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이몽 (2) >
명과 갈등이 생기면 군사적 위협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조선 재정은 상당 부분을 명에서 일어나는 중계무역에 의존하고 있다.
명에서 사온 생사로 비단을 직조하여 일본과 남만에 팔고, 거기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익으로 쌀을 사오고 군비를 충당한다.
그러나 가도를 통한 무역이 끊어지면 당장 교역품 중 상당수가 비어버린다.
김육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어 북벌을 추진할 때, 혼자서 민생을 돌봐야한다고 주장하던 김육이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해나가던 명재상이 직접 국고까지 들먹이니 신경진을 비롯한 무신들이라 할지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김육의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칙사를 대접하는 것도 너무 과하옵니다. 이미 천사(天使)에게 은 1천 냥과 인삼 3백 근을 주었고, 경비로 삼결포(三結布)와 여정포(餘丁布), 백저포(白苧布) 수천 필이 나갔사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오랑캐를 멸하면서 어려워진 사정을 아뢰어 도움을 받는 것이 지당할진데, 어찌 이보다 더 대접을 할 수 있겠나이까."
대비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어린 왕의 정통성을 높이 세우기 위해서라도 칙사를 대접하는 것은 필요했으니까.
"무릇 황제는 천하를 돌보아야 하고, 조선의 백성도 천자의 백성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이만 방물을 줄이고 슬슬 칙사도 돌려보내는 것이 가할 것이옵니다. 그러자면 도원수가 우선 회군을 해야겠지요."
칙사가 머물러있는 것은 명목상 북벌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함이다. 실질적으로는 조선이 요동에 딴 마음을 품고 있는게 아닌가 감시하려는 목적이 컸지만.
그러니 김육은 이만 확실히 회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칙사를 빨리 돌려보내자고 한 것이다.
"이번에 천조를 대신하여 청을 징벌한 것은 자못 통쾌한 일인데다, 천자는 사해를 자식처럼 다스려야 하옵니다. 승전을 고하는 사신을 보내어 임진년과 병자년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과 같이, 다시 은자를 조금 보태어 달라 청하는 것이 옳겠사옵니다.
"그 말이 맞소."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도 도원수 이자원에게 전하시오. 북방의 경비는 좋으나, 이만 철군을 하라고."
그 명을 받은 것은 승지 송시열이었다.
그의 붓이 빠르게 종이 위를 움직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했다.
'요동을 돌려준다라······.'
1년여 머무르면서 본 네덜란드는 강국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장차 그 나라는 몰락하리라.
허면 어찌해야할까.
송시열의 눈이 잠시 번득였다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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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샨의 저택은 웅장했다.
홍타이지 시절 사실상 2인자의 지위를 누린 그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러나 다이샨은 그 정취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있었다.
핑계댄 것처럼 정말 중풍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그가 죽는 것은 족히 수년은 지난 뒤의 일.
어디까지나 호거와 도르곤의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보신을 위해 칩거했을 뿐,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이샨은 청이 멸망하고 나자 급격하게 늙어버린 듯했다.
다이샨은 기운없는 목소리로 이자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조선국 도원수께서 어찌 귀한 걸음을 하셨는가?"
"조선에까지 이름이 전해진 귀하가 중병에 걸렸다기에 문안차 왔소만, 멀쩡해보이는구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전쟁이 어그러진 것은 눈 앞의 남자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한이 죽었음에도 도리어 조선 침공의 사죄문을 보내고 철군하는 굴욕을 감수해야했고, 그마저도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욱일승천하던 청의 기세가 꺾인 것은 이 남자 때문이었고, 끝내 멸망했다.
"결국은 이리 되었군. 이래서 홍타이지에게 조선을 굳이 건드리지 말자고 하였거늘."
다이샨은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태종황제로 높여 불러야 하지만, 이미 나라가 망한 마당이니 딱히 의미없는 짓이었다.
"새로운 기회를 줄수도 있소."
이자원이 말했다.
그 말에 다이샨이 되물었다.
"새로운 기회?"
"몽골로 가는 것이지."
심양 회전에서 멋대로 퇴각한 상지신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 저항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조양이었다.
도르곤은 조양에 '대칸' 에제이의 동생인 아부나이를 놔두고 심양으로 달려왔는데, 상지신은 그 사실을 깨닫자 바로 그의 신병을 확보해 이자원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다.
몽골을 쥘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생긴 셈이었다.
"청군을 심문해보니 오이라트가 호거를 격파했다더군. 이대로 저들이 몽골을 전부 집어삼키면 조선에 있어서도 좋을 것은 없소."
이자원이 말했다.
4오이라트 연합, 후일의 준가르 제국이 몽골을 흡수하면 북방의 위협은 청에서 준가르로 바뀔 뿐이다.
지금 몽골에 저항 세력이 남아있고, 내세울만한 구심점이 있을 때 방파제를 세워야했다.
다이샨은 그나마 청 조정에서 조선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으니 실로 제격 아닌가.
"남은 자손들을 데리고 몽골로 떠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겠소. 이만하면 구미가 당길텐데."
다이샨의 여러 아들들 중 요토는 조선에서, 쇼토는 유배지에서, 사할리연은 그 이전에 죽었다. 다른 아들과 손자들은 아직 살아있다.
이자원은 그들의 목숨을 보장하여 줄테니 다이샨에게 몽골로 떠나기를 권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이샨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를 따라, 동생을 따라 꾸었던 꿈은 이미 무너졌소. 사내가 인생을 한번 걸었으면 되었지, 두번이나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을 것이오."
"종친들의 처분이 어떻게 내려질지 모르는데도?"
"이미 삼전도(三田渡)에서 그 굴욕적인 맹약을 체결한 이래로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소. 자손들이야, 그놈들 알아서 하라지."
다이샨은 말을 마친 뒤 돌아누웠다.
더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싫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을 물색해보아야겠군.'
다이샨은 청 황실의 가장 웃어른이었으니, 협조하고 나섰다면 이야기가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할만한 패는 오래전부터 손에 쥐고 있었다.
다이샨의 저택을 나서는 이자원에게 박철균이 따라붙었다.
"도원수 대감."
"무슨 일이냐?"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박철균에게 이자원이 물었다.
박철균은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북경에서 칙사가 왔사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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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머무르는 태감 노유령이 북벌군의 승전 소식을 받아든 것과 비슷한 시각.
청이 망했다는 소식은 역시나 북경으로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숭정제는 무릎을 치며 이자원에게 칙사를 보냈다.
"조선이 천조를 대신해 오랑캐를 정벌했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다. 조선이 이처럼 번리의 소임을 다하기에 황제들께서 누대에 걸쳐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짐도 남은 환란이 모두 평정되면 많은 재물과 양식을 내려 후사할터이니 너희는 삼가 조서를 받들어 천병에게 요동을 맡기고 이만 철군하도록 하라."
이자원을 비롯한 조선군 장수들은 엎드려 칙서를 받들었다.
칙사는 거만하게 이를 읽어내려갔지만, 이윽고 이자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당황했다.
"천병이 요동을 지키러 나오신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자원의 말에 칙사는 헛기침을 했다.
"그것은 군사에 관계된 일인지라 나는 잘 모르오. 하지만 대국인지라 황상께서 명만 내리시면 수십만 군대가 다시 요동에 나아올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장수들은 그 대답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본래 이 시대 동양에서는 호왈이라 하여 아군의 규모를 과장하는 것이 상식이라지만, 너무 말도 안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 웃음소리에 칙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장수들이 그만한 천병이 올 수 있을까 염려스러워 그러는 것이니 해량해주십시오."
"감히 대국을 의심하는 것이오?"
칙사가 말한 수십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숭정제는 요동에 병력을 주둔시킬 생각이 있기는 했다.
분명히 명나라에도 정예군이 남아있기는 했으니 말이다.
"역괴 장헌충이 한때 마구 날뛰어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는데 이르렀지만, 끝내 관군을 당하지 못하고 파촉의 산골로 도망쳐들어갔소. 정지룡은 한낱 수적떼일뿐이니, 그들의 목적은 왜와 한갓 시시한 물건을 주고 받는데 있을뿐 커다란 위협이 아니올시다."
칙사가 큰소리를 쳤다.
확실히 이 시기 명나라 반란의 불길은 상당히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자성은 죽었고, 요동 방면군마저 반란 진압에 투입되며 장헌충은 사천으로 대피한 것이 아닌가.
그쪽으로도 관군의 방어선이 존재했지만 장헌충은 사천순무 소첩춘과 양사창의 갈등을 이용해 방어선을 돌파, 입촉해 현재는 한창 그 안에서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장헌충과 나여재 등은 조정의 근심이었으나 이제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소. 곧 조 총독을 돌려보내어 요동을 지킬 터이니, 총병은 걱정하지 마시오."
칙사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더하여, 황상께서는 이제 동강진을 우리 대명이 관리하겠다 명하시었소. 총병은 인수를 부총병 오삼계에게 넘기고 이만 철군하시오. 총병이 황명을 따르지 않은 대죄는 추후에 추궁할 것이오. 에잉, 그러게 왜······."
칙사가 염소수염을 꼬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자원을 위하는 척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오랑캐를 멸한 공이 있으니 죄를 상당히 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더는 성심을 거스르지 마시오."
"명을 받잡겠소이다."
이자원은 쓰게 웃으며 칙사를 안내했다.
청나라 황궁의 저장고를 털어서 나온 무수한 양식으로 융숭하게 잔칫상을 차려놓은 터였다.
심양의 궁궐에 차려진 연회에 칙사의 얼굴이 펴졌다.
홀린듯 빨려들어가는 칙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오삼계에게 이자원이 물었다.
"총병의 대임을 맡게 되어 좋은가?"
"아, 아니 그럴리가 있겠소이까."
오삼계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도군은 조선의 지원과 자신의 훈련 아래 상당한 정예군으로 거듭나있었다.
상관인 이자원이 아무리 공을 많이 세웠어도 가도 총병이라는 직함이 떼지는 순간 소국의 번장으로 전락하는 반면, 자신은 요동에서 옛날 이성량 같은 위세를 누릴수도 있는 것이다.
오삼계는 이자원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황명에 따르실······ 생각이시지요?"
"따르지 않는다면 역적이 되겠지."
오삼계는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자원이 불복하고 나서면 지금 상황에선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려사를 조금 아는가?"
"소관의 배움이 미천하여······."
오삼계가 변명했지만 이상할 것도 없다.
중원 역사만 하더라도 양이 방대하니, 그것을 배우기도 바쁜데 언제 고려의 사서 따위를 뒤적거려보았겠는가.
그가 아무리 가도에서 수년을 있었다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원이 왜 고려와 전쟁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군."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오삼계는 그 정확한 뜻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인 불안함을 느꼈다.
"초, 총병 대인!"
오삼계가 이자원의 앞에 부복했다.
왠지 그래야할 것만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총병,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지."
이자원이 말했다.
"좋은 판단을 기대하겠다."
< 동상이몽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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