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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47화 (147/213)

< 동상이몽 (1) >

효명옹주(孝明翁主)는 인조의 유일한 딸이다.

지금 시점에선 봉작을 받지 못해 군호는 없지만, 본래는 총희(寵姬)가 낳은 고명딸로서 인조의 귀애를 한몸에 받았을 아이였다.

그러나 이미 뒤틀려버린 역사 속에서 그녀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 인조가 죽었고 병자호란 이후 계속 난세가 이어졌으니, 오빠인 고종도 그녀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유복녀를 낳자 그 어미에게 숙원(淑媛) 첩지나 던져주었을 뿐.

아마 어머니인 소용 조씨가 야심에 불타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그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 살았을 것이다.

"손수 내 옷을 빨고 회임했을 때에도 지극정성으로 음식을 챙기니 어찌 내가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나."

선왕의 후궁이라 하나 무수리나 할 법한 허드렛일까지 자청하며 딱 부러지는 성격인 대비로서도 조씨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각기 부자(父子)의 여인이라지만 나이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았으니 친해지는 것도 쉬웠고.

조씨를 궁중에 천거한 정백창의 아들 정선흥을 관직에 나아가게 해주거나, 소용으로 품계를 올린 것도 나름 그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것 뿐만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이토록 현숙하고 미더운 사람이니 옹주도 마찬가지겠지. 네 아들에게 있어서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리라."

언니의 말에도 유주는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보고 소용 조씨가 입술을 떨며 입을 열었다.

"천한 어미의 몸에서 났으나 옹주는 인조대왕의 여식입니다. 혹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러신거라면······."

소용 조씨는 소매에 눈물을 찍어발랐다.

유주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말을 잇지 못했을 뿐입니다."

대비는 유주의 눈치를 읽었다.

그녀는 옆에 다소곳이 앉은 조씨에게 말했다.

"소용은 잠시 나가있으시오."

"예, 마마."

소용 조씨는 힐끗 유주의 얼굴을 훑더니 군말없이 자리를 떴다.

대비는 천천히 말했다.

"실상 우리 왕실의 일은 집안일이 곧 나랏일이니, 어느 하나 가벼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다는 말씀은······."

"이는 선대왕의 유지이니라."

일전 강석기와도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다.

임금은 어리고, 친정의 세도는 그에 반해 너무 강력했다.

그리고 북벌 과정에서 나라의 군권을 모두 틀어쥔 이자원.

"고종대왕께서는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염려하셨다."

이자원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려는 마음을 품든, 혹은 그것을 염려한 다른 이들의 역공으로 몰락하든.

어느쪽이든 고종이 생전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북벌이 끝나면 그저 그가 명망 높고 존경받는 위치로 편히 물러나앉기를 바랐을 뿐.

"그래서, 신의 아들을 부마로 삼으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부마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 국상 기간 동안 원상을 맡았던 동양위 신익성도 원상이 끝나자 그저 야인으로 물러나 조용히 제 집에서 지내고 있다.

이 경우 이자원의 세도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 말기의 세도가처럼 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한 수였다.

이것이 모두가 행복한 길이 아니겠는가.

비록 관직에는 오를 수 없다지만 왕실과 통혼하는 것 자체가 집안에 있어 크나큰 영광이요, 평생 부족함없이 살 수 있는 기회이니.

"원래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결정하려 했지만, 사세가 급박하게 되었다."

대비는 재차 강하게 이야기했다.

"북벌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데다 그 과정에서 천조의 의심까지 사게 되었느니라. 도원수를 위해서라도 빨리 왕실과 가례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대감께 여쭈어보겠사옵니다."

유주는 대비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리 대답했다.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

소용 조씨는 방 밖을 나서자마자 눈을 날카롭게 좁혔다.

'어쩐지 반응이 뜨뜻미지근한데.'

조씨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녀에겐 새로운 끈이 필요했다.

대비의 신뢰는 샀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

'딸이 아니라 아들을 낳았다면. 인조대왕께서 조금만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인조는 자신을 총애했다.

인열왕후도 죽은지 오래였으니, 아마 조금만 더 애간장을 녹였다면 내명부는 자신의 차지가 되었을 터.

하지만 모든 것은 물건너갔다.

그녀가 이제 바랄 수 있는건 딸을 권신의 집안에 시집보내, 어디에도 꿀리지 않는 위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뿐이었다.

명문대가라 하기엔 손색이 있었으나, 이자원 본인은 이 나라 제일의 권신.

그와 사돈을 맺는다면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하지 못하리라.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조씨는 표독스럽게 눈을 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

최근 조선에는 아예 칙사로 온 사례감 태감 노유령(盧惟寧)이 상주하며 북벌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칙사의 접대는 보통 고관이나 왕족이 맡는다.

지금도 영의정 최명길과 호조판서 김육이 나와 술을 따랐다.

"국가가 불행하여 수재와 한재 등이 잇따르고, 외방에는 전란 중인지라 대접이 변변찮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최명길의 말처럼 전시중이니 평소보다는 연회의 크기가 작긴 했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척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것을, 노유령은 노기가 감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연회만 보아도 천조에 바치는 정성이 모자란 것이 눈에 띄오. 거기다, 황제께서 이자원에게 입조를 명하셨는데 어찌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오? 그리고 역적 원숭환의 아들을 숨겨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무엇이오? 속시원히 무엇 하나 대답해주지 않으니 "

"이자원이 이미 청을 멸망시키고 노추의 항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도원수의 결백은 증명된 셈이 아닙니까? 또 원숭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는 본래 호노(胡奴)로, 국법대로 처벌해야 하나 오랑캐의 길을 잘 아는 까닭에 북벌군이 데리고 있습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부디 칙사께서는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최명길은 칙사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달랬다.

김육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은 상국과 우리 모두의 대적이었사오이다. 모든 공적은 조선의 백성에게 돌아가야 하거늘, 어찌하여 명의 칙사가 되려 거드름을 피우고 우리를 핍박한단 말입니까?"

"지금 황제는 의심이 많고 자애롭지 못하네. 그러니 사방이 적으로 보이는게지만, 어찌하겠는가. 어떻게든 이쪽으로 날아드는 화살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명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누르면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이를 먹을만큼 먹고 영상까지 오른 자신이 노유령을 달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요동 문제를 논의하자고 나오지 않겠사오이까."

노유령은 청이 드디어 망했다는 말에 서둘러 모화관으로 돌아갔다.

아마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을 쓰러갔으리라.

김육은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조선은 북벌을 완수하느라 너무 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

피폐해진 강토를 회복하자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과연 명은 그런 조선을 도와줄 수 있을까.

===

다음날 도성에 도착한 이자원의 장계는 김육의 근심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이 장계의 내용을 놓고 신하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도원수 이자원이 장계를 올려 요동의 방비가 튼튼치 못하고, 오랑캐의 잔당이 날뛰는지라 함부로 군사를 물리는 것은 화가 될 것이라며 좀 더 주둔할 것을 간하였사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도 요동을 비우면 기껏 꺾은 오랑캐의 세가 다시 일어날 것이 자못 염려되옵니다. 모쪼록 가납하여 주소서."

좌의정 신경진의 말에 신하들이 웅성거렸다.

"칙사가 밝히기를 이미 대국의 사정은 나아지고 있으니, 마땅히 천병으로 하여금 주둔하게 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또 가도군도 그만 가져가겠다 하니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이자원과 조선이 잠시 관리를 맡고 있었지만, 원래 가도군은 명나라 소속이다.

어쩌다보니 그 재건과 유지 비용까지 조선이 떠안았는데, 이미 전쟁까지 끝났으니 가도군을 더이상 맡아둘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군비라는 측면에서는 혹 하나를 떼버리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신하들이었다.

"말로는 북방의 안정을 위해 주둔코자 한다 하나 굳이 공연한 의심을 받아가며 헛되이 전비를 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옵니까? 이미 전란이 끝난 마당이니 무신들이 제 존재를 과시하고자 올린 청일 뿐이옵니다."

"혹 저자에 '북벌이 끝나면 대국이 영토로 보답할 것이다'라는 말이 떠도는데, 심히 믿기 어렵고 가치없는 말입니다. 도원수가 요동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 이런 참언을 믿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사옵니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려를 표했다.

신경진을 비롯한 몇몇 무신들만이 이자원을 나름 변호하려 나설 때, 누군가가 말했다.

"국가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근본이 있습니다. 우리 왕조가 왕업을 일으킨 것도 근본이 있사오니, 고려 말에 난신(亂臣)의 모략을 듣고서 명조의 홍무(洪武) 정삭(正朔)을 폐하고 북원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병기를 들어 반란하여 위화도에 진군하였으니, 당시의 생민의 화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의를 들어 회군하여 크게 동방(東方) 사민의 소망을 위로하였으므로 마침내 억만년 무강한 왕업을 열었으니 저 고려가 망령되게 군사를 일으킨 것은 마침 우리를 위해 백성을 몰아준 것입니다.

이로부터 대대로 그 공을 지키어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서는 상국(上國)의 협공책을 받들어 마침내 일부의 군사를 일으켜 이만주(李滿住)를 주멸하였는데, 그때에도 북방 땅은 털끝만큼도 우리에게 득될 것없으므로 굳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본래 상국의 열토인 요동이겠습니까!"

형조참판 나만갑의 말이었다.

그는 청서 일파로, 정온과 이식 등의 계열에 속한 이였다.

원래가 무신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고 이자원과도 파벌이 갈려있으니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참판의 말이 맞사옵니다."

그러나 뜻밖의 사람이 거기에 찬동하고 나섰다.

"생민은 굶주려 가고 있는데 구태여 요동을 탐내 화란을 더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저 요동땅에 군대를 머무르게 할 비용으로 헐벗은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는 편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바로 호조판서 김육이었다.

"옛날 탕 임금은 고작 70리를 다스렸지만 인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뭇 사람들이 그를 믿었사옵니다. 지금 조선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요동이 아니라 항산(恒産)이옵니다."

김육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전화가 끝이 났는데 그 먼 곳에 군대를 머무르게 할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죽어가는 기민들에게 요동이 무슨 의미가 있사옵니까? 이미 민력의 소모가 극심한데 인조대왕의 원수를 갚았으면 그만이지, 남의 땅을 탐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옵니까?"

요동을 얻는 그 순간 조선은 끊임없이 전란에 시달릴 것이다.

그는 군사를 잘 모르지만, 조선군이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명이 조선을 가만히 놔두겠는가.

김육은 두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북벌 소식이 퍼질때마다 열광했고, 북벌이 성공하면 마치 나라가 넓어지고 저절로 부강해지는 것처럼 떠들었다.

조정 중신들은 다행히 그런 바람에 휩쓸리지는 않았지만······.

'이자원, 그 사내는 어떨지.'

그의 안중(眼中)에는 과연 백성들이, 이 나라가 담겨있을까.

"대비 마마."

김육이 굳게 말했다.

"어서 도원수에게 명을 내려 철군케 하소서."

< 동상이몽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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