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청종언 (1) >
핏물이 땅바닥을 적셨다.
수없이 쌓인 시체가 요야를 가득 메웠다.
"피로 혼하가 물들고 시체로 물길이 막히었구나."
이자원이 전장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승패는 명확하게 갈렸다.
"대승, 대승이오이다, 도원수 대감!"
청군은 분명 용감했다. 뒤에는 혼하, 앞에는 조선군을 두고 한치의 물러섬없이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청군 최후의 돌격은 끝내 저지되었다.
"피해가 생각보다 크외다."
임경업의 말이 맞았다.
팔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그들에게 조선군은 마지막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싸움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청, 아니 만주족의 군사적 역량은 이 시점에서 사실상 소멸했다.
조선이 만주를 먹더라도 조직적 저항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대감! 청 구왕(九王)을 잡아왔사오이다!"
군막 밖에서 떠들썩하게 누군가가 외쳤다.
이자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려오라."
피투성이가 되어 사로잡혀온 도르곤은 이자원의 앞에 털썩 꿇어앉혀졌다.
어찌나 거세게 저항했던지 양 옆에서 군관 둘이 억눌러야 할 정도였다.
"누가 사로잡았는가?"
"소관 휘하의 살수대오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팔기들은 총탄 세례를 뚫고 조선군을 강하게 몰아쳤다.
그러나 실로 중과부적이었다.
기세 좋게 돌격했던 팔기군이었으나 어느새 밀려나 혼하를 등지고 싸워야 했던 것이다.
도르곤은 빗발치는 총탄과 창칼 사이에서 측근들과 함께 사로잡혔다.
이자원은 생각보다 젊은 초관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귀관의 이름은 뭔가?"
"예, 대감! 소관은 훈국 초관 신류라 하오이다!"
"신류라."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지만 그 자와 눈 앞의 이 초관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후히 포상하도록 하겠다."
이자원이 눈짓하자 신류는 군례를 올린 뒤 물러났다.
이자원의 옆으로 오삼계, 이완, 임경업, 김준룡 등이 늘어선 가운데 도르곤만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자원."
도르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네 손에 놀아났구나."
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물자로 인해 흔들리는 민심, 범문정을 위시로 한 정적의 존재, 연거푸 패배를 겪어 사기가 바닥을 치는 청군.
그것이 자신을 성급한 싸움으로 내몰았다.
"그러게 경고하지 않았나."
이자원이 답했다.
"천하가 너희의 목을 노릴 것이라고."
봄보고르와 기야하찬을 필두로 반란이 일어나고 몽골에서도 불온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강력한 카리스마 부재로 인한 청 내부의 분열은 내전까지 불러왔다.
거기서부터 굴러온 스노우볼이 청의 목을 죄었고, 나아가 도르곤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 결국은 마지막까지 네 말대로 되었군."
도르곤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오삼계가 도르곤에게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이놈! 감히 장군께 반항하는 것이냐?"
"나는 대청의 친왕으로서 한을 제외하면 따를 자가 없는 지고한 위치이다. 어찌 만이(蠻夷)의 장군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겠느냐."
조선이 청을 오랑캐라 멸시하는 것과 같이, 청 또한 명이나 조선을 오랑캐로 칭했다.
도르곤은 마지막까지 천하를 노렸던 자답게 지금 사로잡혀 와서도 그런 인식을 당당히 드러내보였다.
이자원은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지만 이미 결정된 처분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살려두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자다.'
원래 역사에서 순치제를 대신하여 중원을 정복한 도르곤이다.
실상 세조(世祖)라는 묘호는 그에게 돌아갔어야 할 터.
"이자원."
"왜 그러는가."
"네 경고의 보답으로 나도 충고 한마디를 건네주도록 하마."
도르곤의 말에 이자원이 눈썹을 꿈틀했다.
"저 의심많은 황제와 어린 조선 임금이 너를 가만 놔둘 것 같은가? 나를 꺾은 자라면 마땅히 천하를 노려야 할 터. 그렇지 않는다면 지금의 나처럼 목이 떨어질 것이다."
이자원이 입술을 비틀었다.
마지막까지 수를 쓰는 도르곤이다. 이자원의 본의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자리에서 도르곤이 직접 말한 것은 이자원의 정치적 입지를 좁게 할 뿐이다.
"대감, 저런 자의 헛소리를 더 들을 필요가 없사오이다!"
"그렇습니다. 어서 끌고 가서 목을 치시지요!"
이자원은 손을 저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천지검을 끌렀다.
"내가 직접 베겠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잘 관리된 명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도르곤."
이자원이 나지막이 말했다.
"충고 고맙군."
다음 순간 천지검이 휘둘러지며 도르곤의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원래 역사에서 천하를 향해 날아올랐을 영웅은, 원래 역사와는 달리 꺾여버린 날개 탓에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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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끌려온 자는 도르곤의 측근이었던 수크사하였다.
그는 박철균이 이끄는 정초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사로잡혔다.
"총상을 입었군."
치료를 받은 뒤 이자원 앞에 대령된 수크사하가 답했다.
"오로지 창검으로만 승부를 겨루었다면 내가 이겼소."
결정적인 순간 박철균은 품 속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수크사하는 팔을 당했고, 대장이 쓰러지자 몰아치는 정초군에 의해 청군은 패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단호했다.
"이곳은 전장이지, 너희가 기예를 겨루는 시합장이 아니다. 나는 휘하 장병에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라고 했으니,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겠지."
"······예친왕께선 어찌 되시었소?"
"죽었다."
굳이 자신이 참했다고 하진 않는 이자원이다.
수크사하는 그 말에 침통히 고개를 숙였다.
이자원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주인을 따라 절의를 지키고자 하면 들어주겠다."
대답없는 수크사하에게 이자원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하겠다면 그 또한 들어주리라. 무엇보다 너희 청의 임금은 구왕이 아니라 한이 아닌가?"
이자원의 꼬드김에 수크사하는 고개를 들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도르곤 사후,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순치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수크사하다.
도르곤이 살아있다면 모르되 불귀의 객이 된 지금 그는 맹렬히 갈등했다.
"이미 심양과 요양이 조선의 손에 들어왔다. 소위 흥경성이라 한들 얼마나 버티겠느냐? 진정한 충신이라면 주인의 안위부터 생각하여야 하니,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너희 황실의 맥은 끊지 않을 것이다."
이자원의 말에 수크사하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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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경.
다른 이름으론 허투알라(???????). 누르하치가 성을 쌓고 후금을 건국한 곳이다.
이곳에 도피해있던 강덕제 쇼서는 수크사하가 전해온 소식을 듣고 눈을 감았다.
"도르곤이 패사(敗死)했다······."
마침 흥경을 지키던 황족이자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 두두가 죽은지라 어두웠던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이젠 흥경도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동쪽의 라파로 가시는 것은 어떠하옵니까?"
"라파는 조선령과 가깝고 야인들의 도시가 아닙니까? 한께서는 끝까지 흥경을 지키셔야 합니다."
의견이 분분했으나 어린 쇼서가 보기에도 전부 대책은 되지 못했다.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제는 의견을 물어볼 도르곤마저 죽은 판이었다.
그때 가만히 엎드려있던 수크사하가 말했다.
"천신(賤臣)이 삼가 한께 아룁니다. 같은 만주인이라 하나 라파의 야인들은 본래 동해여진이라 하여 성질이 급하니 마땅히 의지할 바가 되지 못하옵니다. 오히려 치욕을 당할 수가 있사오니 그리로 가서는 아니됩니다."
수크사하는 도르곤의 부하였으나 이제 와선 의미없는 일.
쇼서는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허면 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싸워 사직을 위해 함께 죽고, 선제(先帝)를 만나는 것이 옳다는 말이오?"
쇼서의 물음에 수크사하가 고개를 저었다.
"신 또한 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사오나, 그리되면 시조(始祖, 아이신기오로 부쿠리 용숀)로부터 내려오는 천손의 씨가 끊기는 셈이옵니다. 게다가 저들이 이대로 황실의 능을 차지하면 반드시 욕을 보일 것이니, 마땅히 자비라도 청하기 위해선 항복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수크사하의 말에 다들 할말을 잊었다.
마음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모두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 조선은 대청의 원수이고, 대청 또한 조선의 원수인데 어찌 함부로 목숨을 내맡기겠소?
"이미 선장(鮮將) 이자원이 황실의 명맥을 보전하여 주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그는 조선 제일의 권신이자 조선군의 주장이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신하들은 말없이 쇼서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 시선을 모를리 없던 쇼서는 흥경 궁궐의 천장을 바라보며 외쳤다.
"······내 황위에 오른지 수년이 지났으나 스스로 결정해본 일이 없소. 오늘에 이르러 처음 내려본 결단이 바로 나라의 문을 닫는 일이라니!"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옥새를 가져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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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을 점령한 조선군은 곧 흥경으로 향했다.
그때 쇼서가 항복 의사를 타진해오므로 그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니, 곧 조선과 청 모두에게 뜻깊은 장소, 사르후(薩爾滸)였다.
강덕제 쇼서는 스스로 몸을 결박하고 조선군 진영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변발한 신하들이 머리를 떨군채 그 뒤를 따랐다.
"결박을 풀어주어라."
이자원의 명에 시립해있던 허응선과 이사룡이 나서서 쇼서의 결박을 풀었다.
이자원은 엎드린 쇼서를 보고 말했다.
"너희 여진은 천조에 반역하여 스스로 청이라는 참람된 국호를 일컫고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부모 같은 나라인 조선을 침공해 임금을 시해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가 하늘에 닿은 바 오늘 드디어 환란을 평정하게 되었노라.
그러나 우리 조선은 예의의 나라인지라 남의 자손을 끊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명맥은 지켜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
"죄인은 오직 장군께서 약속하신 바만 믿을 뿐입니다."
태조로부터 3대째 내려오는 유업을 폐하고 항복했으니 잘봐달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이자원이 답했다.
"이미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를 믿으라."
장수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특히 오삼계의 놀람이 심했다. 오로지 뒤쪽에 선 이암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태연했다.
이자원은 쇼서에게 군영 안으로 안내케 하고, 뒤이은 신하들에게도 인사를 받았다.
이윽고 상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그 앞에 서자, 이자원이 말했다.
"그대가 노이합적의 장증손(長曾孫)이라 들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얼마 전 죽은 누르하치의 장손 두두의 아들 두르후(杜?祜)였다.
할아버지인 추옝이 반역 혐의로 죽은 터라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생전 견제도 심하게 받았고, 실질적인 장손 대우는 없었지만 그 덕에 이자원의 주목을 받았다.
"본래 집안은 장자가 잇는 것이 순리이다. 내 약속을 지켜야하니 조만간 그대를 건주공(建州公)으로 천거하리라."
"하, 한이 아니라 소인을 말입니까?"
두르후가 당황하여 말했다.
옆에 늘어선 만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석새는 죄인이니 따로이 조령을 받아 처결할 것이다."
이자원은 청 황실의 명맥을 보전해주겠다고 했을 뿐, 쇼서를 통해 잇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병자년의 원수 홍타이지의 아들이었으니 처음부터 논외였다.
게다가 한번 청의 황제를 지냈으니 그를 옹립하려는 불순분자들이 모여들 공산이 컸다.
반면 나름 황족 대접은 받았으되 권력 핵심으로부터는 소외되어있던 추옝 계통은 달랐다.
그렇기에 이자원은 두르후를 내세워 만주족을 통솔하려 드는 것이다.
"대감,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시면 아니되오이다. 청은 천조의 원수이기도 하온데······."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 간여하지 마시오."
이완이 무어라 하는 것을 이자원이 가로막았다.
그는 잠시 이암과 시선을 주고 받은 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 대청종언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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