤다.

"진정 대국과 싸우려거든 이 칼로 나를 베시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도원수를 베겠소!"

"······."

이자원은 천천히 다가가 임경업의 환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어디론가 던져버렸다.

"아직 황제께서 결론을 내리시지도 않았소. 그때 가서 그대의 처분을 결정해도 늦지 않은 일."

이자원은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북방어사에게서 북병의 지휘권을 거둔다. 상황이 바뀔 때까지 근신토록 하라."

===

칙사가 죽었다는 소식은 바람같이 날아 북경에 도착했다.

"조선이 감히 짐이 보낸 칙사를 죽였다. 조선이 칙사를 죽였어!"

숭정제가 서안을 탕 내리쳤다.

"폐하, 태감 노유령은 무사히 돌아왔사온데······."

"그게 아니라, 요동에 갔던 칙사가 죽었단 말이니라!"

숭정제는 화를 내다가 숨이 막혀 가슴을 탕탕쳤다.

시립한 내관들이 급히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숭정제는 모두 내친 뒤 금의위도지휘사 낙양성을 보고 소리쳤다.

"금의위는 조선이 반역을 도모할 때까지 무엇을 했는가!"

"폐하, 아직까지 조선이 저지른 짓이라고는······."

"당연히 조선이 벌인 일이다."

이미 이자원이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굴하여 제사를 지냈다거나, 조선과 여진이 본래 한 조상이라는 소리를 지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한 명의 조야는 단 한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것이 아닌가?'

수(隋)·당(唐) 제일의 대적 고구려.

그 임금의 비를 발굴한 것은, 제1번국인 조선이 천하질서에서 이탈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저 멀리서 들고 일어난 떨거지 농민 도적떼보다 훨씬 크나큰 위협이 아닌가.

"요동을 병탄하려 들고, 칙사를 죽이다니. 결코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된다. 홍승주와 조대수는 들어와있는가?"

장군들을 불러모으려는 숭정제를 낙양성이 급히 말렸다.

"폐하. 신이 듣기로 이미 조선은 폐하의 치하와 구휼을 위한 양식만을 원할 뿐, 요동에는 털끝만한 욕심이 없다고 하옵니다. 우선 사람을 보내어 칙사의 호위를 소홀히 함을 꾸짖고, 진상을 조사해 보아야지 한껏 예기가 오른 조선군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적비의 보고에는 조선군의 강함에 대해 낱낱이 적혀있었다.

그 보고를 받아보는 것이 바로 낙양성이었으니, 제 코가 석자인 명군을 보내겠다는 것은 미친 소리로만 들렸다.

그러나 숭정제는 도리어 낙양성을 찌릿 노려보았다.

"근자에 동창을 통하여 투서 한장이 들어왔다."

숭정제의 말에 낙양성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대가 금의위의 권세를 뽐내어 수십만 냥을 인정으로 거둬들였다는 투서지."

은 10만 냥이 없어 진제를 하지 못하고 있는 명나라다.

군비도 없고, 기근을 구제할 돈도 없는데 북경의 신료들은 제 배 불리기만 바빴다.

낙양성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 탐욕스러운 네놈이니, 조선이 먹인 잠화 때문에 오랑캐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냐!"

물론 예전 칙사로 조선에 갔을 때 융숭한 '선물'을 챙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로부터의 관례가 아니었던가.

그런 것 가지고 사람을 의심한다면 끝도 없을 것이나, 이미 숭정제는 의심병이 극에 달한 상태.

"폐, 폐하! 신이 감히 그럴리가!"

"그럼 애초에 이자원에게 붙였다는 간자는 어째서 역심을 미리미리 고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숭정제의 호령에 낙양성은 어깨를 움츠렸다.

적비도 그렇고 낙양성도 그렇고, 조선이 차마 반역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숭정제는 가차없이 명령했다.

"애초에 조선에게 금주를 넘겨준 것부터가 수상했다! 도지휘사 낙양성을 파직할 터이니 동창은 저자를 엄밀히 심문하라!"

심기원의 가도군에게 금주를 맡긴 것은 대동 공략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숭정제도 동의했던 사안이다.

하지만 숭정제는 머리 끝까지 뻗은 배신감에 낙양성을 하옥하라 명했다.

그 말에 낙양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시대의 심문이란 사람을 반쯤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금의위가 아니라 숭정제 즉위 이후 세가 많이 위축된 동창이라니.

낙양성의 집안은 오래도록 금의위에 봉직하여 영향력이 강했으니, 차라리 그곳의 심문을 받는다면 아무리 황명을 내려도 형식적으로 이뤄질 공산이 크다.

그러나 동창의 불알없는 환관들은 그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을 것이었다.

"폐, 폐하!"

"저자를 끌고 가라!"

숭정제의 명에 낙양성은 양팔이 붙잡혀 끌려나갔다.

그를 내쫓아낸 숭정제는 이윽고 신하 하나를 불러들였다.

조복은 입었으되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장군다웠다. 관복보다는 갑주가 어울릴 듯한 모습이다.

병부상서에 하남·산서·섬서·호광·사천의 5성(省) 군무총독을 겸하고 있는 홍승주였다.

"반란은 거의가 진압되어 가고 있다지?"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오나 기근이 잦아들지 않고 있어 산발적인 반란은 계속······."

홍승주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숭정제가 외쳤다.

"가장 큰 근심이 장헌충 아니었던가! 그놈이 파촉에 처박혔으면 나머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천명을 노리는 저 오랑캐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숭정제의 외침에 홍승주는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영원총병 오양, 좌도독 조대수와 함께 금주를 공파하고 조선을 징벌하라! 이는 황명이니라!"

조선의 간악한 화전양면전술에 당했다.

조선 조정은 간쓸개라도 내어줄 것처럼 굴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이제 칙사를 보내느니, 칙서를 내리느니 하며 시간을 잡아먹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10만 대군으로 요동을 회복하고 조선을 징벌하라!"

숭정제의 결단이 떨어졌다.

< 피습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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