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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40화 (140/213)

< 심양 회전 (1) >

요양에서부터 이어지는 요동벌판은 곧 1200리에 달한다.

심양성은 그 평야지세에 위치하여 사통이 팔달하고, 일국의 도읍인만큼 자못 위세가 있었다.

그러나 작금의 조선군에겐 단지 먹잇감일 뿐.

"우리가 심양을 함락하러 올줄은 몰랐사오이다."

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전략이란 단지 적을 방어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차례차례 적을 쓰러뜨린 끝에 이제는 적의 심장까지 왔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위해 지난 수년간 국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오."

이자원이 담담하게 답했다.

청군이 유리하게 생각하는 평야를 거쳐왔거늘 도르곤은 나와서 맞서지 않았다.

이자원은 도르곤이 오로지 지키기로 방침을 세웠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곧 목소리 큰 병사들을 뽑아 만주어와 한어 문장 몇개를 가르치게 했다.

"너희 오랑캐는 승세를 잃어 궁벽한 곳에 갇혔거늘 어찌 아직까지 버티고자 하는가! 싸울 생각이 없거든 관을 지고 옥을 물어 항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야, 이 야인 놈들아! 틈만 나면 호기의 정예함을 떠들어대더니 겁을 먹은 것이냐! 한번 나와서 맞붙어보자! 머리털도 밀어버리더니 불알마저 잃은 것이냐!"

여러명이 이리 외치자 너른 공간에 조선군의 도발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심양성 성첩에서는 적군이 분을 이기지 못해 활을 쏘아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청군 자체에서 대대적으로 나서 싸움을 걸려 들지는 않았다.

결국 이자원은 이를 포기하고 성을 떨어뜨리는 정석적인 방법으로 대응했다.

바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한 것이다.

"공성 상황은 어떠하오?"

"연산관과 요양을 도원수 대감의 꾀로 손쉬이 돌파한 덕에 화약이 많이 남았사오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성벽을 포로 두들기고 있으니 적들도 혼이 빠질 것이오이다."

조선군은 화포를 대대적으로 끌고 왔다.

홍이포부터 천자총통, 지자총통 같은 전통적인 총통류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험한 산길을 통해 옮기느라 병사들은 고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쉽게 이길 수 있겠습니다, 총병 대인."

오삼계가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화포 세례에 심양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조선군은 초고속으로 연산관과 요양을 돌파했으므로 심양성의 공성에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무한정으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달만 이렇게 퍼부어대면 넉넉히 함락할 수 있지 않을까.

이리 낙관적인 생각을 하던 장수들에게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몰렸으나 심양은 적도(敵都)요.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터. 되도록 계책을 써서 적들을 끌어내는 것이 가장 좋소."

"허나 그것이 가능하겠사오이까? 옛날 하세현 같은 자가 아니고서야."

하세현은 이민족 출신의 맹장으로 조선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용맹에 취해 기병을 이끌고 나갔다 누르하치의 계략에 걸려들어 참패, 심양성을 거저 넘겨주다시피 하였다.

당시의 후금군은 변변한 공성 능력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어이없는 실책이었다.

그러나 이자원이 일부러 틈을 주어보아도 도르곤은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나와서 싸우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적의 힘도 다할 터. 계속 이리 간다면 심양이 위태롭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도르곤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자원은 생각에 잠겼다.

회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지구전을 벌이며 버티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조선의 역량이 다하기 전에 심양이 함락될 것은 불보듯 뻔한데.

"구왕이란 자가 제 형보다도 담력이 없는 듯 하오이다."

이완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어찌보면 성을 지키면서도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던 아지거보다 훨씬 겁을 먹었다고 보일수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성을 그저 지키기만 한다? 적을 싸우면서?'

진창을 지키던 학소에게 막혀 끝내 군을 거두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제갈량처럼, 제풀에 지쳐 물러나기만 기다리는 것인가.

하지만 이자원은 도르곤이 단지 그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부원수에게서 무슨 이상은 듣지 못하였소?"

임경업에게 물은 이자원이다.

조양에서 퇴각한 유림은 안산으로 되돌아가 요동 일대의 복속에 나서고 있었다.

"수일 전 안산으로부터 서쪽 30리 가량에서 한무리 군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하오이다."

"청군인가."

이자원이 얼굴을 굳혔다.

유림이 추격했지만 곧 놓쳤고, 그 뒤로는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아 도르곤에게 합류했을 것이라 추측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자원이 보기에는 달랐다.

"이것은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이오."

이자원이 말했다.

"우리의 군량은 동팔참에서부터 요양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에 의지하고 있소."

원활한 군량의 보급을 위해 강진흔이 압록강까지는 배를 이용해 물자를 옮기고 있었으나, 그 뒤로는 말과 수레를 통해 운반했다.

군량이며 병기, 화약이 모두 그 얇은 선에 의지하고 있으니 청군이 그것을 끊어먹고자 한다면 조선군은 최대의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오면 큰일이 아니오이까? 속히 후방에 원군을 보내 청군을 막아내는 것이 가하오이다!"

이완의 말에 이자원은 차분히 반박했다.

"그것이 오히려 청이 바라는 바일터요. 청군의 기동력은 우리보다 우월하니 무슨 수를 써도 후방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지 못하겠지. 그보다는,"

이자원은 등채로 지도 끝을 찍었다.

"아예 적이 치지 못할 곳으로 보급로를 바꾸는 것이 가하오."

청군의 전력은 요양과 심양 일대에 집중이 되어있고, 해안선에는 별다른 병력을 배치해놓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지 못한 것에 가깝지만.

'그러니 요동 반도를 빙 돌아 태자하로 들어서면 수로로도 보급이 가능하다.'

태자하는 요양 동부에서 발원해 요동반도 북쪽, 개주(蓋州, 현 잉커우 부근)로 흘러나간다.

이제 요양을 얻었으니 조금 돌아갈지언정 수로로 군량을 보급받을 수 있었다.

도도가 이를 알아차리더라도, 이미 때는 늦어있을 것이다.

"통제사에게 서신을 보내 압록강이 아닌, 태자하로 들어오도록 하시오."

이자원이 이완을 보며 말했다.

다시 그의 시선이 오삼계에게 향했다.

"또 우리 배는 먼 바다를 건너는데 적합하지 않으니 가도의 배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사선을 전부 끌어모아 군량 보급을 도우라 전하도록."

"예, 대인!"

이자원의 명이 떨어지자 조선군과 가도군은 한치의 망설임없이 움직였다.

"도원수 대감, 허면 육로로의 보급은 중단하는 것이오이까?"

김충선의 물음에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전히 군량 일부는 육로로 돌려 운반하도록 하시오."

이것이 도르곤의 노림수라면, 걸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를 속이려면 자신의 꾀에 넘어가게 하는 수밖에 없으니.

"중군은 동팔참으로 가서 적당히 적을 막는 척하며, 날로 상황이 어렵다는 소문을 퍼뜨리시오. 청군이 습격해오면 열 번 중 서너 번 정도는 당해주는 것이 좋겠소."

"맡겨 주십시오."

김충선이 대답했다.

적을 속이기 위함이라지만 장수로서 당해주라는 것은 일견 빛이 나지 않고, 보기에 따라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김충선은 딱히 불만을 품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아니 수년 전 호란 때만 하더라도 직접 전장에 나서 싸움을 했지만 이제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늙은 몸을 써먹을 데가 있다면 어디든 가는 것이 도리이리라.

이자원도 그것을 알고 맡긴 것이었고 말이다.

'오삼계에 맡긴다면.'

아마 공을 세우고자 청군을 대파(大破)하려 들겠지.

그런 점에서 이 노장은 안심이었다.

'자, 도르곤. 네가 원하는대로 조선군의 밥줄이 끊어진다. 어찌 움직일테냐.'

후방에 침투한 청군이 보급을 끊었다고 철석 같이 믿는 그 순간, 도르곤은 움직인다.

굶어서 비실비실해진 조선군을 물어뜯기 위해.

그러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은 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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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가 직접 나서서 적을 찔러대기 시작하자 조선군의 진영에는 곧장 변화가 나타났다.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자는듯 쉴새없이 포탄을 퍼부어대던 종전과는 달리, 심양성을 향한 포격은 점점 드물어졌다.

매일 조선군의 방포 횟수를 점검하던 도르곤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슬슬 조선군이 쪼들리기 시작하는 모양이로군."

도르곤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도도는 팔기의 우월한 기동력을 이용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다.

식량과 화약을 가리지 않고 수레 수십 채를 노획해 불을 질렀고, 조선군을 5백 넘게 죽였다는 보고에 도르곤은 싸늘하게 웃었다.

"5만이나 되는 대군이다. 일부만 탈취당하더라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지."

도르곤은 그리 확신했다.

여기에 수크사하가 올린 보고까지 더해졌다.

"대왕, 조선군이 물러날 모양입니다."

"뭐라?"

도르곤이 물었다.

척후들은 조선군이 뒤편부터 슬슬 목책을 뽑고 진영을 정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급이 끊어진데다 아직 심양성은 끄떡없었으니 일견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벌써?'

도도가 비록 적의 보급을 끊고 있다지만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만 하더라도 칠일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이거늘.

'이자원은 지장(智將)이니 현재로서는 묵던을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가.'

그러나 도읍인 심양을 이리 쉽게 포기하고 물러난다는 것은 쉬이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칼 같은 자라도 코 앞까지 이룬 북벌을 망설임없이 거둔다니.

도르곤은 이자원이란 인간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사례가 하도 많았던지라 지금의 이 소식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저것이 진짜라면, 들이쳐야 할 시점은 지금이다.'

적은 후퇴할 때 가장 취약하다.

게다가 이곳 요야에서 승부를 보지 않으면, 조선군이 연산관으로 꽁무니를 뺄 때도 추격하기 힘들었다. 그 일대는 대개 산지니 말이다.

"대왕, 지금이 싸워야 할 때입니다. 조선군도 조선군이거니와, 휘하의 불만이 대단히 많습니다."

수크사하가 걱정스레 말했다.

응창을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들은 사정상 모두 심양성에 묶인 채 군수품으로 전용되고 있었고, 나눠지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성내에서 포격만 당하고 있자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에제이를 사로잡은 뒤 한껏 예기(銳氣)가 오른 틈을 타 조선군과 맞섰다면 금방 격퇴할 수 있었으리라 떠드는 자들도 나왔다.

"거기다 닝구타에서도 병력을 모으고 있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그쪽은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이니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동만주에서 병력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은, 조선이 북벌을 준비할 때부터 보고 받았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아민이 죽고 내부 정리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디까지나 성동격서를 위한 책략일 뿐이라 판단했다.

아민처럼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 이상 현재의 동만주 부족장들은 제 병력을 움직여 서쪽으로 나아올 생각은 없을테니.

"하지만 지금이 호기인 것은 사실이다."

도르곤은 결단을 내렸다.

적이 물러간다면 들이쳐야 한다.

"회전을 벌일 것이다! 모두 출진 준비를 하라!"

심양성의 문이 열렸다.

청군 2만이 끝간데 모를 정도로 넓은 평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5만의 조선군이 반대편에 포진했다.

< 심양 회전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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