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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39화 (139/213)

< 일보(一步) >

대청의 강덕제 아이신기오로 쇼서를 부르는 호칭은 많다.

중국식으로는 황제, 만주식으로는 한, 몽골식으로는 대칸.

그러나 이 모든 칭호는 명목상일 뿐.

쇼서는 짧은 재위기간 중 단 한번도 제대로 통치권을 행사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앉아 비서원대학사 로쇼가 어새(御璽)를 무슨무슨 조령, 칙서에다 찍고 있는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마 며칠 전까지는 스스로 도장 찍는 흉내라도 내었던 쇼서지만, 범문정이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자 저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황제가 옛 총신의 죽음에 무기력해졌다 해도 신하로서 할 수 없는 망동이었지만 쇼서는 그것을 제지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 탓이로구나!"

공표하기로는 라파에서 다시 사르후로 유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지쳐 죽었다 했지만 어린 쇼서가 보기에도 명백히 도르곤이 손을 쓴 것이었다.

이젠 함께 일을 도모할 든든한 우군도 없었으니 쇼서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쇼서에게 조신(朝臣)들이 찾아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요양이, 조선군 손에 넘어갔다?"

쇼서가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한. 서둘러 파천을 해야합니다!"

도르곤이 대군을 거느리고 떠난 것은 호거의 뿌리를 뽑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이번 북벌은 조선으로서도 상당히 무리한 것, 차라리 지금 시점에 연산관이, 혹은 요양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수년간의 공력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것은 조선 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요양은 넘어갔다.

조신들의 말에 쇼서는 침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어디로 말이오?"

서쪽으로 가면 명나라, 동쪽으로 가면 조선이 쥐고 있는 닝구타다.

어느쪽으로 가나 끝장일 것은 명확해보였다.

하지만 멍하니 쇼서가 심양에 남아있다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청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바였던데다 곧 전쟁터가 될 이곳에 남아있기도 싫었던 조신들은 쇼서를 재촉했다.

"아직 흥경(興京, 허투알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흥경은 태조께서 일어나신 제흥지지이니 잠시 몸을 피할만 합니다. 벌써 만주인들은 모두 짐을 둘러메고 피난하고 있나이다."

한족들이야 요양처럼 주인이 바뀌든 어쨌든 상관하지 않으리라.

아직 요양의 여섯 선비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학살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없었으니.

그러나 만주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서둘러 짐을 챙겨 심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피난민들의 목적지는 대개 조선군의 발길이 닿지 않은 흥경이었다.

어가 또한 피하자면 그곳으로 피하는 것이 옳겠지만 쇼서는 영 내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심양은 청의 수도였고, 그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또 한가지 드는 의문.

'흥경으로 가도 조선군이 또 몰려들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그때는 야인(野人)들이 들끓는 라파로 가자고 할 것인가?'

아지거마저 죽은 마당이다.

도르곤의 동복형으로서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남겨놓은 자였으니, 그리 미덥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는 현재 청에 남아있는 이들 중 제일 수위에 있는 명장이라 할만했다.

아지거가 죽었으니 심양도 함락되는 것이 기정사실 같아보였다.

쇼서의 무기력함은 조선군이 도착하자 더욱 심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 전에 싸워야 하는가?'

이미 권력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꼭두각시.

누구도 자신에게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거늘, 홀로 발버둥쳐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친왕께서 이미 조양에 이르셨으니 묵던이 무너지기 전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신하들이 그렇게 쇼서를 설득했지만 쇼서의 마음은 여전히 싸늘했다.

'도르곤이 설사 조선군을 물리친다 해도 문제가 아닌가.'

몽골을 재차 정복하고 멸망의 위기에서 청을 구해냈으니 그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 순간이 되면 범문정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죄로 쇼서는 십중팔구 폐위되리라.

그러나 쇼서는 조신들의 이런 청조차 거절할 힘이 없었다.

"그 많던 황친(皇親)들도 하나둘 목숨을 잃어 이제는 몇 사람 남지 않았으니 도읍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가. 오로지 예친왕으로 하여금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세울 것이니 짐을 대신하여 사직을 구하도록 하시오."

그는 맥빠진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흥경으로 가자."

옥좌에서 일어난 쇼서가 내관들에게 말했다.

이미 황명이 있기도 전에 준비되어 있던 강덕제의 어가가 심양성의 동문으로 떠났다.

그 뒤로 신하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황제가 도망간다!"

"정말 청나라가 끝나는 것인가."

그 모습을 보며 심양의 백성들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 불온한 발언들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강덕제(康德帝)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예친왕 도르곤이 심양에 입성했던 것이다.

===

조양에서 유림의 군대를 쫓아보낸 도르곤은 곧장 군대를 몰아 요양으로 발길을 잡았다.

그러나 전해져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옆에 서있던 도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지거 사망, 요양 함몰!

조선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도르곤은 파발을 보고 물었다.

"한께서는 파천하셨는가?"

"그렇습니다. 도읍을 떠나시며 대왕께 유도대장의 소임을 맡기셨습니다."

"이제 내가 왔으니 걱정 마시라 일러라."

쇼서가 몸을 뺐다니 되었다.

조선군은 다 이긴 것처럼 분위기가 풀어져있을테지만, 공자와 방자의 입장은 다르다.

아무리 많은 영토를 얻었어도 제때 청을 멸망시키지 못하면 다 토해내고 다시 연산관 너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공자인 조선군.

병자년의 조선 원정 당시에도 청군이 한양을 함락했지만 끝내 패퇴해 물러나야 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것을 반대로 재현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대왕······."

도르곤은 눈을 감았다.

이길 수 있을까.

온정평에서 붙어본 조선군은 회전 역량이 급격히 상승해 있었다.

함부로 맞붙었다 패한다면 끝장이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도르곤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조선은 싸움을 오래 끌 수 없다. 요동까지 무려 5만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리고 왔으니 전쟁이 지속될수록 적의 후방은 피폐해지겠지."

도르곤이 쉽게 회전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대군 때문이었지만, 그것이 조선군의 발목을 잡게 되리라.

"거기에 더하여 적의 양도(糧道)도 끊어야겠지요."

조선의 보급은 동팔참에서부터 연산관을 통해 요양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는 험한 준령으로 이루어져있으므로 끊어내기가 쉬울 터였다.

"해낼 수 있겠는가?"

"맡겨만 주십시오, 대왕."

도도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이미 요양과 안산이 넘어갔으니 크게 우회해서 적의 보급선을 들이쳐야 한다.

조선군에게 포착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이지만 도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네가 보급을 끊고 내가 묵던에서 수비하면 조선군은 처참히 말라죽어 가겠지. 바로 그때,"

도르곤이 말을 이었다.

"결전을 벌일 것이다."

===

요양을 점령한 조선군은 그 번화함에 놀랐다.

비록 최근 청의 물자 부족으로 상당히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곧은 길을 따라 좌우 가게가 즐비하고 시장이 5리 가까이 뻗쳐 있는 것이 아닌가.

청이 수도를 옮기고는 심양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과연 한때 요동 제일의 도시였던 곳 다웠다.

그러나 이자원은 성 남쪽 영안사(永安寺)에 편 본영에 머무를 뿐 이솔태에게 민심의 위무를 맡긴 후로는 요양 자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심양이었다.

"장군, 부르셨사오이까."

이자원이 있는 요사(寮舍, 승려들의 숙소)에 적비가 들어섰다.

"네 동생은 요즘 어찌 지내느냐?"

원문필은 원숭환의 아들이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청나라 사람이었다.

비록 쿠툴러 출신이었으나, 그렇기에 공을 세워 청의 주류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는 소년이었고.

그렇기에 도르곤이 그를 이간계에 써먹은 것이 아니겠는가.

"착잡한 모양입니다."

그가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설명을 해주어도 원문필은 듣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원숭환을 반간계로 제거한 것이 홍타이지라는 사실을, 적비의 입으로 알려주자 원문필은 입을 다물었다.

"네 정체를 밝혔느냐?"

"금의위 사람이라고만 일러두었습니다."

적비는 동생의 구명을 위해 이자원에게만 밝힌 것일뿐, 그 동생이라 할지라도 이야기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원칙이었기에.

'곧 망할 오랑캐의 관직 따위가 아니라, 당당히 네 근본을 찾아 살게 해주마.'

원숭환의 명예를 복권시켜주고 한인 사족으로 올려주겠다는 제안은 당연히 혹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원문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협력했다.

이자원이 적비를 부른 것은 그 일 때문이리라고, 그는 짐작했다.

"너는 낙양성 밑에서 여러가지 일을 처리했다 들었다."

적비를 구명해준 것이 낙양성이었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적비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의 명나라 관리만큼 욕심이 많은 자가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관직을 쥐었으니 착복한 돈은 상당했다.

간신이라 보기에는 지나칠지 모르나 욕심 많고 시류에 영합하는 인간이었으니.

"내가 필요한 것은 그의 약점이다."

이자원은 당당하게 낙양성의 치부를 요구했다.

적비 또한 원문필의 구명을 청했을 때부터 이런 요구를 받으리라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적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자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필이 당당히 제 근본을 찾아 살고자 한다면······ 아버님의 복권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금상께서는 절대 들어주실리가 없겠지요."

적비는 숭정제를 안다.

죽으면 죽었지 자신이 의심병에 걸려 원숭환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자원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낙양성을 이용해 원숭환의 복권을 이끌어내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허면 금의위도지휘사의 약점이 이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길게 보면 그렇겠지."

이자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요컨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원문필을 이자원이 살려준 것도 사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도 사실.

적비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소인은 황제가 밉습니다."

적비가 말했다.

그 말투에는 존칭도 경외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님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그리시는 그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곧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 대국을 넘보려 하신다면 소인은 목숨을 다해 막을 것입니다."

"너는 너의 나라에 충성하여라."

이자원이 말했다.

"나는 내 나라에 충성을 다할테니."

그 대담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

이솔태 이하 한인 관리와 사족들의 도움을 받아 요양을 정리한 조선군은 곧장 심양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요양과 심양은 그야말로 지척.

고작 이틀 거리에 불과하다.

길 자체도 이때까지와는 달리 넓게 펼쳐진 요야(遼野)였으니 조선군은 훨씬 수월하게 진격할 수 있었다.

"심양성이 보인다!"

누군가 외쳤다.

조선군은 청의 심장, 심양에 다다랐다.

< 일보(一步)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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