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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42화 (142/213)

< 심양 회전 (3) >

흑마 위에 올라탄 도르곤의 전포가 나부꼈다.

세게 불어오는 맞바람이다.

돌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바람이 바뀌기를 잠시 기다리고 있던 차, 눈에 들어온 녹영과 조선군의 전투는 도르곤이 혀를 차게 하기 충분했다.

"이렇게까지 상대가 안될줄이야."

분명 팔기를 따라 수없이 종군한 쿠툴러들이나, 혹은 명군 항병을 주축으로 세워진 녹영 모두 저 허약한 옛날의 조선군이나 명군에 비하면 두말할 나위없이 정예한 군대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군 중앙의 총창진(銃槍陣)을 뚫어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비록 팔기에 비해 차별받는다 하나 원앙진 따위의 훈련은 차질없이 시켰을 것인데도.

"단순히 정예함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당장 온정평 싸움만 보아도 적들은 팔기까지 막아내었으니 말입니다."

수크사하의 말에 도르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군은 천하 제일의 군대인-적어도 도르곤의 생각에는-팔기마저 막아내고, 틈을 놓치지 않고 역으로 몰아쳐 청군을 무너뜨렸다.

도르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녹영과 쿠툴러들을 저들 앞에 던져주었다.

"척 보기에도 적의 우측은 정예하지 않아보인다."

도르곤이 말했다.

"하오나 저리 우군(右軍)만 따로 떼어놓은 것은 몹시 수상하옵니다. 차라리 후방에 배치할 것이지······."

"이자원의 노림수일 것이다."

도르곤은 이를 갈았다.

이런 평야 지대에서는 기책과 묘책을 쓰기 힘든 까닭에, 순수한 힘대힘의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저렇게 먹음직스럽게 먹이를 눈 앞에 갖다대는 것은 청군에게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십중팔구 이자원의 계책이리라.

도르곤은 그것을 보고 명백한 도발의 뜻을 읽었다.

'팔기가 고작 조선의 일개 지방군조차 뚫지 못하리라 생각하는가?'

올테면 와봐라.

지금 청의 팔기는 이런 얕은 함정조차 뛰어넘지 못하리란 이자원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렇다면 그 오만, 내가 친히 바로잡아 주겠노라."

도르곤이 말고삐를 잡아챘다.

바람이 바뀌었다.

목표는 김준룡이 지휘하고 있는 삼남군이었다.

===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하삼도(下三道)를 가리켜 삼남(三南)이라 한다.

조선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농사가 잘되는 지역인만큼 물론 중요하긴 하였으나, 왜란이 끝나고 북방민족의 위협이 대두되며 군사력 증강의 우선 순위에선 약간 밀렸다.

김준룡은 그렇기에 불안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적들이 오고 있사오이다!"

앞 벌판에 부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수만에 달하는 팔기가 일거에 달려오고 있었다.

적은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명백히 삼면에서 삼남군을 두들기려는 움직임이었다.

"내 명이 있을 때까진 방포해선 안된다!"

전장에서 조총과 궁시의 사격을 통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장 이자원부터가 쌍령에서 사격 통제에 실패해 위기에 처하지 않았던가.

김준룡은 병자호란 당시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그 뒤 권대용의 난 즈음해서는 전라 감사로, 다음해에는 경상 감사로 옮겨가며 나름 삼남군의 군기를 다잡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병자년의 오합지졸 조선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 있었지만 실전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김준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이다! 방포하라!"

- 타타탕!

삼남군은 다행히 별 문제없이 사격 통제에 따랐다.

그나마 농한기마다 조총이라도 쏘아보며 훈련을 시킨 덕이었다.

김준룡의 명령에도 당황해 먼저 방포하는 이가 있었지만, 연쇄적으로 따라 쏘기 전에 군관들이 나서서 두들겨 팼다.

그 결과, 상당수가 제때 방포할 수 있었다.

"사수!"

활을 든 사수들이 나서 화살을 쏘아댔다.

얼마 전 어영청과 같은 삼수병 체제다.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속오군 특성상 훈련도감과 같은 네덜란드식 선형전술을 도입하진 못했지만, 이정도만 해도 나름 심혈을 기울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팔기의 돌파를 충분히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살수! 살수들은 서둘러 적을 막아라!"

어느새 도달한 팔기들이다.

적의 이목구비마저 구분이 갈 때쯤,

팔기들이 목책을 짓밟았다.

===

"청군이 우군에 격돌했사오이다!"

전장을 관측하기 위해 나가있던 정초군 기병 여럿이 돌아왔다.

박철균은 황급히 이자원의 막사를 찾아 외쳤다.

"시작인가."

열심히 녹영병을 돌파하고 적들을 패퇴시킨 공로를 자랑하고 있던 황익이 입을 다물었다.

이자원의 시선은 그곳을 향해 있었기에.

"적병의 수효는 얼마나 되던가?"

"최소 1만이오이다."

삼남군의 절반 조금 넘는 병력이다.

팔기와 삼남군의 기량 차이를 감안해봤을 때 이정도라면 승패는 이미 난 것.

그러나 관건은 삼남군이 얼마나 버티느냐였다.

"박 별장, 황 별장."

"예, 대감."

"즉시 정초군과 훈국 마병을 이끌고 가서 삼남군을 구원하도록."

"그들만으로 충분하겠사오이까?"

박철균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정초군의 병력은 1천 조금 넘고, 훈국 마병 또한 비슷한 숫자.

그야말로 삼면에서 몰아치고 있는 청군을 격퇴할 수 있을까.

"내 말대로 해라."

이자원의 명에 박철균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움직였다.

황익은 황급히 인사를 올린 후 그 뒤를 따랐다.

"교전 중인 녹영병은 아직 잘버티오?"

이자원이 곧이어 전방의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어영대장 이완이 즉각 말했다.

"적들의 사기가 이상하리만치 높아 격퇴가 쉽지 않았사오이다. 허나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겠지요. 도원수 대감, 지금이오이다."

이완은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자원의 생각도 같았다.

"지금부터 전군이 움직여야 할 것이오."

보병은 가만히 앉아서 적을 맞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대오를 맞춰 움직이며 적을 포위하고 섬멸한다.

지금쯤 녹영의 힘도 대부분 빠졌을테니, 움직이기엔 적기나 다름없었다.

"훈국과 어영청은 진군하라!"

===

기총(旗摠) 조을동은 장창을 적병 틈에 마구 찔러댔다.

비록 짬도 차고 저 영고탑 원정까지 따라간 공이 인정되어 대장(隊長)에서 승진하여 1개 기를 맡게 되었다고 하나 직접 창을 들고 싸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옘병할!"

"去死?(죽어라)!"

조을동은 한어로 무어라 외치며 죽어라 창을 주고받는 적의 덩어리에 혀를 내둘렀다.

"고발피야, 살아있느냐?"

"윽!"

묻자마자 옆에서 고발피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놈이 정말 죽었는가 싶어 옆을 휘떡 돌아보자, 고발피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왜 그래?"

창에라도 맞았는가 싶어 황급히 묻자 고발피가 대답했다.

"놀라서 소변을 찔끔한 것 같소이다."

조을동은 고개를 돌렸다.

'한심한 놈.'

훈련도감의 장창은 청군의 낭선이나 당파, 창보다 길고 튼튼하다.

그러니 같이 보병끼리 전열을 짜서 싸움을 해도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황익의 기병이 멀리서 한무리 청군을 물리치고, 다시 나타난 왜도(倭刀)든 살수들이 적의 목을 치니 청군의 대열은 전체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뒤에서 신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군하라!"

영문도 모른채 조을동은 신류의 명을 받아 외쳤다.

"진군하라! 적을 밀어내라!"

태산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버티기만 하던 조선군이 별안간 움직이기 시작하자 달라붙어 창을 교환하던 청의 녹영병들은 놀랐다.

- 쿵! 쿵! 쿵!

"흐아아!"

장창을 곧추세우고 나아오는 거대한 덩어리에 청군은 등패와 창칼을 내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커헉!"

살갗을 찌른 조선군의 장창이 한걸음, 두걸음씩 나아올 때마다 청군의 복부를 파고 들었다.

꼬치가 된 채로 뒷걸음질치던 청군은 이내 절명했다.

비단 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맨 앞열에 있던 청군들은 도망치는 뒷열 동료들과 나아오는 조선군 사이에 갇혀 도살당했다.

삽시간에 청군 녹영병들이 무너졌고, 같은 시기 북병들을 상대하고 있던 녹영병 역시 북을 쳐서 물러났다.

'우리도 훈련도감만 같았으면 진작 적들을 정리했을 터인데.'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임경업이 입맛을 다셨다.

옆에 있는 오삼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이끌고 있는 북병과 가도군은 중앙의 훈국, 어영청처럼 대대적인 공격을 받진 않았음에도 계속 교착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쪽의 청군이 서서히 발을 빼는 것 같사오이다!"

패주하는 중앙의 청군과 달리 질서정연했지만, 전장의 형세가 불리한 것을 저쪽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청북방어사."

"알고 있소이다, 부총병 대인."

임경업과 오삼계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우리도 진격한다! 북을 쳐라!"

===

팔기의 말발굽이 삼남군을 짓밟았다.

목책이 놔뒹굴고, 죽어버린 조선군의 시체 위로 도르곤이 이끄는 팔기군이 내달렸다.

"다음 목책으로 후퇴하라!"

조선군은 순식간에 진으로 돌입한 팔기에 공포를 느끼며 등을 내보였다.

그러나 채 삼분지일도 퇴각하기 전, 김준룡의 추상 같은 명이 떨어졌다.

"목책을 걸어닫아라!"

철질려가 군데군데 뿌려져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팔기의 돌격을 막아낼 수 없다.

코 앞까지 적이 다가온 판에 후퇴하는 아군과 뒤엉켰다간 도원수 대감의 명을 완수할 수 없다.

'전장이 정리될 때까지 버티시오.'

이자원의 명은 간명했다.

오로지 이 삼남군만을 이끌고, 지원이 올때까지 버티는 것.

'이런 평야에서의 싸움은 기책을 부리기 힘드오.'

김준룡은 지난 수년간 속오군도 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자면 반드시 버텨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빨리 들여보내줘!"

"오랑캐가 오고 있단 말이다 이 자식들아!"

겁에 질린 조선군들이 외쳤다.

그러나 속오군은 머뭇거릴지언정, 김준룡의 말을 감히 거역하는 이는 없었다.

처리해야할 행정 업무도 많은 감사임에도 항상 겨울마다 각지를 돌며 속오군의 훈련을 점검하던 김준룡이다.

그의 명을 거역할 사람은 없었다.

"적이 온다!"

"으아아!"

조선군은 뒤에서 짓쳐들어오는 청군을 보고 비산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팔기는 그들 패잔병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제 시간 안에 조선군 우군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조선군 전체를 패퇴시키는 것.

오로지 그 목적 하나로, 팔기는 총탄과 궁시를 뚫고 목책에 도달했다.

삼남군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

- 퍽!

박철균이 편곤으로 적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차라리 칼이라면 막겠으나, 원심력이 더해진 편곤은 투구 속 청군의 뇌를 완전히 진탕시켜놓았다.

"황 별장! 훈국 마병들을 이끌고 우회하시오!"

'제기, 나이도 경력도 까마득한 놈이 이래라저래라야. 도원수 대감의 측근만 아니었어도······.'

박철균의 외침에 황익이 투덜거리면서 외쳤다.

"알겠소! 내 그리하리다! 부디 보중하시오!"

훈국과 정초군 마병들이 삼남군에게 닿기 전에 청군 기병이 막아섰다.

명백히 지원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황익이 훈국 마병들을 이끌고 삼남군에게로 간 사이, 박철균이 앞을 가로막은 청군 장수에게 외쳤다.

"그대는 누구요?"

부방살 적 배워놓은 만주어로 그리 묻자 청장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우리말을 할줄 아는 것 같으니 특별히 대답해주지. 대청 병부승정 수크사하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자원이 삼남군을 구원하기 위해 기병을 움직이리란 것은 예상했던 바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뒤에 남아있던 수크사하였다.

수크사하의 물음에 박철균이 답했다.

"조선군 정초별장 박철균이오."

그러고보니 서로 언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병부승정은 우리 조선으로 치면 병조판서로군. 실로 대어를 낚게 되었소."

일대일로 비교하기엔 무리겠지만 상관인 이자원과 같은 직급이 아닌가.

박철균은 편곤을 고쳐잡았다.

정초군과 팔기군이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 심양 회전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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