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양성 전투 (2) >
공성을 시작한지 닷새째.
아직 요양은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요양성은 사방 10리나 되는 큰 성입니다. 지금으로 보았을 때는 적어도 한달은 넉넉히 죄어 들여야 할 것이오이다."
"그리되면 늦소."
우직하게 성을 공격하여 떨어트리자면 수많은 피해를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포위를 통해 점차 말려죽이는 것이야말로 공성의 기본이었으나, 조선군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도르곤이 언제 회군할지 모르는 이때, 요양을 느긋하게 공략할 여유 따윈 없었던 것이다.
"하오면······."
휘하 장수들의 우려에도 이자원은 담담히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박철균이 들어와 이자원의 귀에 입을 갖다댔다.
"장군, 맡기신 일은 한치 오차없이 해냈다고 합니다."
박철균의 귀엣말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되었소."
"되다니요, 무엇이 말이오이까?"
"부원수가 안산(鞍山)을 함락하고 북상했소."
안산은 요양 인근의 작은 도시다.
연산관부터는 요서로 곧장 내달리는 지름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끼어있는 곳이 안산이었다.
이자원은 요양을 공격하기에 앞서 서북 도원수의 직을 내어놓고 북벌군 부원수로 옮겨앉은 유림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안산을 점령토록 했다.
"과연 부원수군."
비록 안산이 작은 고을이라 하나 이리 빠르게 함락한 것은 조선의 숙장다웠다.
그러나 목적은 고작 안산 따위가 아니었다.
부원수 유림은 북쪽의 조양현(朝陽縣)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현재의 푸신시로, 내몽골과 맞닿았으면서 농사가 제법 되어 초원과 요동의 경계라 할만해 제법 번성하는 곳이었다.
청과 몽골을 이어주는 요지였으니, 그 의도는 명확했다.
'이제 요양에서는 어찌 나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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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성은 웅정필이 요동경략으로 있던 시절 북쪽을 흐르는 태자하(太子河)의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가 항시 마르지 않도록 하였다.
명군이 애써 해자를 만든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는 단 이틀만에 요양을 함락하였으나, 조선군의 진격을 가로막는데는 톡톡히 써먹고 있는 중이었다.
"적들도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을 선택한 모양입니다."
"그래, 제놈들이 별 수 있겠느냐."
첫날에야 야습을 당한 탓에 성벽까지 달라붙은 조선군에게 공격을 당했지만 다음부터는 아지거도 적극적으로 격퇴했다.
요양성의 해자에는 고정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여기에 팔기를 풀어 더러는 건너서 적을 치고 더러는 적을 끌어들여 공격하며 솜씨 좋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적이 남쪽으로 쳐들어오면 동문과 서문으로 나가 적들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양 옆으로 쳐들어오면 남문으로 나가 들이치며, 삼면으로 공격해오면 오로지 굳게 지킨다."
아지거가 수립한 전략은 실제로 제법 잘 먹혀들어가는 듯 했다.
"대왕! 적들이 물러갑니다!"
크게 북을 치고 호각 소리가 울려퍼졌다.
물러가는 적들을 바라보며 아지거는 외쳤다.
"자, 이제 적들의 수급을 거두어야 할 시간이다!"
교각을 따라 성을 뛰쳐나간 팔기들이 조선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날아간 화살에 맞고 쓰러진 병사들이 더러 생겼고, 팔기들은 망설임없이 그들의 수급을 취했다.
군대는 물러갈 때가 가장 취약한 법이었으니 이때가 가장 공격하기 좋았다.
"물러나라!"
아지거는 너무 깊숙이 들어가기 전 북을 울려 팔기를 돌아오게 했다. 소소한 이득 정도로 만족해야지, 적의 아가리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무슨 꿍꿍이일지도 모르거늘 함부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아지거가 군사를 신중히 운용한 덕인지 그는 이때까지의 청군처럼 이자원의 흉계에 걸려들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목적은 예친왕이 돌아올 때까지 요양을 지키는 것 뿐.'
결코 모험은 하지 않으리라.
조선군의 수급이 요양의 저자에다 매달리는 광경을 보며 아지거가 생각했다.
그때 구사 어전 구무가 와서 외쳤다.
"대왕!"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안산이 함락되었습니다!"
"뭐라?"
아지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산은 요양의 인근 도시이니 적과 맞닿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요동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요양과 심양.
구태여 군사를 쪼개 안산을 함락했다는 것은······.
아지거는 황급히 성루에 올라 바깥을 내다보았다.
조선군의 숫자는 첫날과 달라지지 않았다. 즉, 안산을 점령한 조선군은 이곳 요양의 본군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했다.
"북상했구나!"
아지거가 이를 갈며 말했다.
군사를 쪼개 보낸 곳은 아마 투메드부가 있는 조양현.
그곳을 틀어쥐면 귀환하는 도르곤을 막아세울 수 있다.
"대왕, 어찌해야겠습니까?"
"바보같은······."
요양을 순전히 힘으로 함락하려면 전 병력을 투입해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이자원은 그러니 아예 병력을 쪼개서 도르곤의 발을 붙들자는 심산이 아닌가.
잘된다면 요양을 공략할 시간을 버는 셈이겠지만, 청군을 상대로 병력을 나눈다는 것은 각개격파될 가능성도 높다는 뜻이다.
아지거는 이자원의 그 자신감이 두려웠다.
나눈 병력만으로도 도르곤의 발 따위는 충분히 붙들 수 있다는 자신감.
'예친왕을 믿고 맡겨야 하나?'
그러나 연산관도 순식간에 돌파한 조선군이다.
아지거의 마음 속에 한번 생긴 불안감은 꺼지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대왕! 소장을 보내주십시오! 소장이 가서 조양을 지원하겠습니다!"
구사 어전 예천이 외쳤다.
요양의 수비병력은 충분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 병력은 그쪽으로 돌려도 상관이 없겠지만······.
예천의 말에 아지거가 잠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북서쪽에는 포위가 없으니 그리로 병력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멍하니 길이 막히는 것을 두고 보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한번 공세를 가하여 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북상하는 조선군을 그대로 저지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자력으로 요양을 지킬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었다.
고민하던 아지거는 예천을 보며 말했다.
"3천 군사를 내어줄 터이니 너는 북서쪽으로 나가 적을 물리쳐라. 내가 주의를 끌어줄 것이다."
"예, 대왕."
그러나 예천은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조양현을 구원하기 위해 태자하를 넘은 예천의 군대는 기다리고 있던 유림군에게 대패해 간신히 도망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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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과 조우하였을 때 그들은 알고 있었다는 듯 반전하여 우리군과 맞섰습니다. 우리군은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려 돌격했지만 조선군에게서 끊이지 않고 탄환이 날아오는 통에 온통 들판이 피로 물들어······."
"그만!"
아지거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대패해 돌아온 청군을 본 후 요양성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도르곤이 구원을 올지 안올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길이 끊기고 구원하러 나갔던 예천마저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군중에서 참언을 지껄이는 자는 목을 베겠다!"
아지거가 호령했지만 민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라도 성이 함락되면 요양의 성민들은 다 죽는 것이 아닌가?"
"저 오랑캐들 때문에 우리 모두 도륙당하게 생겼구나!"
요양에는 만주족도 많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5만에 달하는 한족들이 살고 있었다.
청이 요양을 점령한지도 이십년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지금 남아있는 이들은 그럭저럭 청의 통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청의 편에 선 죄로 성이 함락되면 모조리 죽어나가게 생겼다 하니 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예천 장군이 패하고 조선군이 조양으로 진격하고 있다 하였소. 조양이 넘어가면 몽골과의 교통이 끊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요양도 끝장이 아니오?"
이솔태는 '공연히 화친을 이용하자 하여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혀있었다.
물론 그 집안이 집안이니만큼 잔혹한 고신을 당하지는 않았고, 어디까지나 성 안을 다잡기 위해 하옥당한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내가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었다면 계략 하나를 냈다는 이유로 이리 옥에 갇혔겠소? 옛날에도 우리 아버님을 한족 항장이라 괄시하는 자들이 많았소. 태조께서 기의할 때 무순을 들고 항복하여 기반을 만들어준 것이 아버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오! 그런데 그 꼴을 오늘 내가 당할줄은 몰랐구려."
이솔태의 반응은 기묘했다.
입으로는 화를 내는 반면 눈은 옥에 모인 한족 신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분위기가 반쯤 넘어갔구나.'
아지거는 딱히 이솔태를 중히 벌하고자 가둔 것은 아니었고, 이솔태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이 이리된 이상 그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자원의 도성 선언과 청군의 패배로 요동치는 민심, 그리고 뿌리깊은 한족에 대한 차별.
이것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요양은 이미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맞소이다. 이제 매륵액진(머이런 어전)께서 나서실 차례요."
"병자년에 조선에 종군했다 항복한 말구종(쿠툴러)들도 모두 목숨을 건져 명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소. 이자원 장군이 준 말미 안에 항복하지 않았다 하나 그것은 모두 만주인의 탓이니 우리가 항복한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겠소?"
요컨대 항복하지 않은 책임을 모조리 아지거와 만주인들에게로 떠밀어 버리고 이들 한인들은 살길을 찾자는 뜻이었다.
요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한족 집안인 이솔태를 내세워서 말이다.
이솔태는 그 중 의외의 인간이 끼어있음을 보고 물었다.
"신달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신달리의 원래 이름은 김여규(金汝圭)로, 본래 의주의 조선인 출신이다.
그러나 당시 서북에 자행되고 있던 모문룡의 행패를 견디지 못하고 후금으로 건너와 전공을 쌓아 제법 고관에 오른 터였다.
그러나 홍타이지의 죽음과 한윤과 한택 형제의 '배신'으로 인해 조선인 출신은 숫제 동요계층 취급을 받기 시작하며 그 또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청은 이미 끝장이 났습니다."
신달리는 이솔태를 보며 말했다.
이미 청의 성세는 명백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만주를 몽땅 잃고 요심만 남은 청이다. 연산관을 돌파당하고 요양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으니 지금 함락되지 않더라도 수년내로 무너지지 않겠는가.
"거기다 요양이 함락되면 이자원 장군이 호언한대로 모조리 죽는 결말 밖에 없겠지요. 목숨은 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달리 같은 자에게 매국노라는 개념을 함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고향과 조국을 등진 것을 누가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자들은 다시 한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새 조국도 등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솔태는 신달리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신달리 장군 같은 분도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이솔태도 동감이었다.
"어차피 성을 모두 장악할 필요도 없소. 나와 장군이 이미 가담했으니 몇몇 이들만 포섭해놓으면 될 것이오."
머이런 어전 이솔태는 이 한족 신사(紳士)들에게 대책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원이 망할 때는 여러 한족 충신들이 의병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작금의 청에 그정도까지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이 요동을 점령한 것은 원나라 백년 통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으니.
"이제 결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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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벌써 여기까지 이르렀었다니."
도르곤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몽골에서 황급히 회군해 조양에 이른 도르곤은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조선군을 발견하고 대경했다.
한번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싱겁게 물러나버린 조선군이었지만, 이쯤되면 연산관은 벌써 넘어갔으리란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요양도 이미 위험하겠군.'
"서둘러라, 요양이 함락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도르곤은 말을 급히 몰았다.
< 요양성 전투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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