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양성 전투 (3) >
밤중.
요양성에서 울려퍼지는 함성과 비명 소리에 조선군은 하나둘씩 깨어났다.
이완이 이를 보고하기 위해 도원수의 군막에 들어갔을 때, 이자원은 이미 깨어있었다.
"적들에게서 내분이 벌어진 것 같사오이다."
성내의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온 이완과 달리 이자원은 담담했다.
애초에 노리고 했던 협박이 실제로 먹혀 들었을 뿐이니.
"혹 이런 일까지 예상하신 것이오이까?"
"청의 통치가 오래되었다면 오히려 이 협박은 부작용을 낳았을 것이오."
현재의 청이 만(滿)·한(漢)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제국이었다면 오히려 저들은 죽기로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이나 증국번 같은 한인 신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이나 외적에 맞서는 것은 중원을 완전히 정복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대다수의 요양 백성들에게 현재의 청은 힘으로 들어선 이민족 왕조일 뿐.
다른 세력이 힘으로 압도한다면 망설임없이 새 주인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역시 도원수 대감의 모략은 따라갈 자가 없사오이다."
이완이 혀를 내둘렀다.
"나도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행한 것 뿐이오."
연산관 근처에서 백기의 사당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마침 발견한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요양성의 위기감을 끌어올리고, 완전히 도성 선언을 감행하며 적의 심리를 흔들었다.
그 결과가 성내에 벌어진 혼란이었다.
"제장들을 모두 들라 하시오."
이자원이 말했다.
"도원수 대감, 요양에서 누군가가 왔사오이다!"
머지 않아 요양에서 뛰쳐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잡아 병사들이 끌고 왔다.
가장 앞장선 사람은 피칠갑이 된 신달리였다.
"장군, 요양성민들이 스스로 서문을 열었습니다. 부디 성으로 드시어 요양을 오랑캐의 손에서 해방하여 주십시오!"
척 보기에도 고관 같아 보이는, 변발까지 한 사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스웠지만 이자원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훈련중군."
"예, 도원수 대감."
이자원의 부름에 김충선이 답했다.
"훈국을 거느리고 입성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시오."
성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나 성 전체를 장악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전력일테고, 기껏해야 성문 정도나 점거하였을 것이다.
불길이 사그라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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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솔태는 이자원의 예상과 달리 서문의 점거 외에도 다른 곳에 병력을 돌렸다.
성첩을 지키느라 방어가 허술했던 관부 쪽이었다.
내부에서의 반란군과 함께 훈국군마저 쏟아져 들어오자 아지거는 끝내 당해내지 못했다.
"너희들이 어찌 이 대청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이냐!"
"요양성민 대부분은 불과 이십년 전만 해도 명의 백성이었거늘 어찌 배신 운운할 수 있겠소?"
배신감에 치를 떨며 외치는 아지거에게 이솔태가 답했다.
그는 같은 처지의 한족 신사들과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절반 정도는 성문을 열게 하고,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아지거의 신병을 사로잡기 위해 나아온 터였다.
대부분의 병력은 성을 지키기 위해 나가있었던데다 조선군의 공격도 막아내야 했으니 아지거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들을 맞아야 했다.
"이 더러운 만족(蠻族) 놈이!"
"미안하나 성이 살기 위해서라도 그대의 목을 조선군에 바쳐야겠소!"
아지거와 이솔태의 목소리가 엇갈리며, 양쪽에 나눠선 군사들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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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성이 '항복'한 것은 한창 동이 틀 녘의 일이었다.
실상 열린 성문으로 쏟아져들어온 조선군이 대부분의 청군을 처리했지만, 중앙의 관부만큼은 이솔태가 장악하고 이자원을 맞았다.
"다시 뵙습니다, 장군."
이솔태는 성장(城長)의 관인과 함께 아지거의 목을 들어바쳤다.
"일찍이 항복하라는 군령을 내렸거늘 어찌 이제서야 성문을 여는가?"
이자원의 옆에 있던 김충선이 준엄하게 꾸짖자 대표인 이솔태는 고개를 조아렸다.
"군왕이 말을 듣지 않는 통에 늦어졌습니다. 그러나 성중의 의군들이 이제 그를 처단하고 요양을 장군께 바치오니 모쪼록 덕을 베풀어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솔태가 엎드린 채로 관인을 높게 쳐들었다.
각도 탓인지 긴장 때문인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리를 해서라도 아지거의 목을 스스로 취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조선군의 추궁에서 면피하기 위함.
그러나 이자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분명 일전 항복하지 않으면 죄 도성(屠城)하리라 말하였다. 군중에는 허언이 없는 법이다. 너희들은 형세가 불리해지고 나서야 자비를 애걸하는가?"
"그, 그것은······."
이솔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늦긴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성문을 열고, 아지거까지 죽였는데 정말로 도성을 벌이겠다는 말인가.
"도원수 대감, 심양이 코 앞이오이다! 이틀 거리만 더 나아가면 드디어 북벌을 이룰 수 있거늘 애꿎은 요양 성민을 베느라 대업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가 구천에 가서 인조대왕과 고종대왕을 어찌 뵙겠사오이까!"
임경업이 걱정스레 말했다.
학살에 드는 비용은 여러가지가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아까운 비용은 시간이었다.
요양이 함락된 것을 심양의 강덕제도 얼마 뒤면 알 터인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는가.
하루라도 빨리 진격해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게다가 대국에서 이를 알고 무어라 꾸짖어온다면,"
임경업이 무어라 말을 더 잇기 전에 이자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성문을 스스로 연 점은 가상하다. 그러나 분명 기한 내에 항복하지 않은 죄를 묻지 않을 수도 없는 법."
이솔태와 신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이자원의 이어진 말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요양성민을 몰살하는 대신, 여섯 명의 목을 받겠다. 백성을 대신해 죽으러 나올 의사들(義士)이 있다면 도성 명령을 거두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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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거의 목을 베고 성문을 여는 것으로 간신히 학살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여긴 요양의 사족들은 이솔태가 전한 이야기를 듣고 광분했다.
"오랑캐들을 베고 항복했는데 어째서 우리를 몰살하려 든다는 말이냐!"
"이리 죽나 저리 죽나! 차라리 조선군과 싸우다 죽는 것이 낫겠군!"
"자자, 진정하시오!"
이솔태를 비롯한 이들은 간신히 사족들을 진정시켰다.
"다행······히도 조선군은 자신들이 내미는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얌전히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하였소."
"그게 무엇이오?"
사족들은 이솔태를 보고 물었다.
"항복하지 않은 책임을 질 여섯 사람의 목을 대신 바쳐야만 하오."
"······이미 바치지 않았소?"
대부분의 만주족 장수들은 아지거와 함께 반란군에게 죽거나 끝까지 싸우다 조선군에게 명을 달리했다.
그들의 목으로 부족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남은건 우리의 목 밖에 없거늘."
남은 것은 청의 관직을 살던 한인 사족들 뿐이다.
"조선군은 오로지 도성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여섯 명의 목만 바치라 했을 뿐이 아니오? 그럼 누구라도 상관없을 터! 천것들이라도 잡아다 바칩시다."
"하지만 그렇잖아도 민심이 흉흉한데 제아무리 무지렁이 같은 민초들이라 할지라도 순순히 따르겠소?"
백성들이 보기엔 이들 사족들은 청에 붙었다가 형세가 불리해지니 다시 조선에 붙고, 이제는 자신들의 목까지 가져가려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럼 목숨값을 넉넉히 쥐여주고서라도······."
"아니, 그럴 필요 없소."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족들을 보며 이솔태가 말했다.
한인 사족들은 그를 전부 쳐다보았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나서서 목을 바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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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솔태의 아버지인 이영방으로부터 내려오는 철령 이씨 집안은 요동에서 가장 명망 있는 한족 집안 중 하나였다.
그 옛날 요동의 왕이나 다름없이 행세하던 이성량과도 맥이 닿아있던 가문이니 말이다.
청에 항복한 뒤로는 이영방이 누르하치의 손녀와 결혼하는 등 그 위세는 더욱 드높아졌던 바, 지금의 광경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요양의 저자에서 이솔태의 자식과 형제들이 줄줄이 묶여 끌려나온 장면을 보고 요양 백성들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요양성을 살리고자 대신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던데."
"오랑캐에 빌붙은 집안인줄 알았더니 실상 진짜 선비가 아닌가."
묶여있던 이솔태가 나서서 외쳤다.
"이미 조선국이 청을 토평하기 위해 나아와 대의가 떳떳한데 함부로 거기에 맞섰으니 그 죄 말할 수 없이 크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무슨 죄가 있겠소! 내 한 목숨을 바쳐 성을 살릴 터이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토록 하시오!"
이솔태의 말을 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어느 틈에 울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과장되게 꺼이꺼이 울며 외쳤다.
"장군! 군자는 인의를 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 의사(義士)들을 살려주십시오!"
"저들의 의기를 보아 살려주십시오!"
마치 바람이라도 잡듯이 하나둘씩 나서서 외치자 그 열기는 모여있던 백성들에게로 전염이 되었다.
"이 천한 놈들이 대신 죽겠습니다!"
"저들을 베려거든 이 요양성민들부터 모두 베어주십시오!"
어느 틈에 저자에 모여있던 요양 백성들은 전부 털썩 꿇어앉아 빌기 시작했다.
"도원수 대감, 백성들의 청이 이리 간절하니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경업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비록 오랑캐 치하에서 살아가던 백성들이라 하나 대국의 사족과 신민답게 인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조선군 장수들도 무릎을 꿇으며 간청하니, 요양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듯 칼을 뽑아들고 이솔태에게로 향했다.
이솔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쉬익!
청 초기의 변발은 금전서미라 하여 뒤통수에 아주 적은 머리카락만 남겨 가늘고 길게 땋는다.
이자원의 명검은 그 쥐꼬리만큼 가는 변발을 정확히 잘라냈다.
"너희의 의리가 참으로 가상하다! 우리 조선은 인의를 아는 나라인데 어찌 의로운 선비를 죽일 수가 있겠는가? 오랑캐의 물이 든 머리카락을 베는 것으로 갈음하고, 더는 죄를 묻지 않겠다. 요양의 백성들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끝내 백성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그 목석같던 도원수마저 녹인 것일까.
이자원의 외침에 요양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군!"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변발 머리가 끊어진 이솔태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연설을 마친 이자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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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자원은 백성들의 용기에 감동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장면은 그가 연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바탕 잡극(雜劇)을 벌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자원은 이솔태를 보며 말했다.
가도군 중에서 몇명을 뽑아 백성들을 선동케 할테니 안심하고 나서라는 제안이었다.
"허나 이리되면 저희 집안이······."
원래 역사에서는 청나라에서 대학사까지 올라가는 이솔태다. 그는 이자원의 의도를 즉각 알아차렸다.
"몰살 직전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요양을 구해낸 영웅이 되겠지."
이자원은 두 손을 깍지끼고 말했다.
그러나 이솔태는 더욱 긴장하여 물었다.
"이렇게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적당히 재산과 지위만 보전해주면, 아니 그 전에 목숨만 살려주어도 그의 일가는 감지덕지할 것이다.
그런데 숫제 이런 미담이 천하에 진동할 정도로 대접해주는 이유는······.
"나는 전쟁 후를 바라보고 있다.."
이자원은 이솔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군대만 주둔한다고 그 나라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 얼마나 새로운 질서에 협력하냐는 것.
그런 점에서 이솔태의 집안은 이자원이 찾는 협력자에 딱 들어맞았다.
북벌이 끝나면 필연적으로 주류에서 몰락할 만주족도 아니었고, 그의 집안은 오랫동안 요동에서 호족 행세를 해왔다.
한간(漢奸)의 오명을 썼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지만, 이자원은 오히려 그 점에 주목했다.
"너의 집안은 명나라에 붙을 수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실로 그렇습니다."
이솔태의 아버지인 이영방은 싸움 한번 없이 누르하치에게 무순성을 넘겨주었다.
누르하치는 그 무순성을 기반으로 날아올라 지금의 기반을 다졌다.
명나라가 요동을 수복할 경우 결코 이영방 일가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조선에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백성들이 이영방 집안에 보내던 부정적인 시선마저 깨끗이 씻겨나갔으니, 그 명망과 영향력을 온전히 활용해서 말이다.
"하오면 조선의 뜻은······."
"함부로 발설치 말라."
이자원의 경고에 이솔태는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장군의 말씀,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솔태가 길게 읍한 뒤 물러갔다.
이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요동의 친조선파로 거듭날 것이다.
저 '요양을 구한 여섯 선비'가 선동한다면 요동 사족들도 대부분이 이편으로 돌아서리라.
다시금 요동에 슬금슬금 발을 들이려는 옛 주인, 명에 맞서서 말이다.
"실망시키지 말도록."
이자원이 나가는 이솔태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편 그 시각 심양은, 피난하는 백성들로 난리가 나있었다.
< 요양성 전투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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