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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41화 (141/213)

< 심양 회전 (2) >

혼하(渾河)는 심양 남쪽을 흐른다.

청군은 이곳을 막아선 조선군 일부를 손쉽게 격파했다.

"본군(本軍)은 계속 남하하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대왕."

수크사하의 말에 도르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것이 이자원의 유인책이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적이 혼하를 막고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적은 정말로 물러나고 있었다.

"팔기와 녹영을 여기서 나눈다."

도르곤은 심양성을 나올 때 팔기, 쿠툴러, 녹영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병력을 끌고 출격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혹시 그가 성을 비운 틈을 타 강덕제가 심양에 돌아와서 성문을 걸어잠글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이번 싸움에 나라의 명운이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도르곤은 때문에 사기를 끌어올려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쿠툴러들은 들으라!"

"이 싸움에서 이기면 너희의 노예 신분을 벗겨주고 양민으로 만들어 주겠다!"

팔기들에게 딸려있던 쿠툴러들이 도르곤의 말에 눈을 꿈뻑거렸다.

하지만 도르곤은 이번에는 녹영을 보고 말했다.

"그간 녹영의 사정이 어려웠던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잘못된 법을 세워 만주인과 한인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같이 싸워서 이기더라도 공적과 재물이 그대들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이니라! 나는 이번 싸움부터 이런 폐단을 즉각 고쳐 확실하게 만한(滿漢)의 일체를 못박아둘 것이다!"

실상 한인 팔기가 될 예정이었던 우전 초하를 녹영으로 바꾸고, 한족 차별을 주도해온 것은 도르곤이었지만 그는 안색이 조금도 바뀌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수크사하는 도르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표정이 굳어 속삭였다.

"대왕, 이리 나오시면 팔기들의 불만이 클 것입니다."

자신들의 노예를 멋대로 양민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데다 녹영까지 팔기와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도르곤은 수크사하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팔기를 보며 외쳤다.

"그리고 이번 싸움부터는 스스로 얻은 사람과 물자는 나라에서 취하지 않겠다! 오로지 성심을 다해 싸우고 재주껏 취하여라!"

후금은 원래 사사로운 약탈을 허용했지만, 누르하치가 개원을 함락한 후부터는 전투 후 얻은 모든 것을 나라에서 가져가고, 공적을 따져 하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것은 당연히 팔기의 강한 불만을 가져왔기에, 약탈을 허용하겠다는 도르곤의 말에 팔기들은 환호했다.

녹영과 쿠툴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청군의 핵심은 팔기이다.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해 승리에 쐐기를 박는 것이 팔기였으니, 약탈은 대부분 그들의 몫이었다.

노예병이야 다음 싸움에서 사로잡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청이라는 나라 자체에 있어서는 상당한 타격일 것이 분명했지만 도르곤은 이렇게라도 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싸움만 이기면 된다."

도르곤이 말했다.

===

이사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신출내기 초관 신류가 물었다.

"떨리시오이까?"

"떨리기는, 이놈아! 너와는 달리 수도 없이 전장을 드나든 몸이시다!"

이사룡은 충청도 반란 진압 때부터 일선에서 전투를 몇번이나 치루었으니 말이야 옳았지만, 내심 가슴이 떨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쪽 편에 수만, 저쪽 편에 수만.

끝없이 넓은 요야가 적군과 아군으로 가득 들어찼으니 이것은 실로 그로서도 처음 경험해보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청군이 온다!"

살수대의 누군가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 말처럼 청군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룡이 생각했던 양상과는 달랐다.

팔기가 바로 말을 내달려 부닥쳐오지는 않고, 오히려 녹영을 앞세워 나아오는 것이 아닌가.

"저들이 장기로 삼는 것은 기병인데 어찌 보병으로만 나아올까요?"

신류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그렇게 말했다.

이사룡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청군이 이기려면 수만 기병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대열을 무너뜨리는 것이 최선이었거늘, 어째서 녹영을 앞세운단 말인가.

- 퍼펑!

뒤편에서 폭음이 들렸다.

조선군이 포격을 개시한 것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탄에 청군 대열 사이에 이리저리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 포격만으로 싸움이 끝나겠구만!"

이사룡이 시원하게 방포하는 조선군 별파진을 보며 외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군은 썩어도 준치인지 능숙하게 대열을 메워가며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순간 포격이 뚝 그쳤다.

"조총을 쏘아라!"

- 타다당!

투박한 방포음과 함께 포수들은 조총을 놓았다.

중앙의 훈국군과 어영청, 그리고 북병 포수들이 모두 총을 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사룡이 속한 초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

"와아아!"

"물러나지 마라!"

화망에 갇힌 청군은 무수히 쓰러졌지만, 진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도르곤이 진작 사기를 높여놓은데다 뒤에서 독전 역할을 맡은 청군이 주춤거리는 자들을 거침없이 베었기 때문이었다.

"어휴, 저걸 버티면서 나아온단 말이냐?"

이사룡이 혀를 내둘렀다.

훈련도감의 포수초들은 일제히 사격을 감행한 후 뒷열로 물러나고, 다음열이 사격열을 대신해 앞으로 나와 다시 총탄을 퍼부었다.

이런 반대행진에 익숙하지 않은 북병들은 사수(射手)들이 나서서 화살을 쏘아댔다.

끝내 녹영병이 조선군에게 다가왔다.

"살수들! 모두 장창을 들어라!"

"와아아!"

소리를 지르면서 고슴도치처럼 장창이 처척 들어올려졌다.

수년간 연습의 결과 덕분이었다.

장창은 본래 가시나무로 만든다고는 하나, 조선에서는 구하기가 어렵다.

조총 몸도 좀 더 수급이 쉬운 가래나무로 대체하는 판이었으니 귀한 가시나무 대신 최근에는 자생 물푸레나무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생종은 유럽에서 창자루로 쓰는 물푸레나무보다는 무거웠지만 기존 가시나무보다는 구하기 쉽고 가벼웠다.

한편 청군의 녹영병은 투항한 명군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만큼, 척계광의 원앙진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조총과 화약이 부족한 청군이었으므로 오히려 냉병기의 단련은 더욱 심도깊게 되어, 길고 짧은 창칼이 유기적으로 휘둘러졌다 또 거두어졌다.

한족 군사들이라 하여 훈련과 싸움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닌 것이다.

"으악!"

"크윽!"

하지만 고슴도치처럼 밀집되어 있는 장창진을 뚫기란 쉽지 않았다.

뒷걸음질치던 청군은 계속 꾸역꾸역 진격하는 아군에게 밀려 장창에 몸이 꿰어졌다.

녹영병의 낭선과 당파가 장창진의 훈국 병사들을 휘저으려 했지만 진은 단단했다.

그러나 밀집한 장창수들도 이런 상황에선 찌르기 외 기술을 사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상황은 잠시 교착되었다.

이사룡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그때 한무리 병사들이 달려나왔다.

"적을 죽여라!"

일본도를 든 항왜군 병사들이었다.

장창진을 돌아 나온 그들은 서로를 찔러대는 녹영병의 옆구리를 쳤다.

황급히 청군은 그들을 막기 위해 등패를 들이밀었지만 소용없었다.

- 촤악!

청군의 등패를 슥 타고 위로 향한 일본도가 청군의 목을 날려버렸다.

"적을 죽여라!"

===

중앙의 훈국과 어영청, 후방의 정초군, 좌측의 북병과 가도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측의 삼남군.

현재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주로 중앙과 좌측이었다.

"북병 쪽은 괜찮은가?"

"그렇사오이다."

유림은 안산을 점령하고 요동반도에 흩어진 청 군현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집중하고 있어, 심양 인근에 남은 북병의 지휘는 임경업이 도맡고 있었다.

가도군도 오삼계가 이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오히려 이자원이 지휘관의 역량만 믿고 과감하게 맡긴 곳은 우군이었다.

'정예도로 따지면 삼남군이 가장 떨어진다.'

그간 필요 자원은 사실상 중앙군과 북병에 집중되었고, 후방의 속오군들에게는 화약을 좀 더 넉넉히 지급하고 훈련을 제대로 시키는 선에서 머물렀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이자원은 과감히 김준룡에게 단독으로 일군을 맡겼다. 광교산에서 도도와 양구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자가 아닌가.

어설픈 삼남군을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도록 지휘해줄 것이다.

'도르곤도 우군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마 그 추리를 확인하려면 조금 적을 건드려보는 것이 좋으리라.

"아직 전방은 녹영과 교전 중인가?"

"그렇사오이다, 도원수 대감."

잠시 생각하던 이자원은 시립해있던 마병별장 황익을 보며 말했다.

"황 별장."

"예, 대감."

"저기서 싸우고 있는 청군의 옆구리를 슬쩍 후려치고 돌아오도록."

"예에?"

척 보기에도 수만은 되어보이는 적병을 대놓고 습격하라니.

황익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무리 우리 기병이 정예하다 하나 함부로 적진에 맞섰다 적의 철기(鐵騎)에게 반격이라도 당한다면······."

진강에서 기병 대 기병으로 싸워 이겼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자원이 이끌었기에 그렇다 생각한 황익이었다.

그러자 이자원이 말없이 그를 한번 노려보았다.

"······바, 받들겠사오이다."

황익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

"제길, 제기랄."

동만주산 전마는 야속할 정도로 잘 달렸다.

어느 틈에 아군과 창칼을 교환하고 있는 청군이 보였다.

"방포하라!"

제각기 꺼낸 수석식 피스톨이 불을 뿜었다.

훈련도감 마병들은 이런 권총(拳銃)을 서너정씩 차고 다닌다.

일제히 총탄을 쏘아낸 기병은 청군을 향해 돌입했다.

스웨덴의 대왕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운영했던 하카펠리타트(hakkapeliter)와 같은 방식이었다.

조선 기병이 백병전 실력은 청에 비해 모자란다 하나, 어디까지나 기병 대 기병에 한정했을 때 그런 것이다.

한번 권총 사격을 받은 녹영병이 조선군 기병을 당해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조선군을 막아라!"

녹영병들이 훈국의 기병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자, 청군이 분주해지며 재빨리 이쪽으로 전력을 증강해오기 시작했다.

화살이 쏟아지고, 그 뒤로 겨우 적의 창을 피해낸 황익은 다급히 부하들을 끌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다간 꼼짝없이 팔기를 상대해야겠구나!'

"곧 청 마병이 올 것이다! 지금쯤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부하들은 반문했다.

"아직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지 못했는데 후퇴라니요?"

"그래도!"

어차피 적들이 정신을 차렸으니 전열을 뚫기란 난망하다.

황익은 용케 수급 하나를 챙긴 뒤 바로 몸을 뺐다.

기병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응?'

부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도망가고 있던 황익이 뒤를 돌아보니, 청 기병이 추격을 해오기는커녕, 쥐새끼 한마리 쫓아오지 않았다.

부하들도 그를 이상한 놈 보듯 쳐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황익은 말머리를 돌리고 외쳤다.

"바, 반전하라! 다시 청군에 돌입하라!"

"예에?"

부하들이 물었지만 황익은 어느틈에 말을 몰아 앞서나갔다. 재차 권총을 뽑은 조선군 기병이 사격을 가했다.

다시 되돌아올줄 몰랐던 청군들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적이 돌아온다!"

권총 사격을 가하고 빠르게 후퇴하는 카라콜 전법은 보병의 화력이 강해진 유럽에선 진작에 도태된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금의 청군은 반격은커녕 물러난줄 알았던 적에게 다시 권총 사격을 받자 심리적으로 당황했다.

본의 아니게 카라콜을 사용한 황익이 청군을 짓밟으며 전열을 무너뜨렸고, 그 뒤를 따라 조선 기병들이 난입했다.

===

"우리군이 적을 격파했사오이다, 도원수 대감!"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완이 외쳤다.

비록 황익이 무너뜨린 것은 교전 중인 녹영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전과를 올린 것이다.

"저쪽은 구왕도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오."

이자원이 말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도르곤이 쥐고 있는 팔기는 다른 곳에 있다. 삼남군을 치기 위해서.

"김준룡에게 전하라. 적이 올 것이다."

< 심양 회전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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