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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43화 (143/213)

< 심양 회전 (4) >

도르곤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직 돌파는 멀었는가?"

"우군(右軍)의 절반 정도는 이미 붕괴되어 흩어졌으나, 적의 항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나이다."

도르곤이 보기에도 깨강정이 되어 흩어지는 조선군이 반이었다.

그러나 김준룡은 패주병을 단호히 물리치고서라도 계속 전열을 유지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시간만 끌면 이긴다는 뜻이겠지."

요야의 전세는 훤히 내려다보였다.

조선군은 녹영을 밀어내며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팔기를 박살내러 달려올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반면 청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녹영이 조선군 중군과 좌군을 막으며 버티는 사이, 팔기가 우군을 격파하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서로의 적이자 아군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대왕께오서, 직접 말이십니까?"

김준룡이 이끄는 삼남군이 버티고 있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버티고만 있을 뿐이다.

도르곤은 허리춤에서 안모도를 뽑아들었다.

"단 한번, 단 한번만 더 치면 결판이 날 것이다. 전원 공격하라!"

===

"윽!"

손수 북을 치던 김준룡이 팔기의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본 경상도 병마절도사 선세강(宣世綱)이 외쳤다.

"감사 영감!"

"괘, 괜찮소. 그보다 어서 나를 대신하여 북을 치시오! 조금이라도 수비가 느슨해져서는 아니되오!"

김준룡이 어깨를 감싸쥐고 말했다.

적의 기세는 점점 강맹해져가고 있었다.

패주병마저 잘라내며 전열을 유지하고, 계속 버티려 노력했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짓밟으려 오는 적을 완전히 격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수는 장전치 않고 무얼 하는가!"

선세강에게 북채를 넘긴 김준룡이 목책에 붙은 조총수들을 보며 외쳤다.

"화, 화약이 다 떨어졌사오이다!"

대답하는 포수의 손이 벌벌 떨렸다.

화약을 넉넉히 지급했다고 생각했건만, 연거푸 총탄을 쏘아대는 과정에서 전부 소모했던 것이다.

"미리미리 가져다 두지 않고 무얼했는가!"

김준룡의 호통에 군졸 몇이 달려가 포수들 옆에 종이포를 수북히 쌓아놓았다.

페이퍼 카트리지(Paper Cartridge)다.

종래에는 조총에 장전을 할 때 일일히 계량을 하여야 했으나, 지금은 미리 계량하여 총탄과 함께 종이포에 싸인 화약을 장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한 원리에 비해 장전 속도는 혁신적으로 올라갔으니, 비록 삼남의 속오군이라 할지라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포수들이 채 총을 쏘아댈 틈도 없이 팔기가 쇄도했다.

"사수!"

양측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팔기에서 서너명이 떨어지고, 다시 운없는 삼남군 몇이 쓰러졌다.

다음 순간, 팔기의 말발굽에 삼남군의 허약한 목책이 짓밟혔다.

- 탕! 탕!

뒤늦게 장전을 마친 포수들에게서 산발적인 조총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화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지라 효과는 미미했다.

"이런!"

김준룡이 다급히 소리쳤다.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삼남군이 무너지면 팔기는 곧장 기세를 타고 중앙군을 들이칠 것이고, 그리되면 이자원이 세운 전략도 붕괴한다.

그때 좌측 목책을 무너뜨리고 들어와 삼남군을 도륙하려던 팔기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 타타탕!

팔기의 뒤를 잡은 훈국 마병들의 피스톨이 재차 불을 뿜었다.

"지원군이 왔구나!"

김준룡이 환호했다.

도합 1만에 달하는 팔기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삼남군을 구하기엔 충분했다.

"살수들! 어서 전열을 정비하고 적을 몰아내라!"

훈국 마병들이 팔기와 육박전을 벌이는 사이 김준룡의 명에 따라 삼남군은 다시금 창을 쥐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김준룡이 중얼거렸다.

어깨의 고통은 까맣게 잊은지 오래였다.

이것으로 삼남군의 숨통을 끊으려던 도르곤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돌파는 실패했다.

===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너희는 원래 대명의 신민이 아니었던가! 오랑캐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

"목숨을 건지고 싶으면 싸움을 멈추어라!"

북병과 함께 진군하는 가도군이 입을 맞추어 항복을 권했다.

넓은 요동 벌판에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살려준다는 말, 그리고 같은 한인(漢人)으로서의 정체성을 권고하는 말에 녹영병들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렇게 만한(滿漢) 간의 갈등을 유도하는 전략은 조선군이, 정확히는 이자원이 매번 써먹던 방식이었지만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판세는 결정이 난 것 같습니다, 바투루."

불리한 전세에 머리를 감싸쥐는 준타(準塔)에게 녹영 총병 경계무(耿繼茂)가 말했다.

상지신의 생각 역시 같았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오?"

경계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 운을 띄웠다.

"치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몸을 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아버지는 개국 오대신의 한명인 퉁갸 후르한 공이시고, 그대들의 아비도 비록 항장이라 하나 대청을 위해 목숨을 바쳤소. 황은이 지극한데 어찌 전세가 불리하다 하여 나라를 배반하자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이오?"

경중명은 병자호란 때 갑사창에서, 상가희는 이번 북벌 때 연산관에서 죽었으니 두 사람이 청의 충신이란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비들이 청에 충성했다고 아들들의 생각이 같으리란 법은 또 없었다.

"바투루, 황실의 은혜는 다른 식으로 갚으면 됩니다. 지금 적이 녹영을 패퇴시켰는데 더 싸워보아야 무엇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주십시오."

준타는 완강했지만, 이미 청군의 상황은 금이 간 제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총병 경계무가 항복했습니다!"

준타 앞에서 물러난 경계무는 휘하 부하들을 거느리고 투항해버렸다.

경중명과 그 자손들은 본래 팔기 정람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호거가 상삼기를 거느리고 나간 뒤에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다.

경중명이 지니고 있던 회순왕(懷順王)의 작위도 세습치 못하고 녹영 총병 정도나 맡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실상 원래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것을 알기에 준타는 탄식할 뿐이었다.

"한인들의 충심이란 것이 덧없는 것인가, 아니면 대청이 그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인가!"

이영방의 아들인 이솔태 같은 자도 요양을 통째로 들어다 바쳤다.

그런데 조선군에게 처벌당하기는커녕 요양을 구했다 하여 칭송받고 있었으니, 경계무 뿐만 아니라 지금 녹영의 한인 장수들도 딴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되거늘!"

준타가 답답한 표정으로 외쳤다.

팔기가 삼남군을 쓸어버리고 조선군의 의표를 찌를 때까지만 적과 싸우는 것이 녹영의 임무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경계무가 녹영병 한 부대를 이끌고 항복하고, 더러는 도망치고 또 흩어지니 준타의 통제라한들 제대로 먹힐리가 없었다.

준타는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상지신(尙之信), 그대도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말은 이리 하지만, 상지신 또한 좋아서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원래 역사에서 번왕의 세습이 금지되자 오삼계, 그리고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과 손을 잡고 난을 일으켰던 자가 아니었던가.

경계무처럼 미리 몸을 빼지 못한 탓이었다.

"바투루, 이곳까지 조선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서둘러 후퇴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소리! 예친왕께서는 끝까지 적에 맞서 싸우라 하셨다!"

준타는 죽을 결심을 했다.

손수 창을 쥐고 말에 올라탄 그는 뒤돌아 도망치고 있는 녹영병들 사이로 달려나갔다.

녹영의 감시를 위해 배치되어 있던 만주족 몇도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한인들이야 청을 배반하고 줄을 갈아탈 수 있다지만, 준타와 만주족에게는 청을 제외한 조국이란 있을 수 없었다.

"와라, 조선과 명의 개들아!"

준타가 소리쳤다.

===

이자원은 날이 퍼렇게 선 천지검을 닦아냈다.

실상 워낙 명검인지라 손볼 건덕지도 그리 없었지만, 매일 잊지 않고 칼을 관리하는 이자원이다.

그에게 이완이 와서 전장 상황을 보고했다.

"경계무라는 자가 부대를 이끌고 항복했고, 녹영을 지휘하는 청장의 목을 베었습니다. 적장 상지신은 일군을 거느리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물러나?"

항복도 아니고 퇴각이라.

우선 이것은 도르곤의 명을 받은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그의 명은 녹영이 조선군 본대를 잡아두고 있는 것이었을테니까. 어디까지나 상지신의 독단적인 판단이리라.

과연 퇴각했다면 어디로 퇴각했을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자원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럼 녹영과의 싸움은 거진 정리가 된 셈이로군."

시간은 조선군에게 웃어주었다.

이제 도르곤은 실패의 대가를 치러야할 때였다.

===

"조선군이 온다!"

팔기군은 삼남군을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까지 와있었다.

그러나 녹영을 격파한 조선군의 좌군과 중군은 팔기를 반포위하듯이 나아왔고, 우군은 기사회생했다.

도르곤은 중얼거렸다.

"하."

끝이로군.

"대왕! 서둘러 군대를 거두어주십시오. 지금이라면 늦지 않습니다!"

"어디로 말인가?"

조선군은 명백히 한 곳만 틔워두고 팔기를 슬금슬금 밀어내고 있었다.

바로 벌판 북쪽의 혼하.

심양에서부터 조선군을 추격하기 위해 건너왔던 강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도하도 할 수 없다.

결국 이자원은 완전히 팔기라는 존재를 섬멸하려 들고 있는 것이다.

팔기라 해보았자 실상 정백기, 양백기, 정홍기, 양홍기의 4기에 불과했지만, 양람기는 반으로 쪼개져 조선 밑에 들어갔고 상삼기는 몽골 어드메서 궤멸됐을게 뻔하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왕께서라도 몸을 빼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의미없는 짓이다."

수크사하를 대신해 보좌중인 도이격의 말에 도르곤이 답했다.

"대청의 종언이로구나."

이곳에서 청의 병력은 사실상 소멸했다.

흥경 수비군이 있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도르곤이 대패하고 돌아가면, 아예 강덕제에게 붙어 그를 처단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 뒤엔 조선군이 덮칠 것이고.

그런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당당한 대청의 황족으로서 죽고 싶었다.

"태조께서 오늘의 일을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너라면 능히 중원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누르하치가 살아있을 적,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주던 말이 기억났다.

이복형 홍타이지도 그를 견제할지언정 중용했다.

그러니, 자신도 결국 그리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 퍼엉!

- 타타탕!

팔기군은 조선군이 쏘아대는 조총과 대포를 피해 혼하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허우적거리며 죽는 자도 부지기수. 그렇지 않더라도 날아드는 총탄과 화살, 포탄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 무슨 추한 꼴이란 말이냐!"

도르곤이 외쳤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팔기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소멸이 예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중원을 정복했어야할 청군의 끝이 이래서는 안된다.

최후만큼은 제국의 군대다워야 했다.

도르곤은 말고삐를 움켜잡았다.

"옛사람이 말하길, 여진 1만이 모이면 천하가 그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천천히 안모도를 뽑아들었다.

"이곳에 모인 만주 사내도 마침 1만이다! 그런데 고작 조선군 따위에게 겁먹고 죽음을 재촉하는가!"

도르곤의 외침에 무언가 감정이 끓어오른 도이격이 외쳤다.

"맞습니다!"

그 역시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멀뚱히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팔기들도, 도이격이 나서자 하나둘씩 병장기를 고쳐잡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기로 싸우겠나이다!"

"죽기로 싸우겠나이다!"

과연 팔기는 정예군다웠다.

어느새 쇄도하는 조선군에 대한 공포를 지워버리고, 창칼을 높이 쳐들었다.

도르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전군, 돌격하라!"

그 말과 동시에, 팔기는 포위해오고 있는 조선군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

청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다.

< 심양 회전 (4)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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