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36화 (136/213)

< 요양성 전투 (1) >

"대왕, 조선군이 요양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아지거는 요양성에 도착하자마자 들어온 보고에 침음성을 흘렸다.

연산관을 함락한 조선군은 삽시간에 회령령과 청석령을 돌파했다.

여기서 길을 끊고 매복하던 아다리는 산을 죄다 뒤질 기세로 훑어대는 조선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꼬리를 뺐다.

"게다가 연산관이 함락되었을 때 조선군이 수상한 짓거리를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무슨 소문?"

"그것이, 이자원이 백기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아지거는 그 행위에 담긴 함의를 깨달았다.

"미친 놈! 요양의 백성을 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아지거가 서안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백기는 장평에서 40만을 학살하고 조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이제 이자원이 5만 대군을 이끌고 요양까지 왔으니, 이곳에서 마찬가지로 학살을 벌이고 청나라를 멸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성내에 전하라! 이자원이 백기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풀 한포기 안남게 도륙하겠다는 뜻이니 살고 싶다면 성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아지거는 오히려 이것을 요양의 민심을 다잡는 기회로 써먹고자 했다.

마침 조선군의 진영에서 요양성으로 날아온 이자원의 서신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미 너희 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천병이 거푸 이겨 천하의 형세가 너희 나라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데 어찌 온순히 명을 받들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냐?

그러나 하늘의 도는 살리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너희 오랑캐가 일찍이 칼을 들어 맞섰다 한들 어찌 용서치 못하겠느냐? 항복하면 성중 사람과 재물을 온전히 보전하여 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여전히 죄를 얻으려 든다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도성(屠城)함이 마땅하니, 하루의 말미 동안 깊게 생각하여 결정토록 하라.」

아지거는 기가 찼다.

도성이라 함은 성을 함락한 뒤 그 안의 군민(軍民)을 모조리 살육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 같은 '오랑캐'는 밥먹듯이 했던 짓으로, 청나라 역시 입관 후 남명의 양주를 함락한 후 백만에 달하는 백성을 학살한 기록이 있었다.

물론 백만이란 숫자에는 과장이 있겠지만.

그러나 조선군이 그런 짓을 저지르겠다고 선언할줄은 꿈에도 몰랐던 아지거였다.

"이따위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요양은 큰 성이고, 예친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조선군은 결코 우리 목숨을 거둬가지 못할 것이니라!"

아지거가 그렇게 선언하자 한인 관리인 이솔태(李率泰)가 차분히 그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그는 청에 항복한 한인 장수 이영방의 아들로, 지금은 머이런 어전(梅勒額?)의 직에 있었다.

"대왕, 하지만 적이 기왕 항복을 먼저 권하였으니 잘 달래어 말미를 조금 더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친왕께서 돌아오실 시간을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지거는 이솔태를 바라보았다.

도르곤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관건이긴 했으나, 과연 말 한마디로 천금보다 귀한 시간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대가 가서 적을 꼬여보라."

===

"도성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오이까? 비록 오랑캐들도 있다 하나 대부분은 본디 대국의 백성일 것이온데 후과를 어찌 감당하시려고······."

우려를 표하는 임경업에게 이자원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항복한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하루의 시간을 주었으나 요양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군도 그동안 진채를 차리고 공성 준비를 마쳤어야 했으니 슬쩍 찔러본 것일뿐, 이자원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외였던 것은 옛날 청에 항복했던 이영방의 아들이라 밝히며 찾아온 이솔태란 자였다.

"저희 대왕께서 장군의 위엄에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계시나 군신간의 의리가 있는지라 채 결단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장군께서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모쪼록 소관이 돌아가 대왕께 항복을 설득토록 하겠습니다."

이솔태의 말이 끝나기 전 이완이 나서서 호통을 쳤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로군. 너희 구왕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셈이 아니냐?"

그리 외치며 이솔태를 내쫓으라 하는 이완을 이자원이 제지했다.

그리고는 이솔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대는 본시 한족이고, 또 우리에게 항복할 마음이 있는듯하다. 이 참에 우리 군중에 머무르며 군무를 도울 생각은 없는가? 그대가 온다면 천조의 참장직을 내어주겠다."

뜬금없이 자신에게 가담할 것을 제안하는 이자원에게 이솔태는 적잖이 당황했다.

"······소관 같은 더벅머리 선비 하나가 무슨 도움이 되오리까.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요양을 통째로 얻어 장군께 바치리다."

이솔태는 간신히 혀를 움직여 그리 말하자 이자원은 슬쩍 웃어보이며 답했다.

"어영대장의 말처럼 쉬이 믿을 수는 없는 말이다. 허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적진에 온 용기가 가상하니 그대의 용기를 보아 딱 사흘만 항복을 기다려주겠다."

"정말이십니까? 감사드립니다, 장군!"

이솔태는 뜻밖에도 이자원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자 연거푸 감사를 올렸다.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듯 했다.

===

- 쿠쿵!

조선군이 쏜 포탄에 맞아 가옥의 한 축이 내려앉았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틈으로 당황한 병사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녔다.

"화약을 옮겨라! 유폭되면 큰일이다!"

"전부 갑주를 챙겨라!"

성첩 역시 마찬가지로 상황이 급박했다.

함성을 지르며 성벽을 타고 오르는 조선군을 향해 청군은 서둘러 끓는 기름을 퍼부었다.

"역시! 이자원 같은 자의 말을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아지거가 이를 갈면서 외쳤다.

이자원은 역시 교활한 인간이었다.

항복 기한을 늘려주는 척 대답을 해놓고 바로 그날밤 공격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대왕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대비를 해놓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흥, 당연한 일이다."

범용한 장수였다면 그 대답을 듣고 마음이 풀어졌을지 모르나 아지거는 애초에 이자원의 말 자체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항복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조선군이 물러간다!"

한참 성을 두들기던 조선군은 끝내 청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저희 진영으로 도망쳤다.

백성을 동원해 성벽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아지거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보고에 한숨을 쉬었다.

"대왕, 피해가 생각보다 크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군부터가 피해를 도외시하고 달려들었으니 청군도 그에 상응하는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지거가 생각하기엔 이만하면 훌륭히 막은 것이었지만 초장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당한 요양성민의 생각은 다를 것이었다.

부하들은 그런 아지거를 향해 말했다.

"대왕, 이것은 적들의 화친 운운에 넘어가 부화뇌동한 탓이 큽니다. 민심을 다잡으려면 조치가 필요하겠습니다."

아지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응창성(應昌城).

호거가 이곳에서 에제이를 옹립하고 몽골의 부활을 선언한 이후, 제법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

원래가 남북으로 1.6리, 동서로 1.5리에 불과한 성이었으니 수성전을 벌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몽골군-호거의 상삼기도 일부 섞여 있었지만-은 야전을 펼치기 위하여 너르게 펼쳐진 들판에 도열했다.

"이런······."

대칸 에제이는 응창의 성벽에 올라 초조하게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터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그의 운명이 이 싸움에 달려있는 까닭에 차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 뿌우

이윽고 뿔피리 소리와 함께 양군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숫자는 청군이 소수 우위에 있긴 했지만 완벽히 이쪽이 열세에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그간 한몸처럼 움직이며 싸움을 치러온 청군의 팔기와 달리 몽골군은 여러 부족의 군세를 끌어모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 휘릭휘릭!

양쪽의 궁시가 서로를 덮치고, 화살비를 헤치며 뛰쳐나온 병사들이 적을 향해 창칼을 휘둘렀다.

"끄어억!"

말을 타고 달려가던 몽골 병사가 청군의 창에 가슴이 관통당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창을 찌른 청군 또한 미처 무기를 회수하지 못한 채로 얼굴에 칼을 맞았다.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줄줄 흘리며 낙마한 청군이었다.

면상에 정통으로 칼을 맞아 날아가 버렸으니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죽여라!"

"이곳만 넘으면 몽골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

"더러운 반역자 놈들!"

"여진 오랑캐들이 할 소리냐!"

이 시대 최강의 유목전사들답게 전투는 치열하고 처절했다.

창대에 후두려맞아 이가 몽땅 부러지면서도 칼을 휘두르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적의 배에 창을 밀어넣고, 부여잡은 화살로 상대방의 눈을 찌르려 들다 달려가는 말에 짓밟혀 사이좋게 곤죽이 되었다.

창칼을 교환하고, 발로 차고, 이로 물어뜯고, 몸으로 들이받아 버리는 광경들은 어느덧 뿌옇게 일어난 먼지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어가고 있는가!"

에제이가 외쳤다.

옆에 있는 신하들도 승패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워낙 치열한 싸움인데다 양측의 수효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전투가 시작된지 두 시진 쯤 지나고 나자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대칸, 우, 우리군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하나둘씩 저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도망쳐 응창성으로 후퇴하더니 곧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졌구나!"

여러 신하들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벌판에는 시체들와 피가 가득했고, 그 위로 청군이 짓쳐들어왔다.

"대칸······."

자신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시선을 외면한 에제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문을 열어라."

===

"에제이를 사로잡아 왔습니다, 대왕!"

도도가 호탕하게 웃으며 형에게 외쳤다.

그의 손에 붙잡힌 '대칸' 에제이는 부들부들 떨며 도르곤을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대왕. 저는 호거의 강압에 따랐을 뿐입니다."

잠시 침묵한채 그의 애원을 구경하던 도르곤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비록 역적에게 옹립되었다 하나 그대는 선황의 부마요. 어찌 함부로 목숨을 거두겠소. 여봐라, 포박을 풀고 군중에 자리를 마련해드려라."

에제이는 연거푸 감사를 표하며 물러났다.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표정은 밝았다.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겠군.'

제아무리 꼭두각시라고는 하나 대칸으로 복위되었던 시점에서 에제이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누가 그를 이용하려 들지 모르니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에제이는 척 보기에도 병 때문에 그 명이 얼마 남지 않은듯했다.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는 올해 초에 이미 목숨을 다했을 인간이 아니었던가.

"저자의 동생이 몇살이라 했지?"

도르곤의 물음에 도도가 답했다.

"아부나이(阿布奈) 말씀이십니까? 올해 일곱살인가 여덟살인가 할 것입니다."

"다음 차하르 친왕에 그놈을 올리면 되겠군."

도르곤은 오랜만에 실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좌중을 바라보았다.

"몽골을 정벌하심을 경하드립니다, 대왕."

"경하드리옵니다!"

호거는 바투르 홍타이지의 오이라트 연합군을 상대하러 떠나면서도 상당수의 수비군을 남겨 두었다.

도르곤이 이 틈을 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략은 바보지만 군재는 뛰어난 호거가 직접 상대하러 나오는 것이라면 모르되, 남아있는 병력만으론 청의 주력을 이끌고 친히 원정한 도르곤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연달아 패한 몽골군은 어느새 응창성까지 몰렸다.

응창성은 코웃음 나올 정도로 작은 성이었으니 공성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말처럼 야전에서 몽골군이 패퇴하는 꼴을 보자 에제이는 곧장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제 호거도 끝이다.'

도르곤은 그렇게 생각했다.

'끝장나기 전 오이라트 놈들과 적당히 상잔을 해주면 좋으련만.'

호거가 몰락하고 오이라트가 서몽골을 합병하면, 필연적으로 청과 국경을 맞대게 된다.

물론 바투르의 근거지는 저 멀리 천산(天山)의 두메산골에 불과하니만큼, 호거처럼 청의 안위에 위협적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청에게는 그정도만으로도 큰 부담인 것이다.

'바투르에게 화북을 같이 약탈하자고 해야할까.'

그런 제안을 해서 오이라트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나을런지 고민하던 도르곤이었다.

그때 그의 귀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왔다.

"······북벌군을 거느린 자가 이자원이라 했더냐?"

"그렇습니다, 대왕."

도르곤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자원, 이놈이 목숨을 걸었군!"

"대왕, 진정하십시오. 아다리와 상가희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대왕께 소식을 전했다 하니 아직 적은 연산관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도르곤은 도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자원이 이끌고 있는 조선군이라면 연산관이 무너지는 것은 기정사실.

지금 중요한 것은 연산관이 얼마나 버텼을지 하는 것이다.

"연산관이 무너졌더라도 시간만 제대로 끌어주었다면 제때 도착할 수 있다."

도르곤이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군 회군하라! 조선군을 막으러 떠난다!"

도르곤의 선언에 청군은 분주히 철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응창을 함락했다는 기쁨 따윈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제부턴 청나라 최대의 숙적을 물리치러 가야했다.

< 요양성 전투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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